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은 "애쓰지 마라(Don’t Try)."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자신이 멍하게 벽만 바라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벽은 이상한 회색에 두껍고 축축하고 그만의 사연을 가득 품은 데다 아주 낡고…… 오래되었다. 여자도 그렇다……. 그들이 나이 먹는 것을 보면 정말로 슬프다. 젊은 애들의 탱탱하게 올라붙은 몸을 봤을 텐데…… 그 애들의 자부심은 정말 싫다. 기계적이고 찰나에 불과한 몸뚱이에 자부심을 느낄 필요가 없는데도 그렇게 하는 것을 증오한다. 자부심이란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고 승리한 사람만 가질 수 있는 것인데……. 그는 다시 미소를 짓고 가만히 서서 벽을 쳐다보았다. 벽이 즐겁고 의미 있어 보이기에 한 손가락으로 축축하고 거친 회색 가장자리를 만졌다.

- 「카셀다운에서 온 스무 대의 탱크」

독수리도, 당신 엉덩이의 들썩거림도 어쩔 수 없고, 내가 어쩔 수 있는 건 인간의 운명뿐이지……. 죽음. 세상에, 죽음이란 믿을 수 없어……. 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초록색 벽과 묵주 그리고 죽음을 마주했어. 잠긴 문에서 몸을 돌려…… 물기를 머금은 잔디를 보았어. 잔디는 항상 반짝이고 반짝이지……. 그 이유가 뭘까?

난 사람이 가늠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엄청난 지옥을 거쳐 왔고, 나 말고도 그런 사람이 또 있을 거라 믿으며 호흡마다 웃음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책은 아주 단조로운 것들을 단조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칼을 들고 비명을 지르는 나환자는 없다. 토사물을 쏟아 내는 멍청이나 진을 마시고 취한 여자애들처럼 살게 내버려 두지 말기를. 오늘은 창문을 부수고 E. 파워 빅스를 들을까 한다. 당신의 핑계는 뭐지?

(중략)

인간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은 죽을 수 있다는 것과 그걸 무시하는 능력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시와 그림은 억제력이 없고 사실주의를 무시할 만큼 마음에 큰 장애물이 되지 못한다. 마침내 진실이 항상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종종 진실을 제쳐 놓는 것이 중요하다.

-「 와인으로 얼룩진 단상들」

존 브라이언이 지하신문인 《오픈 시티》를 창간하기로 마음먹었다. 난 일주일에 한 번 칼럼을 써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칼럼에 ‘음탕한 늙은이의 비망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가면을 쓰고 단편을 썼다. 일주일에 한 번씩 2년 가까이 썼다. 이기든 지든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경마가 끝나면 여섯 개들이 맥주팩 서너 개를 뜯고 베토벤과 바흐를 시시하게 만들어 버리는 말러를 들으며 칼럼을 썼다.
내가 건넨 원고는 브라이언이 모두 인쇄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모두가 천재로 대접해서 난 그런 척을 하고 그런 글을 써야 했다. 어렵진 않았다. 천재가 되고 싶으면 유일한 사람이 되면 된다.

-「음탕한 늙은이의 고백」

헤밍웨이는 구성과 의미와 용기와 실패와 과정을 알려고 투우를 배웠다. 나도 같은 이유로 복싱을 하고 경마를 한다. 손목과 어깨와 관자놀이에 감각이 느껴진다. 지켜보고 기록하는 태도가 글이 되고 형태가 되고 행동이 되고 사실이 되고 꽃이 되고 개 산책이 되고 침대와 더러운 팬티가 되고 앉아서 타자 치는 소리가 되고, 그렇게 앉아서 자기만의 올바른 방식으로 타자를 치는 소리가 세상에서 가장 큰 소리가 되고 어떤 아름다운 여자가 찾아와도 눈이 가지 않으며 회화나 조각도 비할 게 아니다. 글을 쓰는 건 최종 예술로 용기가 있어야 하고, 역대 최고의 도박으로 대개는 이기지 못한다.
누군가 내게 물었다. "부코스키 씨, 글쓰기 강좌를 연다면 학생들에게 뭘 시킬 건가요?"
난 명쾌하게 대답했다. "모두를 경마장으로 보내 경기당 5달러씩 걸라고 하겠어요."
질문한 사람은 내가 농담을 하는 줄 알았다. 인간은 배신과 사기에 능하고 태세 변경도 잘한다. 작가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나약하고 더러운 책략을 쓸 수밖에 없는 분야에 발을 들이는 일이다. 파티에 나온 많은 사람이 그토록 혐오스러운 이유다. 질투하고 편협하고 교활한 면모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누가 친구인지 알고 싶다면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사람을 파티에 초대하거나 자신이 감옥에 가거나.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것이다.
내가 횡설수설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 젖꼭지나 거시기나 다른 사람의 것을 잡아라. 모두가 여기 속한다.

-「올바른 호흡과 길을 찾는 법에 대하여」


댓글(3)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11-11 1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20-11-11 14:29   좋아요 1 | URL
경마장을 한 번도 안 가봐서 전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경마장 가는 길> 소설이 좀 알려 줄까요(뭐든 책으로 보려는 이 심리ㅎ)
전혀 떠드시는 거 아녜요. 모든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긴 힘들어서 저혼자 몰래(다 보고 있다!) 사부작 남기는 것도 있지만 신간 경우 내용이 궁금할 분들에게 정보만이라도 남기자 그런 생각도 있어서^^; 월말에 페이퍼로 한번에 정리하면 정보 공유가 늦는 거 같아서^^)>

2020-11-11 14:30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