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용기의 정치학 - 우리의 삶에서 희망이 사라졌을 때
슬라보예 지젝 지음, 박준형 옮김, 이택광 감수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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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담 속에 “진정한 용기는 대안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대안이 없다는 현실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지젝의 말처럼 대안이 안 보이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하며 이 책을 재차 읽었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수시로 한탄이 터져 나온다. 세상은 왜 이따위로 돌아갈까.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인용하며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게 허용된다”라고 비정하면서도 종교적으로 말할 수도 있겠지만 현실의 아우성에서 이런 문장은 힘이 없다. ‘개가 자신의 고환을 핥는 이유는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더 현실적인 표현이지만 내 답답함은 1%도 해소되지 않는다. 악 속에서 나오는 선보다 선 속에서 나오는 악이 더 많다고 말하는 지젝은 나보다도 답답할 거 같다. 제대로 실현되지도 못하고 나쁜 인식만 박힌 ‘공산주의’의 재창조를 알랭 바디우와 함께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펼치고 있는 그가 말한다. 신자유주의적 이념에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공산주의’야!

 

원저가 2017년에 나와 코로나 시국이 된 지금과 동떨어져 보일 여지도 많지만 이 책의 함의는 여전히 크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자본주의 블랙홀 상황에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21세기 자본이 가진 문제가 아니라, 21세기의 민주주의가 가진 문제”(조지프 스티글리츠 「21세기의 민주주의」)라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스티글리츠는 민주주의를 경제 영역으로 확대하면 ㅡ 소득세와 상속세 상향, 교육 투자, 엄격한 반독점법, 기업의 구조 개혁, 금융권을 강력히 견제할 정부 ㅡ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지젝은 생각이 다르다. “단순한 민주주의 정치는 비자유의 형태로 이어지기 쉬운데, 정치적 자유가 경제적 노예를 만드는 법적 틀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노예를 자처한다.” “실질적인 자유를 위한 열쇠는 시장에서 가족까지 정치와 관련이 없는 다양한 사회관계의 네트워크에” 있으므로 “정치적 개혁이 아니라, 생산을 위한 사회적 관계의 변화” 즉 “혁명적인 계급투쟁”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1937년 조지 오웰이 “계급을 폐지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극소수”라고 말했듯 지젝은 현재 ‘급진 좌파’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진단한다. “민주적인 메커니즘은 자본이 재생을 방해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부르주아’ 국가의 규제에 속할 뿐이다.” 성공을 위한 많은 자기 계발서들이 위기야말로 새로운 기회를 잡을 타이밍이라고 소리 높이지만, 대부분은 성공의 지름길이 아니라 방황과 절망의 비정규직 울타리 안에 있다. 민주주의로 꾸며진 세계 자본주의 농장에서 우리는 사료를 먹으며 미래를 꿈꾼다. 권력이나 돈이 있어야 안락함이든 생존이든 가능하다는 생각이 팽배하지만 우리는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 “자신이 문명의 등불이라고 인식하는 서양 중산층의 패권적인 주체성, 서구에 대한 열망에 사로잡힌 주체성, 서양에 대한 열망에서 오는 좌절감으로 파괴적인 허무주의로 변환된 주체성”과 가족주의와 전통주의가 파괴되기 시작하면서 세계 자본주의에 내재된 ‘모순’ㅡ 원리주의 테러 위협, 난민과 이주민 문제, 파산 상태인 나라의 해방 운동, 중국이나 러시아 같은 나라의 전쟁 도발 우려, 기술 발전으로 인한 실업 ㅡ 등으로 ‘적대감’이 전방위로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진짜 문제는 ‘압도적인 자본주의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일 것인가? 혹은 세계 자본주의는 적대감의 확대를 막을 수 있을 정도로 견고한가?’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적대감은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 번째 적대감은 무형의 자본인 문화의 공유에 대한 적대감이다. 무형의 자본은 통제되지 않은 화폐의 유통으로 인한 불합리한 결과는 말할 것도 없고, 언어(의사소통과 교육의 주요 수단)로 대표되는 인지적인 자본의 즉각적인 사회적 형태를 뜻한다. 두 번째 적대감은 인간이 생산한 오염으로 위협받고 있는 외부 자연의 공유에 관한 것이다. 지구 온난화, 해양 파괴 등 자연에 대한 모든 위협은 지구 위 생명의 재생 시스템을 흩트리고 있다. 세 번째 적대감은 내부 자연의 공유와 관련이 있다(인간의 고유한 생물 발생적 특성에 관한 적대감이라고 할 수 있다). 생물 발생 기술의 발전으로 인간 본래의 모습을 바꾸어 ‘신인류’를 탄생시키는 행위에 대한 반감이다. 인간의 본성을 바꾸는 일이 현실적으로 가능해진다는 뜻이다. 네 번째는 인간 자체, 사회와 정치적 공간의 공유에 대한 적대감이다.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퍼져나가면서, 세계를 분리하는 벽과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가 늘고, 내부와 외부의 사람을 분리한다. 여기에 새로운 지정학적 블록 간의 갈등이 증가하고 있다(즉 문명이 충돌한다). 이 네 가지 적대감에서 ‘공유’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기 때문에, 공산주의 개념의 부활이 정당화될 수 있다. 공유가 제한되면서, 삶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배제되는 과정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인 영토를 벗어나는 현상은 국가의 개입이나 법을 비롯한 다른 기능과 함께 공존하고, 더 큰 개입에 의존한다. 