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본성의 법칙 (블랙 에디션) - 전2권 인간 본성의 법칙
로버트 그린 지음, 이지연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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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각자는 신뢰할 수 있는 인간관계가 얼마나 될까. 최근 모 예능 프로그램에서 차승원 씨가 “친구 없으시죠?”란 물음에 “하나 있어. 유해진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화제가 되었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대본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친구가 많고 적음은 문제되지 않는다. ‘진정한 친구’가 있다면 분명 좋은 인생이다.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깊은 관계는 불가능하다. 인맥 쌓기의 많은 관계보다 적더라도 진정한 친구가 간절하다. 그렇지 않은가. 성공의 관점에서 보면 답답한 소리인가. 로버트 그린은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더 뛰어난 공감력을 가지고 태어났음에도 자기몰두와 자기도취에 빠져 세상을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말한다. 기술과 인터넷 발달로 더 가속화되었다. 외부로의 관심은 자꾸 차단되고 스마트폰 속에서 수박 겉핥기로 사람들과 교류하니 자기 안으로 끊임없이 되돌아간다. 사람은 인연의 관계가 아니라 불안과 외로움을 달래주는 도구에 가까워졌다. 타인과의 사회적 교류가 줄어들다 보니 뇌에 부정적 영향이 생기고 사회성이라는 근육은 위축되며 자기몰두는 더 강화되었다. 그린은 너무 부정적인 해석만 제시한 것 같지만 인터넷으로만 소통하는 관계가 쉽게 끊어지고 쉽게 반목하는 걸 생각하면 전면 반박하기는 어렵다. 진보냐 보수냐를 따지고 니 편 내 편 가르며 상대를 심판하는 상황을 세계 곳곳에서 보니 더욱 그렇다. 소통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었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려울 거 같다.

 

 

그린은 인간 본성을 논하는 이런 지식이 결코 유행 지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술적으로 발전했고 이전보다 지적 수준이 높아졌지만, 인간 본성의 잠재적 파괴력은 더 커졌다. 가짜뉴스나 소셜 네트워크상의 바이럴 효과(소문이 바이러스처럼 급속히 확산되는 현상), 각종 광고와 콘텐츠가 매일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감정에 기울고 즉각적 쾌락과 오락거리를 찾으며 저항이 가장 작은 길을 택하는 ‘저차원적 자아’와 제어하고 생각하는 ‘고차원적 자아’ 사이에서 오늘 하루 우리는 어느 쪽에 더 가까웠나 생각할 때 자신 있어 할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린은 대표적인 예로 투기 광풍을 꼽는다. 1987년 및 1929년 시장 붕괴, 1840년 영국의 철도투자 열풍, 1720년대 영국 사우스시컴퍼니 투기 사건, 2008년 금융위기 때 사람들은 투기 광풍에 빠져 있었음을 시인하기보다 외부 요인만 탓하며 광기의 근원을 도외시했다. 인류 최고 천재라고 손꼽히는 뉴턴도 세계 3대 버블 파동(네덜란드 튤립 투기 파동, 영국 사우스시컴퍼니 투기 사건, 프랑스 미시시피 투기 사건)에 빠졌었다는 건 인간 본성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준다. 

 

 

그린이 제안하는 인간 본성의 1번째 법칙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비이성적’이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정신적 편향, 심리적 방아쇠를 파악해 이성적 자아를 끌어내는 일이다. 인간 본성의 2번째 법칙은 자기도취의 네 가지 유형(통제광 자기도취자-스탈린, 과장된 자기도취자-1967년 수녀 잔 드 벨시엘, 자기 도취 커플-톨스토이와 소냐, 상대의 기분을 읽는 건강한 도취자-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헨리 세클턴)을 소개하며, 자기도취는 공감의 부족 때문이므로 공감력을 키워 사회성을 높일 것을 강조한다. 인간 본성의 3번째 법칙은 밀턴 에릭슨이 심리학자가 된 과정을 설명하며 전략적 관찰자로서 사람들의 비언어적 소통 형태를 파악할 것을 권한다. 

 

“인간이 나누는 모든 의사소통 중에 65퍼센트 이상이 비언어적 소통이지만 그중에 사람들이 인지하고 내면화하는 정보는 겨우 5퍼센트에 불과하다고 추정된다. 인간관계에서 우리가 기울이는 주의력은 대부분 사람들이 하는 ‘말’에 쏠려 있다. 실제로 말은 사람들의 진짜 생각이나 감정을 감추는 데 더 많이 사용되는데 말이다. 비언어적 신호는 상대가 말로써 강조하려는 내용과 메시지의 숨은 뜻, 그리고 의사소통의 뉘앙스를 알려준다. 그리고 상대가 적극적으로 숨기는 내용과 정말로 바라는 일을 알려준다. 비언어적 신호는 사람들의 기분과 정서를 아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이 정보를 놓친다는 것은 눈을 감고 활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상대는 자신이 정말로 바라는 것 혹은 필요로 하는 것이 뭔지 계속 신호를 보내는데 그 신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일부러 오해를 불러일으키거나 타인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수많은 기회를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

