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합본 특별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20년 6월
평점 :
품절


 

하루키스트(harukist, 무라카미 하루키 팬의 통칭), 무라카미언(murakamian, 프랑스)이란 조어가 생길 정도로 하루키 팬층은 두텁다. 창작 생활 40년이 넘어서도 청년층의 인기도 여전하다. 북플 통계를 보면 하루키는 내가 가장 많이 읽은 작가다. 하루키가 책을 계속 내는 한 이 순위는 변함없을 거 같다. 하루키에 빠져들기 시작하면 한 권만 읽을 수 없고 한 번만 읽지도 않는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에세이든 자신이 좋아하는 곳을 골라 마음껏 빠져든다. 나부터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하루키 팬들도 그럴 것이다. 독자들은 하루키식 (때론 오글거리는) 청춘형 문장과 (‘봄날의 곰’이나 ‘100퍼센트 소녀’ 같이 기발한) 비유와 유머, 그의 라이프 스타일(마라톤 같은 열혈 운동가, 영화와 음악 등 박학다식한 교양인, 요리와 다림질 등 만능 가사맨, 문화마저 멋지게 섭렵하는 매력 만점 여행가)에 반해 그의 소설에 쉽게 접근한다. ‘재밌다’, ‘이전보다 어렵다 or 별로다’, ‘여성을 도구적으로 쓴다’ 등의 인상평으로 그치기도 하고, 그가 뿌려놓은 메타포와 상징의 의미를 해석해보려 머리를 쥐어짜기도 한다. 하루키 소설은 어렵게 읽고 싶으면 어렵게 읽을 수 있고 쉽게 읽고 싶으면 쉽게 읽을 수 있다. 

나카무라 구니오, 도젠 히로코 『하루키의 언어』에 따르면, 한국에서도 일상에서 자주 쓰이는 '소확행'이란 조어는 하루키, 안자이 미즈마루 & 하루키의 아내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림과 사진 『이렇게 작지만 확실한 행복』(1993~1995년 미국 체류기)이란 수필집을 통해 유명해진 것이라고 한다.

 

 

위에서 열거한 하루키에 대한 전반적 호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일본의 서브컬처 비평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가라타닌 고진을 인용하며 "재패니메이션, 하루키, 요시모토가 쉽사리 세계화되는 이유는 구조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대부분의 독자든 비평가든 하루키가 영향받았다고 언급한 도스토옙스키, 카프카, 샐린저, 피츠제럴드 같은 후광 효과로 작품 분석에 실패했다고 말하고, 하루키는 오히려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이나 《스타워즈》에 더 영향을 받았다며 신화적 구조('모험으로의 부름 - 조력자(여신)와 만남 - 모험 - 역경 - 변모 후 귀환')를 비교해서 보여준다. 하루키 작품을 쭉 읽어온 독자라면 그의 소설에서 신화의 특성을 읽는 건 어렵지 않다. 남편이 저승의 나라로 죽은 아내를 찾으러 가는 오르페우스 신화(『노르웨이의 숲』, 『태엽 감는 새 연대기』 비롯해 기타 등등), 아버지 살해라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해변의 카프카』) , 고대의 죽임을 당하는 왕(『1Q84』) 등등 말이다. ‘구조밖에 없다’라고 질타하는 에이지가 전말을 제대로 파헤친 걸까. 그 또한 캠벨, 《스타워즈》 같은 대단한 기표들로 폼 나는 비평을 했다는 느낌이다. 이계(異界)와 현실을 오가는 신화적 구조로만 읽을 때 소설의 매력은 휘발된다. 주목할 것은 구조 자체가 아니라 왜 이런 구조를 가지느냐이다. 하루키가 자주 다루는 '실종', '가출', '상실', '죽음'이 오히려 이런 구조를 부른다. 하루키는 『해변의 카프카』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일층은 모두가 모여서 밥을 먹거나 대화를 나누는 공동 공간이다. 이층은 개인 공간으로 나뉘어 각자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거나 한다. 지하가 있는데, 사용하지 않는 물건을 쟁여두거나 이따금 들어가 넋 놓고 있다가 나오기도 한다. 일반 소설이라면 이런 테두리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실은 지하 일층 아래에는 또 다른 지하가 있다. 그곳에는 특수한 문이 있어서 평소에는 들어가지 않지만 어쩌다 들어가면,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어둠뿐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평소 집 안에서는 하지 못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건 자신의 혼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이 그곳에 들어가면 나오는 길을 몰라 복귀할 수 없는 위험이 있다. 하지만 소설가는 의식적으로 그 지하 이층의 방을 들락날락할 수 있는 사람이다. 비밀의 문을 열고 캄캄한 어둠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어떤 일을 체험하고, 다시 문을 닫고 현실로 복귀한다. 그것이 직업적인 작가이고, 진짜 작가다.’

