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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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핵심은 이 페이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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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53

뭔가 행동을 하는 것이 꼭 더 나은 것도 아니다. 감상적인 감정이 무자비함이나 그보다 더 나쁜 것은 즐기는 취향과 완벽히 양립할 수도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대표적인 예로서, 저녁에 퇴근해 아내와 자식들을 다정하게 껴안아 준 뒤 저녁식사가 준비될 때까지 피아노 앞에 앉아 슈베르트의 곡을 연주했다는 아우슈비츠 사령관의 사례를 상기해보라). 사람들은 자신이 본 것(만약 본다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알게 되는 적절한 방법이라면)에 금방 익숙해지지는 않는다. 어마어마한 양의 이미지들이 그들에게 쏟아지기 때문이다. 감정을 무디게 만드는 것은 수동성이다. 냉담한 것으로, 혹은 도덕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무감각한 것으로 묘사된 상황은 따지고 보면 감정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분노의 감정, 좌절의 감정일지라도 연민을 자아내기에는 너무 단순할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들을 통해서 타인이 겪고 있는 고통에 상식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텔레비전 화면에서 클로즈업되어 보여지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을 볼 수 있다는 특권을 부당하게 향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련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비록 우리가 권력과 맺고 있는 실제 관계를 또 한 번 신비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한, 우리는 자신이 그런 고통을 가져온 원인에 연루되어 있지는 않다고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는 연민은 우리의 무능력함뿐만 아니라 우리의 무고함도 증명해주는 셈이다. 따라서 (우리의 선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연민은 어느 정도 뻔뻔한(그렇지 않다면 부적절한) 반응일지도 모른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하고 있으며 우리의 특권이(우리가 상상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식으로, 가령 우리의 부가 타인의 궁핍을 수반하는 식으로) 그들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해 보는 것, 그래서 전쟁과 악랄한 정치에 둘러싸인 채 타인에게 연민만을 베풀기를 그만둔다는 것,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과제이다.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어 놓는 고통스러운 이미지들은 최초의 자극만을 제공할 뿐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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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고통에 처한 이들을 도와야 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각종 매체를 통해 보는 혹은 실제 겪는 고통들 속에서 무감각과 외면을 방어기제로 삼고 있다. 또다른 한편으로는 고통 앞에 자신의 무능력함과 무고함을 반추하고만 있지 않고 행동에 나선다. 수전 손택은 고통받는 이들을 1차적으로 돕는 것을 넘어 고통의 배후에 있는 악랄한 정치를 향해 주먹을 들 것을 권한다.

 휴버트 드레이퍼스, 숀 켈리 공동저작 [모든 것은 빛난다](2013)에서 저자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우리의 본능과 행동의 동기유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들은 우리 속 허무주의를 깨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들의 해법 제시는 의식적인 부분이라 문제해결의 즉각성을 바라기는 어려움이 있다.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란 책도 출판했는데, [타인의 고통]이란 책과 더불어 생각해 볼 사건이 생각난다. Kevin Carter의 자살(관련해서 영화 [뱅뱅클럽]도 있다). 당신도 기억할 것이다. 굶주려 쓰러져 있는 소녀 뒤에 독수리가 기다리듯 바라보고 있는 사진 말이다. Kevin Carter는 그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그러나 여론은 즉각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죽어가는 소녀를 구하지 않고 사진을 찍은 행위에 대한 도덕적 지탄이었다. 그는 3개월 후 결국 자살했다. 그 사진은 아프리카 기아에 지대한 관심과 대책을 불러 모았지만 Kevin Carter 자신은 구하지 못했다. Kevin Carter를 죽음으로 몰아간 이들은 Kevin Carter의 죽음 앞에서 이제 뭐라고 말할텐가.

 언제나 시대는 문제를 알고 있다. 그러나 너부터 잘 해라, 너는 그러고 있나. 나하나 챙기기도 벅차다, 라며 혀를 차거나 한숨이나 쉬면서 공범의 연대를 만들려고 한다. 내가 나만 넘어서면 즉각 타인이 된다는 걸 잘 알고 있음에도 수전 손택의 말처럼 우리는 쉽게 수동적이 된다. 유니세프에 기부하는 것으로 최선이라고 말할 수 있나. 타인의 고통은 한 끼의 식사가 아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씩 도운다고 것은 이상적이지만 현실적이지도 않다. 빠르고 현명한 타인의 고통 해결법은 모두가 나서 이 땅에 정치, 사회적인 토대를 바꾸는 데 적극적이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실행되고 유지되어야 하는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 오래된 정답은 아직도 숙제처럼 그렇게 있다. 우리의 본능적인 배타성, 공간 점유의식, 탐욕은 이성적인 해법으로는 대처하기 어렵다는 반증일 것이다. 고통은 스스로가 탈출하는 것이 아니라 다같이 구출해내는 것. 인간애, 그것을 오래 생각해본다.  

 

ㅡAgal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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