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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언제 노래가 되지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542
허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6월
평점 :
§ 치자와 시인
치자의 외양은 고혹스러운 자태와 꽃 향을 내뿜지만 만지면 소년 같다. 흙투성이로 돌아온 아이처럼 건드리면 먼지 더께와 제 흔적을 우수수 떨어뜨린다. 가지는 탄력 있고 작은 잎은 말랑말랑하며 단단하다. 이 개구쟁이 식물을 나비보다 거미가 더 좋아한다. 아이를 씻기듯 여러 번 거미줄을 걷어내고 내가 불렀던 아이를 만난 듯 갑자기 커버린 아이의 향을 매년 맡는다. 치자는 가장 뛰어난 치자로서가 아니라 가장 치자 다운 치자로 산다. 거기 결심은 없다. 자연에서 우리가 느끼는 경외심의 대부분은 이 점에서 나온다. 키우는 것이 아니라 관심을 가지고 그저 바라보는 것이 치자와 시인이 우리에게 부가한 위치. 향처럼 경계 없으며 결계가 있는 이 위치, 이 소년은 소녀도 뼈도 될 수 있지만 당분간은.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의 구성으로 살듯이 우리는 노래 자체도 될 수 없다. 꽃향기 음표로서 이 삶을 떠돈다. 치자 향 속에서 시를 읽는 잎이 살짝 흔들린다.
Nevermore
Nevermore
Nevermore
§ 거룩함이 없는 24시
“우리 나이엔 근육량을 늘려야 한다느니 저금리 시대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느니 이번 인사가 어땠고 누구 줄을 타야 한다느니……//이런 소식에서 멀어지기 위해”(「구내식당」) 사람 만나는 걸 피하고 새벽 4시에 24시 해장국집을 가서 밥을 먹었다. 사람이 없는 곳도 소식이 없는 곳도 없다. 음식을 기다리고 음식을 먹는 내내 들어야 하는 그놈이 어떻고 저놈은 어떻다는 궁색하고 비굴한 사내들의 대화. 해장국을 반쯤 먹었을 때 제발 조용히 좀 드실 수 없냐고 쏘아붙이고 귀가 멀어 태어났더라면 했다. 비겁한 자가 비겁한 자에게 가장 비겁하게 굴 수 있다. 당신을 이겼다고 내 삶이 행복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 연인들의 테이블은 더욱 숨죽였고 사내들은 사과의 말을 건네며 처음엔 조용히 대화하다 슬슬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시종일관 연장자의 우위를 즐기는 자가 여길 숱하게 다녔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며 계산서를 요청했다. 삶의 욕심만큼이나 끝까지 잦아들 수 없는 비굴한 자존감. 지긋지긋하게 익숙하고 결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그게 당신들이 만드는 이 세계의 24시다. 24시 해장국집에서 이른 새벽까지 술과 앉아 있는 사람들은 “적도 잊어버리게 하고, 보물도 버리게 하고, 행운도 걷어차던 나날을 복원하지 못하지.”(「우리의 생애가 발각되지 않기를」) 모든 테이블에서 이만 일어나야지 말하고 있었지만 내가 먼저 나왔다. “마신 물이 다 눈물이 되는 것은 아니므로”(「절창」) 미련은 이런 데 이런 시각에 쓰는 게 아니므로. 어느 삶 기슭에서 완벽하게 죽어 있기를 바라며 너무 이른 시각 집으로 돌아왔다. 시를 읽으며 오늘 치의 생을 가여워하기 위해. 자조 섞인 "나쁘게 늙어가기"(「십일월」)를 말하지만 마음속은 늘 "도망치고"(「슬픈 버릇」) 싶은 시들. 삶은 "처지가 정해져"(「트램펄린」) 있는 추락의 詩라서 눈을 떼지 못하는 毒이라서. “지옥은 오는데 / 아직 그는 오지 않았다.”(「지옥에 관하여」)
어떤 거리
서쪽으로 더 가면
한때 직박구리가 집을 지었던 느티나무가 있다
그 나무는 7년째 죽어 있는데
7년째 그늘을 만든다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내지 않는다
나무는 거리와 닮았으니까
지구가 돈다는 사실을
보통은 별이 떠야 알 수 있지만
강 하구에 찍힌
어제 떠난 철새의 발자국이
그걸 알려줄 때도 있다
마을도 돌고 있는 것이다
차에 시동을 끄고 자판기 앞에 서면
살고 싶어진다
뷰포인트 같은 게 없어서
나는 이 거리에서 흐뭇해지고
또 누군가를 기다린다
단팥빵을 잘 만드는 빵집과
소보로를 잘 만드는 빵집은 싸우지 않는다
출발했던 곳으로 돌아오는 동안
커다란 진자의 반경 안에 있는 듯한
안도감을 주는 거리
이 거리에서 이런저런 생들은
지구의 가장자리로 이미 충분하다
중심에 관해
중심을 잃는다는 것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회전목마가
꿈과 꿈이 아닌 것을 모두 싣고
진공으로 사라진다는 것
중심이 날 떠날 수도 있다는 것
살면서
가장 막막한 일이다
어지러운 병에 걸리고서야
중심이 뭔지 알았다
중심이 흔들리니
시도 혼도 다 흔들리고
그리움도 원망도 다 흔들리고
새벽에 일어나 냉장고까지 가는 것도 어렵다
그동안 내게도 중심이 있어서
시소처럼 살았지만
튕겨 나가지 않았었구나
중심을 무시했었다
귀하지 않았고 거추장스러웠다
중심이 없어야 한없이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제 알겠다
중심이 있어
날아오르고, 흐르고, 떠날 수 있었던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