ㅡ 유카와 유타카, 고야마 데쓰로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는 오후』

 

 

 

하루키가 정의한 작가론처럼 그는 지하 이층형 작가다. 아기자기한 재미 가득한 그의 에세이나 소설 속 일상 묘사는 일층의 모습이다. 정체성을 찾는 근대적 교양 소설의 면모는 그의 모든 소설에서 볼 수 있는 지하 일층의 모습이다. 주체가 해체되고, 선악의 기준도 없고, 시공간도 모호하고, 이질적인 게 뒤섞여 경계가 없는 어둠의 세계는 지하 이층의 모습이다. 실제 소설에서도 지하에서 한 단계 더 내려가야 하는 지하 세계나 우물, 문 너머 문, 벽 너머 거울 등 물리적으로도 그렇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 암호를 2차 암호화하는 ‘셔플링(인간의 잠재의식을 이용한 정보 변환술)’도 지하 이층의 표현형이다. 하루키는 가능하다면 더 깊숙이 더 복잡하게 엮고 싶어 한다. 신화적 구조에 혼령의 세계나 노몬한 같은 역사적 사건까지 곁들여 지하를 아주 두텁게 만든다. 그럴수록 주인공이 돌아오는 현실세계와 일상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하루키는 스티븐 킹의 소설이 보수적이고 도식적이면서 가장 문제가 선은 올바르고 강하며, 악은 언젠가 멸망하는 ‘선악이원론’에 있다고 보았다. ‘이처럼 지극히 단순한 도식을 부조리의 세계에 가져왔다는 데 스티븐 킹의 성공비결이 있지만 바로 그래서 그는 제2의 러브크래프트가 될 수 없다’라고 했다.(무라카미 하루키 「동시대로서의 미국 1: 피폐 속의 공포-스티븐 킹」, <바다> 1981년 7월 호. 오쓰카 에이지 『이야기론으로 읽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미야자키 하야오』에서 인용) 스티븐 킹의 허점 파악은 하루키의 이야기론에 분명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하루키 이야기 속에는 선과 악을 명확히 나눌 수 없다. 저 세계에서는 가능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으며, 선택 속에 이야기가 달라질 가능성을 항시 담고 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하루키 소설을 게임 문화와 많이 연결하지만 소설과 영화 속에 힌트가 있다고 본다. 하루키는 하드보일드 소설의 대가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해 늘 격찬했다. 그의 소설을 번역하는 일도 좋아했다. 하루키는 초기 소설부터 지금까지 쭉 미스터리·스럴러 장르 소설의 특징을 고수해왔다. 이 속성은 감춰진 비밀과 욕망, 민낯, 악을 뒤쫓는 액셀레이터로 작동한다. 최근 하루키의 소설 경향을 보면 지하 이층의 규모를 더 키워 판타지 세계로 만들고 있는데, 주인공이 관계 맺지 않는 거리 두기(detachment)에서 적극적인 관계 맺기(commitment)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나 줄곧 고수해온 1인칭에서 다른 인칭으로 시점 변화를 준만큼의 효과는 낳지 못하는 것 같다.