덕분에 개인의 자유주의와 쾌락주의가 국가의 복잡한 규제 메커니즘과 공존하고, 이로써 지탱되는 사회가 나타나고 있다. 국가는 사라지기는커녕 강화되고 있다. (중략) 평판의 순효과를 인정한다고 치고, 그렇다면 과연 평판은 어떻게 생겨날까? 등급은 어떻게 정할까? 공유를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은 일종의 복수심을 갖는다. 프레드릭 제임슨은 『미국의 유토피아An American Utopia』에서 질투심이 자본주의 경쟁을 상기시키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는 즐거움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는 행동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공산주의 낙관론을 일축했다. 그는 이 낙관론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더욱 공정한 공산주의 속에서는 오히려 질투와 분노가 폭발한다고 주장했다. 왜일까? 사회정치학자인 장 피에르 뒤피Jean-Pierre Dupuy는 존 롤스John Rawls의 『정의론』에 대한 설득력 있는 비판을 제시했다. 공정 사회에 관한 롤스 모델에서 사회적 불평등이 용인되려면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계층 때문이 아니라 자연적인 불평등, 다시 말해서 특혜가 아니라 우연에 의해 불평등이 유발되어야 하고, 또 계층의 사다리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롤스는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폭발하는 조건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는 알지 못한다.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가 정당화되고, 개인적인 실패가 사회적 불평등의 결과 때문이라고 비난받아서는 안 된다. 롤스가 제안한 사회적 모델은 계급이 자연적인 이유에 따라 정당화되며,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가 남긴 주요한 교훈을 간과한다. 하이에크는 불평등을 무작위적인 것으로 주장할 수 있을 때 더 수용하기 쉽다는 점을 지적했다. 시장의 부조리나 자본주의 내에서 성공과 실패가 가진 장점은 ‘나는 잘못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실패한 것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은 운명과도 같다.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시장이 공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속에 지젝은 서방 세계 최초로 국가 권력을 잡은 급진 좌파인 그리스의 시리자 정부가 내부 제도의 틀을 어떻게 바꿔 나갈지 주목하고 있다. 스탈린주의(국가 사회주의)의 관료주의적 병폐, 새로운 경제 조직과 일상을 재편하지 못했던 중국의 문화대혁명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좌파가 가진 진짜 문제는 실질적인 사회주의와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가 무너진 후 사회의 재정비에 관한 진지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각자의 역할을 하는 ‘조화로운’ 위계 사회의 반대는 제한된 개인주의가 아니라 평등사회이며, 여기에 가장 잘 맞는 모델은 기독교의 성령이다.” 마오쩌둥의 평등주의는 이 같은 점을 잘 흡수했다. 근대화 과정에서 세속적인 서구사회가 윤리와 정치 모두에서 공백, 비일관성, 불능을 취할 때 전통적인 사회는 대타자의 권위(일본-황제의 신성화, 중국- 유교)를 내세워 사회 안정의 도구로 삼았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은 전통 사회의 구조를 해체함으로써 자본주의로 발전해나가는 폭발을 일으켰다. 종교는 정치적 요소로 활발히 작동한다. 마호메트 만화를 처음 공개한 출판사는 덴마크의 이슬람 혐오 보수주의자들이었는데, 이교도적인 덴마크에 대한 이슬람의 항의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폭력 사태로 이어졌다. “전체주의에서는 외부의 적과의 싸움이 항상 내부의 적에 대한 싸움으로 바뀐다.” 그러므로 “타인의 시각에서 우리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그들이나 우리나 같다’는 거짓된 생각에 만족하지 말고, 우리가 가진 이상한 점을 인정해야 한다. 공산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식을 가진 미치광이이고, 다른 삶의 방식이 공존하길 바랄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 내부의 문제로 ‘성의 정치’도 빠질 수 없다. “60년대의 관대함, 성적 해방, 반문화적, 마약의 정신은 유토피아적이면서 정치적인 운동의 일부였다. 1970년대에는 이런 정신의 핵심이 사라지고, 패권 문화와 이데올로기로 완전히 통합되었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의 것을 줄이자는 노력이(탈정치화) 훨씬 더 심각한 것을 내놓는 것으로(패권 이념으로의 통합) 이어졌다.” 우리는 우리 행위의 한계와 양면성에 더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양성평등과 여성이 가슴을 노출할 권리’를 홍보하는 세계 토플리스의 날 시위는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고정된 아름다움의 기준을 거부”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 운동은 보편적인 해방 운동이 아니라 특정 이념의 짜인 관계”로도 분석된다. 진정한 정치는 개인의 욕망과 환상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게 아니라고 말하는 지젝은 개인적 선호의 영역을 정치적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자유를 위한 해방적 투쟁의 가능성이 있더라도, 개인이 정치적으로 악용하고 있는지를 의심”하는 과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요즘의 많은 문제들이 이런 ‘유사 투쟁’이다. 성 차이로 인한 적대감과 분쟁은 끊이지 않는다. 많은 다문화 이론가들이 ‘성-인종-계급’을 논하지만 계급투쟁이 다뤄지지 않는 것은 중대한 문제라고 지젝은 지적한다. 이런 투쟁들은 소통의 문제, 상대방을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로 접근하기 보다 급진적 변화의 수용이 관건이다.

