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인터뷰나 에세이보다 더 리얼한 ‘작가는 무엇인가‘


문학의 힘이란, 저는 늘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걸 만들어내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한가에 달려 있다고요. 그랬기 때문에,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서 특별한 의식儀式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었거든요.

유니언광장까지, 서로의 길이 갈라지기 전까지 몇 블록을 함께 걸었어요. 작별인사를 할 때, 무용수가 몸을 숙여 제 옷깃에 인 보풀을 뜯어주었죠. 그 순간은 부드럽고 친밀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저기, 벽에서 내렸어요, 그가 작게 말했어요. 뭘요? 제가 물었죠. 선생님 소설을 읽고 나서요, 벽에서 그림을 내렸어요, 더이상 바라볼 수가 없어서. 그랬어요? 제가 말했어요. 무방비 상태였죠. 왜요? 처음엔 저도 이유를 몰랐어요, 그가 대답했죠. 이사를 다닐 때마다, 도시를 옮겨다니면서도 가지고 다닌 그림이었거든요, 거의 이십 년 동안. 하지만 얼마 후엔, 선생님의 소설을 읽고 나서 비로소 무언가 분명해졌다는 걸 이해했습니다. 그게 뭐였을까요? 저는 궁금했지만 차마 묻지 못했네요. 무용수는, 비록 나이가 들었지만 여전히 나긋하고 우아한 동작으로 팔을 뻗어, 두 손가락으로 제 뺨을 한 번 쓰다듬어준 다음 돌아서서 사라졌어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처음에는 그의 동작이 혼란스럽다가 나중에는 불쾌했어요. 겉으로만 보면 다정한 행동으로 오해할 수도 있지만,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 행동에 어떤 업신여김이, 심지어 모욕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었던 것만 같았죠. 무용수의 미소가 점점 더 가식적으로 느껴졌고, 그가 수년간 그 동작을 준비해온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어요. 머릿속으로 계산을 하며, 나와 우연히 마주칠 때를 기다려온 거라고. 그럴 가치가 있었을까요? 그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했던 게 아닐까요? 저한테만 한 것도 아니고, 그날 밤 그 자리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 앞에서 한 건데? 제가 좀더 은밀한 방법으로—이를테면 그의 일기나 편지를 몰래 읽고—그 이야기를 알게 된 거라면, 아마 그런 일은 그를 잘 모르는 저로서는 불가능했겠지만, 달랐겠죠. 혹은 그가 여전히 고통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저에게만 그 이야기를 했다면 달랐을 거예요.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거든요. 저녁식사 후에 그라파를 한 잔씩 나눠줄 때와 다름없이 미소를 띤 채 활기차게 이야기했는데 말이에요.

제가 들었던 소리에 대해 아무에게도, 심지어 수년 동안 제 상담의였던 릭트먼 박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어요. 그후로 얼마 동안은 아이 소리가 들리지 않기도 했고요. 하지만 그 비명소리는 제게 남았어요. 가끔 글을 쓰다보면 제 안에서 갑자기 그 소리가 들려서, 생각의 흐름을 놓쳐버리고 멍해질 때가 있었죠. 그 비명소리에 조롱 비슷한 것이 숨어 있음을 인식하기 시작했어요, 처음엔 듣지 못한 어떤 배경음 같은 것. 혹은 아침에 일어날 때, 잠에서 빠져나와 깨어 있는 세계로 넘어오는 바로 그 순간에 그 소리가 들릴 때도 있었어요. 그런 아침이면 뭔가가 목을 휘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잠을 깼죠. 뭔가 보이지 않는 무게가 집안의 물건들에, 찻잔, 문손잡이, 컵에 붙어 있는 것 같았어요. 처음엔 알아차리기 힘들지만, 어떤 동작을 하든 아주 조금씩 더 힘이 들고, 그런 동작들을 마친 다음 책상에 가서 앉을 때쯤엔, 이미 제 안에 남아 있던 힘이 모두 슬그머니 빠져나가버린 상태였죠. 한 단어를 쓰고 다음 단어를 쓰기까지의 쉬는 시간이 길어지고, 힘들게 떠올린 생각을 글로 옮기려는 그 결정적 순간이 흔들리며, 무관심이라는 어두운 공간이 열리는 거예요. 아마 그게 제가 작가로 살면서 가장 자주 싸워야 했던 상황 같네요. 일종의 부질없는 관심, 혹은 무기력한 의지라고 할까요. 사실 그런 상태가 너무 꾸준했기 때문에 그다지 신경쓰이지도 않았어요—침묵에 굴복하라고 나를 부추기는 힘 같은 것 말이에요. 그런데 이제, 그런 순간에 발목이 잡힐 때가 종종 생긴 거예요. 그런 순간이 점점 길어지고 폭도 넓어지면서, 그 너머를 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해져버릴 때가 있었어요. 그래서 마침내 그 너머에 이르렀을 때, 구명보트처럼 어떤 단어가 찾아오고,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이어져도, 약간의 의심을 품은 채 그 단어들을 바라보기 시작한 거죠. 그런 불신은 제 작품에만 한정된 건 아니었어요. 스스로에 대한 깊은 불신을 인식하지 못한 채 작품만 의심하는 일은 불가능하니까요.

작업은 계속 엉망이었어요. 이전보다 훨씬 느려진 것은 물론, 이미 써놓은 것들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고, 과거에 쓴 것들이 모두 잘못되었고 방향이 틀렸다는, 그 모두가 거대한 실수였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었죠. 그동안은 나의 작업이 사물들의 숨은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그 반대가 사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 거예요. 제가 제 글의 소재가 된 사물들 뒤로 숨었던 거라고, 그것들을 이용해 평생 동안 다른 사람에게 저의 은밀한 결점이나 결핍을 숨겨왔고, 글을 씀으로써, 심지어 저 자신에게도 숨겨왔던 거라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결핍은 더 커졌고, 더이상 숨길 수 없을 지경까지 와버렸기 때문에, 그래서 작업이 점점 더 어려워지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어요. 어떤 결핍이냐고요? 글쎄, 영혼의 결핍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아요. 힘과 활력의 결핍, 연민의 결핍이요. 그리고 그런 결핍에서 이어진, 결과로서의 결핍. 글을 쓰는 한, 그런 환상들이 떠나지 않았어요. 직접 결과를 목격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겠죠. 저는 기자들에게 자주 받았던 질문, 책이 사람들의 삶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라는 질문(질문의 진짜 뜻은, 정말로 당신이 쓰는 무언가가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겠죠)에 이렇게 답하곤 했어요. 반격의 여지가 없는 질문을 기자에게 되던졌죠. 무슨 일이 생겨서 지금까지 읽은 모든 문학작품이 머릿속에서 지워진다면, 머리와 영혼에서 지워진다면, 본인이 어떤 사람이 될지 한번 생각해보라고요. 기자가 그런 황량한 상태를 그려보는 동안 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등을 기대고 앉아 있었어요, 그렇게 또다시 진실을 마주하는 것을 피한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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