 

 

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1985)가 일반 연애소설 『노르웨이의 숲』(1987), 르포 『언더그라운드』(1997) 만큼 하루키 소설 연보에서 독특하다고 생각한다. 초기 쥐 3부작(『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1988년 『댄스 댄스 댄스』 추가)이 타인의 죽음을 매개로 이계로 가는 연대기를 진행했다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양립하도록 SF적 소재와 패러럴 월드로 분위기를 바꿨다. 이 소설 같은 평행세계는 2009년 『1Q84』의 ‘1984’와 ‘1Q84’로 다시 만난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자연과 동물과 인간이 어우러져 있는 소박한 가상 공간 '세계의 끝'과 철저히 인공적이고 어두운 현실 공간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로 나뉘어있는데 많은 것들이 뒤틀려 있다.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는 소리를 뽑거나 사람이 사라져도 아무렇지 않게 흘러가는 현실이다. 주인공 ‘나’는 조직에서 ‘계산사’로 일하며 중요한 암호를 숨길 수 있는 능력자이지만 그저 보통 사람이다. ‘세계의 끝’에서도 ‘꿈읽기’라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무력하긴 마찬가지다. ‘계산사’나 ‘꿈읽기’는 인생의 메타포다.

 


 

“도무지 모르겠군.” 나는 말했다. “내가 이 뼈에서 오래된 꿈을 읽어 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런 다음 아무것도 안 해도 된다는 건 이해가 안 되는군. 그럼 일하는 의미가 전혀 없을 것 같은데. 일에는 뭐든 목적이 있을 테니 말이야. 예를 들어서 그걸 어딘가에 베껴 쓴다든지, 어떤 순서에 따라 정리하고 분류한다든지.”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나도 잘 설명할 수 없어요. 오래된 꿈을 계속 읽다 보면 당신 스스로 그 의미를 절로 알게 되지 않을까요. 하지만 어차피 그 의미란 당신의 일 자체와는 별 관계가 없어요.”

(중략)

“읽기로 하지.” 나는 그렇게 말한 뒤 다시 한번 테이블에 놓인 두개골을 들고 손안에서 무게를 가늠해 보았다. “어차피, 다른 선택지는 없을 것 같으니까.”

ㅡ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세계의 끝’으로 들어오며 기억을 가지고 있는 그림자를 떼어낸 ‘나’는 과학에서 정의하는 ‘자아’와 완전히 다르다. 신경 뇌과학에서는 ‘기억’이 ‘나’를 형성한다고 본다. “마음이 없으면 어디에도 가지 못해”라고 말하는 ‘나’의 대화처럼 하루키는 ‘마음’, ‘혼’을 ‘나’의 본질로 상정했다. 이걸 이해하면 ‘세계의 끝’에서 ‘그림자(기억)’와 이별하고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소설 속 두 세계에 다 존재한 ‘일각수’는 이와 비슷한 상징성이 있다. 일각수는 특수한 의미를 지니지만 동서양이 다르게 해석하는 가공의 동물이다. 동물이나 자연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적 존재이자 남근적 상징을 가지면서 처녀만이 잡을 수 있는 신화적 특징(‘세계의 끝’), 홀수의 뿔로 인해 자기방어가 취약한 기형의 고아로 도태될 진화적 특징(‘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의 양면성을 가진다. 진화의 세계에서 일각수는 살아남을 수 없다. 의식 프로그램을 나도 모르게 ‘나’에게 프로그래밍한 박사는 과학의 모습을 한 신(神)이었다. '나'가 만든 '세계의 끝'은 그것을 받아들여 붕괴의 숙명에 처한다.

 

 

 

“맞아요. 사고 시스템이란 그야말로 그런 것이야. 한 마디로 할 수 없어.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 자네는 강단이 있거나 겁이 많은 두 가지 양극 중에서 어느 하나를 거의 순간적으로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것이야. 그렇게 세밀한 프로그램이 이미 자네 안에 있는 것이지. 그러나 그 프로그램의 자세한 내역과 내용에 대해서 자네는 거의 아무것도 몰라. 알 필요가 없거든. 그걸 몰라도, 자네는 자네 자신으로 기능할 수 있어. 이거야말로 블랙박스 아닌가. 다시 말해서 머릿속에는 인류가 아직 발을 내딛지 않은 거대한 코끼리 무덤 같은 것이 묻혀 있는 셈이지. 대우주를 제외하면 인류 최후의 미지의 대지라 할 수 있지 않겠나.