 

“문서화되지 않은 예의 바름이 일상적인 상호작용을 효율적으로 규제하지 못하면서 시작된”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사실상 “윤리의 해체와 같은 맥락”이다. 인터넷 곳곳에서 내적 도덕성과 외적 도덕성 사이에서의 예의 바름과 PC의 충동이 일어난다. 언론이 제 기능을 못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소셜 네트워크 영향으로 토론이나 논쟁이 아니라 짧은 문장, 비난, 비꼬는 말, 격양된 표현으로 가득한 온통 소음의 전쟁판이다. “뭔가 꺼림칙한 기미만 보여도 자동적으로 대응하며 PC를 적용”하고, “비판적인 의견을 개진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규범을 거부하고 있다고” 자랑스러워한다. 박원순 시장 사건에서도 정치 사회적 인물로서의 치적과 예우 vs 혐오스러운 이중인격자이자 성폭력 가해자로서의 비판 &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음모론이 한창 충돌 중이다.

 

“다른 관점에 대해서 공식적인 관용과 극단적인 개방이 조합하는 이런 문화는 오히려 비판적 사고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는 맹목적 포퓰리즘을 추구하는 트럼프와 같다. 특히 유럽에서 좌파가 우파 포퓰리즘의 공세에 비효율적으로 대응하고 있는 이유다. …… 분노가 포퓰리즘의 힘으로 번져가는 상황에서, 무서운 적에 맞서 싸우기 위해 온건한 진보주의의 유혹에 빠지는 것만큼이나 문제시되는 좌파의 대응 방식은 또 있다. ‘만약 이길 수 없다면 합류하라’ 전략을 변형한 방법이다. 그리스에서 프랑스까지, 그나마 남은 급진 좌파 사이에서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민족주의의 재발견이다. 보편주의는 한순간에 세계 자본과 금융 자본가에 대응할 수 없는 무력한 정치, 경제적 도구로 전락했다. 기껏해야 온정적으로 자본주의를 옹호했던 하버마스Jurgen Habermas와 비슷한 정도의 이념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민족주의가 재부상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서구에서 우파 민족주의 포퓰리즘은 노동자의 권리를 지지하는 가장 강력한 정치 세력이며, 정치적 열정을 부활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왜 좌파는 민족주의 열정을 급진적인 우파에게 양보해야 하며, 프랑스의 극우주의 정당인 국민전선Front National에게 조국을 되찾아서는 안 되는가?’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급진 좌파는 정처 없이 떠도는 금융 자본이 증가하는 지금, 중요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강력한 도구로 민족주의를 동원할 수 있을까? 반이민 포퓰리즘은 정치에 열정을 불어넣으며, 그들에 적대감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와 ‘그들’을 분리한다. 좌파는 우파의 열정적인 접근 방식을 활용해야 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이들은 ‘르 펜이 했다면, 우리도 못하란 법은 없지 않은가?’라며 반문한다. 정말 우파의 열정적인 민족주의 접근법을 받아들여야 할까? 방향을 잃은 어리석은 투쟁이다.”

