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백조가 된 무시당하던 새끼 오리. "나는 저 위대한 새들에게로 날아갈 거야!" 미운 오리 새끼는 말한다. "그가 백조알 속에 놓여 있기만 했다면, 마당에서 태어난 것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궁금했다. 백조로 태어났기 때문에 오리도 오직 백조가 될 수밖에 없었다면, 그리고 인어공주가 꼬리를 갈랐지만 그 역시 다시 바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면, 이 이야기들이 약속하는 변신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확실히 크리놀린과 단단히 동여맨 허리끈 아래에는 더 복잡한 드라마가 있다. 그건 필요, 욕망, 열망, 그리고 두려움이 집합되어 있는 이야기였을 터다. 만약 그렇다면 이 서술들로부터 무언가를 예측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언제나-여자였어요’라는 하나의 플롯은 인간 정신의 상반된 흐름들을 반영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동기들, 젠더에만 국한되지 않은 다른 동기들을 압도해 버린 것처럼 보였다. 어느 정도 자기 성찰을 해내는 회고록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남자로 살았던 과거에 저지른 죄에 대한 면죄부를 찾기 위해서 나의 순수함을 갱생시켜 주는 여성성을 찾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라든가, "나는 억압당하는 자로서 누릴 수 있는 도덕적 위상을 갈망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든가, 혹은 "특별한 존재, 칭송받는 존재, 사랑받는 존재가 되고 싶어서 여자가 되려는 것은 아닐까?" 등 작가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이야기를 찾아 헛되이 헤맸다. 개인의 역사, 모든 개인이 저마다 경험하는 특별한 투쟁, 실망, 삶에 대한 열망, 이 모든 것이 ‘정체성’이라고 이름 붙은 하나의 유리병에 깔끔하게 들어갈 수 있을까? 프로이트 이후, 심리요법의 기술은 표면상으로는 통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성격의 다양한 면모를 파헤치는 데 집중했다. 에릭슨 시대 이후로는 정체성에 대한 탐구의 상당 부분이 정반대의 목적을 추구했다. 심리적인 복잡성을 줄이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광범위한 한 방을 찾는 데 집중한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한 사람의 삶 전체라는 이야기를 하나의 정체성 유형으로 축소해 버린다. 하지만 ‘정체성’이 ‘심리학’과 의절하는 데 쓰인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 정체성을 에릭슨이 경고했던 ‘전체주의’가 되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은 무엇인가?

"각각의 모험은 정확하게, 성적 경험의 하나의 극에서 다른 극으로 이동한다." 샌디 스톤은 1991년에 쓴 진심 어린 호소, 「‘제국’의 역습: 포스트-트랜스섹슈얼 선언문」에 이렇게 썼다. "섹슈얼리티 연속체 사이에 놓인 어떤 공간이 있다면, 그건 보이지 않는다···. 물론 페미니스트 이론가들은 의심할 것이다. 제기랄, 나도 의심스럽다." 미디어 이론가이자 MtF 트랜스섹슈얼인 스톤은 내가 읽었던 초창기 트랜스 자서전들을 읽었고 나처럼 실망했다. "모든 작가들은 무엇이 여성다움을 구성하는가에 대한 남성들의 전형적인 설명을 그대로 복제하고 있다. 드레스, 화장, 그리고 피를 보자마자 연약한 것처럼 기절하는 것 등." 그녀는 모든 회고록이 "남성 페티시이자 사회적으로 강요된 역할에 대한 복제로서 ‘여성’을 비슷하게 묘사한다"고 썼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를 ‘개구리에서 공주가 된’ 동화 속 여주인공에 투사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고도 썼다. 누구도 초-여성적인 여성과 초-남성적인 남성 사이에 존재하는 것을 상상하려 하지 않았다. 스톤의 연구는 문학의 한계에 도전하며 스스로를 ‘젠더 무법자’라고 주장한 일군의 새로운 트랜스젠더 작가들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새천년에, 아마존의 히트작 <트랜스 페어런트>와 슈퍼스타의 반열에 오른 전 올림픽 선수 케이틀린 제너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성별 이분법에 대한 고수가 더 견고해지는 와중에도, 성 연속체에 대한 주장은 더 커지고 있다. 그래서 PGPpreferred gender pronoun(선호하는 젠더 대명사라는 의미. 이 용어는 대학 캠퍼스에서 유행하고 있다)와 ‘젠더퀴어’나 ‘데미걸’, 혹은 ‘가이다이크’로 스스로를 지정함으로써 표현되는 유동성의 시대에도 종종 낡은 시대의 근본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여성’이라는 바로 그 관념이 본질주의자의 환상으로 비판되는 시대에도, MtF 트랜스섹슈얼의 여성성은 침범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되었던 것이다.
"그들의 모든 역사에 대해 책임을 지려고" 노력하는 탈근대적 트랜스젠더 이론가들은 자신의 저작에서 완전한 여성성을 고집하지 않았다. 그들은 외과 의사인 제우스 박사의 머리에서 튀어나온 아테네가 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자인한 잡종 같은 젠더의 ‘괴물적인’ 면모까지도 끌어안고자 했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이 (에릭 에릭슨처럼) 자신의 이름뿐만 아니라 성姓도 바꾸면서 자전적인 기록에서 이전 정체성을 조심스럽게 씻어 냈다. 나는 의문스러웠다. 왜 "젠더에서 어떤 경계도 규칙도 보지 않으려고 하는" 이 법의 이탈자들이 과거 자신들 앞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성적인 이분법을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수술에 굴복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 이분법은 그저 중간 기착지인 것일까?