아니지. 코끼리 무덤이라는 표현은 좋지 않군. 왜냐, 그곳은 죽은 기억의 집적장이 아니기 때문이야. 정확하게는 코.끼.리. 공.장.이라고 해야 가깝겠어. 그것에서는 무수한 기억과 인식의 칩이 선별되고, 선별된 칩이 복잡하게 얽혀서 라인을 만들고, 그 라인이 또 복잡하게 얽혀서 번들을 만들고, 그 번들이 시스템을 만들고 있어. 정말 ‘공장’이지 않은가. 그곳은 생산을 하고 있어요. 공장장은 물론 자네지만, 안타깝게도 자네는 그곳을 방문할 수 없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처럼, 그곳에 숨어들려면 특별한 약이 필요하지. 루이스 캐럴의 그 이야기는 참 잘 만들어졌어요.”

“그리고 그 코끼리 공장에서 떨어지는 지령에 따라 우리의 행동 양식이 결정된다는 말이군요.”

“그래요.” 하고 노인이 말했다. “그러니까…….”

“잠깐만요.” 나는 노인의 말을 막았다. “먼저 질문할 게 있습니다.”

“그래요, 어서 해 봐요.”

“얘기의 맥락은 알겠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현실적으로 행동 양식을 표층적 행위의 결정까지 확대할 수는 없잖아요. 예를 들어서 아침에 일어나 빵과 함께 우유를 마실 것이냐 커피를 마실 것이냐 홍차를 마실 것이냐, 그건 기분에 따른 것 아닐까요?”

“옳은 지적이에요.” 하면서 박사는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인간의 그 심층 심리가 늘 변화한다는 것이지. 비유하자면, 매일 개정판이 나오는 백과사전 같은 것이에요. 인간의 사고 시스템을 안정시키려면 이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어요.”

“문제요?” 나는 말했다. “그게 왜 문제죠? 인간의 아주 자연스러운 행위잖아요.”

ㅡ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 

 

 

이쯤 되면 하루키가 이런 실험, 이런 질문을 소설에 담은 배경이 궁금해지지 않나. ‘무엇이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가’ 하는 물음은 변하지 않는 탐구 주제인데, 필립 K. 딕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1968년)를 원작으로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 스릴러 영화 《블레이드 러너》가 1982년에 개봉했다. 1984년에는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터미네이터》가 개봉했다. 공교롭게도 1985년 개봉한 테리 길리엄의 디스토피아 SF 영화《브라질》은 하루키의 이 소설과 매우 유사하다. 하루키의 이 소설은 그 시대를 빼고 말할 수 없을 거 같다. 박사는 인간이 시간을 확대해서 불사에 이르는 게 아니라, 시간을 분해해서(사유 속에서) 불사에 이른다는 걸 깨닫게 되자 과학자의 지적 호기심에서 계산사 ‘나’를 실험 대상으로 이용했고, 불사의 세계와 그의 세계(세계의 끝)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는 운명을 내놓는다. 스스로 사고하는 AI가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의 의미를 되묻듯 인간을 프로그레밍된 생존 본능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로 해석할 수 없다.

아무도 비를 그치게 할 수 없고 아무도 비에서 벗어날 수 없어 모두에게 공정하게 내리는 빗속에 밥 딜런의 ‘Blowin' in the Wind’가 흐르며 ‘하드보일드 원더랜드’가 닫히는 풍경은 《블레이드 러너》의 포크 풍 같다. '나'가 만든 세계인 ‘세계의 끝’은 문지기가 지키며 오직 한 사람만을 위해 열리던 그로테스크한 알레고리 소설 카프카 『법 앞에서』의 낭만적 오마주였다. 소설의 역사가 그렇듯 이 모든 것은 이야기만을 좇는 모험이 아니었다. 우리는 하루키를 우리의 ‘꿈읽기’로 여겨 읽고 또 읽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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