 

“사회 전체를 구성하고 폐쇄하는 메커니즘, 다시 말해서 개인을 사회적 공간에 잡아두는 메커니즘은 ‘영향의 모방imitatio afecti’이며, 그 지위는 보편적이다. 이는 자기 폐쇄적인 조직이 다른 조직을 배제하는 기본적인 메커니즘인 ‘폐쇄와 배제’다. ‘영향의 모방’은 개인의 이익에 맞게 연결 고리를 만드는 진보적인 개인주의적 개념보다 더 근본적인 수준이다. 스피노자의 출발점은 개인이 아니라, 집중화(한 가지 대상에 대한 복종)에 저항하는 혼란스러운 상호 연결의 광범위한 분야다. 다수와 군중의 개념은 근본적으로 모호하다. 전자는 하나의 집단에 대한 저항인 동시에 비이성적인 폭발인 ‘폭도’를 가리킨다. 이들은 ‘영향의 모방’을 통해서 성장하고 번영한다. 스피노자의 깊은 통찰력은 오늘날의 다양한 이념 속에서 길을 잃었다. 후자는 결정을 내릴 수 없어서 사회적 연계를 위험하게 만드는 특정 메커니즘을 만들고, 이 메커니즘은 다시 인종차별적 폭력의 폭발적인 확산을 지지한다. 스피노자의 주장을 한층 더 발전시킨 들뢰즈의 지적처럼, 영향은 주체에 속하지 않고 다른 주체로 넘어간다. 영향은 전개체pre-individual의 수준에서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고,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에 미치지 못한 채로 순환하며, 기능을 수행한다.

다음 철학적인 결과는 부정적인 것에 대한 철저한 거부 때문이다. 각 객체는 완전한 현실화를 위해 노력한다(모든 장애물은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모든 객체는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내부로부터 어떤 것도 파괴될 수 없다. 모든 변화는 외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로르동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열정의 충돌은 축소할 수 없지만, 외부에 남게 된다. 즉 공통의 ‘conatus(고통)’로 전체화된 그룹 사이에 존재한다).

권력과 권리에 대한 스피노자의 극단적인 방정식을 강화시키는 것은 확신이다. 정의는 모든 객체가 내재적인 힘의 잠재성을 자유롭게 배출하도록 허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나와 내가 가진 권력이 같을수록 정의가 실현된다. 스피노자의 주장은 결국 율법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다. 율법은 차별화된 네트워크와 힘의 관계를 무시하는 추상적인 법을 뜻한다. 스피노자에게 ‘권리’는 ‘행동할 권리’이다. 그런데 이 행동할 권리는 소유를 위한 법적 권리가 아니라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할 권리’이다.” 

 

 

스피노자는 『국가론』에서 남성을 지배하지 못하는 여성은 권리를 구성하는 힘과 능력에서 남성보다 열등하다고 보았다. 폭력과 위계, 권력으로 쟁취하는 남성의 권리 획득 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고 결과로서만 보는 이런 분석은 대단히 잘못되었다. ‘공동체’를 통해 소속과 투쟁을 벌이는 모든 운동은 언제나 딜레마에 빠진다. 정치 철학자 샹탈 무페의 분석에 따르면, “좌파가 패배한 가장 큰 이유는 합리적인 주장, 활력을 잃은 보편주의, 오래전의 열정적인 이념적 투쟁의 종말에 대한 공격적이지 못한 자세 때문이라고 한다.” 어떤 공동체가 탈출구가 될 것인가.

 

“세계 자본주의의 ‘민주적인 결핍’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범국가적인 기관을 만드는 것이다. 200년 전 칸트는 국제사회의 부상에 기반을 둔 범국가적 법적 질서를 요구하지 않았던가? 지금까지 여러 공동체가 발전함에 따라, 세계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권리 침해가 전 세계적으로 알려질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세계적인 시민권의 개념은 허황되거나 과장된 개념이 아니다. 하지만 ‘신세계의 질서’를 위한 원칙에 위배될 수는 있다. 세계 자본주의 경제와 일치하는 국제적인 정치 질서를 찾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할지 모른다. 만약 경험적인 한계뿐 아니라 구조적인 이유 때문에 세계적인 민주주의 혹은 대표적인 세계 정부가 존재할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세계 자본주의의 구조는 전 세계적인 선거를 통한 세계적인 민주주의로는 시장 경제를 통제할 수 없도록 만들어진 게 아닐까? 정치 분야에서 억압된 국제 경제가 귀환하고 있다. 여러 집착이 존재하고, 특히 인종, 종교, 문화적 정체성이 관건이 되었다. 이러한 갈등이 오늘 우리가 겪는 어려움이다. 상품은 자유롭게 유통되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만들어진 벽 때문에 서로 교류하지 않는다.”

 

 

영국 제국이 패권을 잃었던 1900년대와 미국이 패권을 잃고 있는 지금이 묘하게 닮았고, 새롭게 부상하는 러시아와 중국, 지정학적으로 발칸반도와 유사한 중동이 조성하는 사회적 긴장감으로 지젝은 3차 대전의 우려도 표하고 있다. 브렉시트 등 유럽연합도 무너지는 마당에 범국가적인 기관이 만들어질 희망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만들어진다면 인류는 진정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국지적 투쟁으로 서로를 고갈시키는 짓을 멈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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