어느 겨울날, 지나치게 난방이 잘 되던 포틀랜드 공립도서관 한구석에서, 나는 공책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케이트 본스타인의 『젠더 무법자』의 마지막 부분을 읽고 있었다. 본스타인은 그녀가 느꼈던 ‘문화적 압박’을 한탄했다. 그녀는 결국 사회가 ‘진짜 여자’로 여기는 존재가 되기 위해 남자 성기를 버려야 했다. 그래도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래도 수술을 했을 것이다. 이 질과 성기를 가지는 게 어떤 것인지 안 지금, 나는 수술을 한 것이 기쁘다." 그녀의 책은 수술 7주년 기념에 맞춰 쓴 긴 산문체 시로 끝났다. 마지막 시구에서 그녀는 거울에서 소년이 아닌 소녀를 만난 ‘흥분’에 대해 썼다.
그러고선 비밀을 누설한다.

소녀?
그것은 내가 벗어나려고 애써 온 정체성이다.

그리고 또 다른 7년이 왔다 가고 나면 "내 소녀 피부가 내 뒤의 사막에", 그녀가 던져 버린 온갖 낡은 젠더적 의무들 옆에 "놓여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본스타인은 주장한다. 그녀는 정체성을 벗어 버리고 "나에게 딱지를 붙이려고 하는" 사람들을 비웃을 것이라고.

반유대주의에는 화수분처럼 수많은 원천이 있었지만, 근대 파시스트 국가를 위협한 유대인다움이란 종교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또 하나의 문제가 젠더로서의 유대인다움이었던 것이다. 독일의 출판업자인 테오도르 프리슈는 이 문제를 1893년 베스트셀러 『반유대주의 교리문답The Anti-semitic Catechism』에서 확고히 했다. "유대인의 섹슈얼리티는 그야말로 게르만 민족의 섹슈얼리티와 다르다. 유대인은 게르만인을 이해할 수 없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 유대인이 자신의 태도를 게르만인처럼 바꾸려 한다면, 이는 게르만 영혼의 파괴로 이어질 것이다." (당시 빈 은어로 ‘유대인the Jew’은 말 그대로 클리토리스를 의미했고, 여성의 자위는 ‘유대인과 노는 것playing with the Jew’이라고 표현됐다.) 몇 십 년 후에 미래의 나치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는 1930년에 동성애자 남성을 거세하는 법안을 독일 의회에 발의하는데, 그는 동성애를 ‘유대인 역병’이라고 불렀다. 하인리히 힘러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독일을 ‘남성적 국가’라고 천명하면서 그 연관성을 분명하게 했다. "동성애자들의 음모는 유대인들의 음모와 하나씩 비교하면서 봐야 한다. (···) 그 둘 다 독일 국가와 독일 민족을 파괴하는 데 여념이 없다." 역사학자 샌더 길먼이 관찰한 바에 따르면, 그즈음 유럽은 "근대 유대인의 출현뿐만 아니라 근대 동성애자의 출현을 목도하고 있었다." 이 쌍둥이의 탄생은 "역사적 우연, 그 이상의 것"이었다고 길먼은 쓰고 있다. "근대 유대인다움은 인종화된 만큼이나 젠더화된 범주가 되었다." 이는 프로이트 역시 의심했던 일이었다. 프로이트는 이런 경향이 등장하기 수년 전이었던 1909년 소년의 거세 공포에 대한 분석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거세 콤플렉스는 반유대주의의 가장 깊은 무의식적 근원이다."
유대인 남성의 여성성에 대한 믿음은 근대의 선도적인 유대인 작가, 학자, 의사 그리고 정치인 들에 의해서 내면화되고 널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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