 

“적대감을 알아볼 수 있는 탁월한 방법이 하나 있다. 상대가 나를 대할 때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보디랭귀지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비교해보면 된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눈에 띄게 다정하거나 따뜻한 태도를 보이다가 당신을 대할 때만 공손한 가면을 쓸 수도 있다. 또 대화를 하다 보면 참을 수 없거나 짜증난다는 듯한 눈빛이 잠깐 스칠 텐데 오직 당신이 말하고 있을 때만 그럴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술에 취했거나 잠이 올 때, 자포자기할 때, 화가 났을 때, 혹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 자신의 진짜 감정, 특히 적대적인 감정을 더 많이 누출한다는 사실도 기억하라. 상대는 그때는 제정신이 아니었다며 나중에 사과를 해오겠지만 실제로는 그 순간이 그 어느 때보다 제정신이다.

이런 신호를 찾아볼 때 좋은 방법 중 하나는 테스트를 해보거나 덫을 놓는 것이다. 루이 14세는 이 방법의 달인이었다.”

ㅡ 「law 03. 역할놀이의 법칙 ? 가면 뒤에 숨은 실체를 꿰뚫는다」 

 

 

상대의 성격은 그의 과거에서 드러나는 패턴, 그가 내리는 의사결정, 문제 해결 방식, 권한을 이양하고 협업하는 모습 등 수많은 신호에서 드러나는데, 인간 본성의 4번째 법칙은 그런 행동 패턴을 통해 나와 상대의 본성을 발견하고 비극을 피하는 일이다. 미국의 비즈니스 사업가 하워드 휴즈, 닉슨 미 대통령의 성공과 몰락 사례는 많은 사람이 상대의 대외적 이미지나 명성에 쉽게 현혹되는 것을 보여준다. 긍정성으로 포장한 파괴적 유형의 사람들(지나친 완벽주의자, 그칠 줄 모르는 반항아, 모든 게 인신공격인 사람, 드라마 퀸, 떠벌이, 모든 걸 성(性)적으로 만드는 사람, 응석받이 왕자님/공주님, 아첨꾼, 구원자, 겉으로만 성인군자)을 피할 수 있어야 삶이 덜 고달프다.

욕망의 대상은 우리의 판타지로 투영된다. 인간 본성의 5번째 법칙은 사람들의 억압된 판타지를 자극해 내 주위를 약간의 미스터리로 만들어 내 약점을 극복하는 일이다. 자신의 이미지를 통념과 다른 것, 진보적인 것으로 연상시킨 샤넬, 존 F. 케네디는 이런 전략가였다.

 

“젊음이란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멀어지는 대상이기에 우리는 그것을 이상화시키고 더 없이 푸르게 생각한다.

이런 현상은 인간의 뇌가 가진 특징 세 가지로 설명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유도(誘導)’라는 것이다. 긍정적인 무엇은 그와 대조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머릿속에 만들어낸다. 이것을 가장 뚜렷이 알 수 있는 것은 시각을 통해서다. 빨강이나 검정 같은 색상을 보고 나면 주변에 그와 반대되는 녹색이나 흰색 같은 것이 더 또렷하게 느껴진다. 빨간색 물체를 보고 있으면 그 주위로 녹색 후광이 생기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은 ‘대조’라는 것을 이용해 작동한다. 우리가 어떤 것의 개념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은 그와 반대되는 게 뭔지 알기 때문이다. 뇌는 이렇게 대조되는 것들을 끊임없이 들추어내고 있다.

이 말은 곧 우리가 무언가를 보거나 상상하면 머릿속으로는 어쩔 수 없이 정반대되는 것을 보거나 상상하게 된다는 뜻이다. 만약 내가 사는 문화권에서 특정한 생각이나 욕망이 금지되어 있다면, 터부시된다는 사실 자체가 즉시 그 금지된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안 돼’라고 할 때마다 ‘돼’가 떠오른다는 이야기다. 이를테면 빅토리아 시대에 포르노를 금지하자 사상 처음으로 포르노 ‘산업’이라는 게 생겼다. 마음속에서 이렇게 반대되는 것들이 계속 교차하는 것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갖지 못한 바로 그것을 자꾸 생각하고 욕망할 수밖에 없다.

두 번째는 진화론적으로 보았을 때 무언가에 안주하는 것은 인간처럼 의식이 있는 동물에게는 위험한 특성이 된다는 점이다. 만약 우리 조상들이 현재 상태에 쉽게 만족하는 성향이었다면, 겉으로는 안전해 보여도 어디서 도사리고 있을지 모를 위험 요소들에 충분히 예민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남고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은 지속적으로 경각심을 갖고 위험을 의식한 덕분이지만, 그 때문에 어떤 환경에 가더라도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부정적 요소를 생각하고 상상해보게 됐다. 우리는 더 이상 목숨을 위협하는 포식자나 자연 재해가 득실대는 사바나나 숲속에 살고 있지 않지만, 우리의 뇌는 아직도 그런 환경에 맞게 만들어져 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그게 종종 의식적으로 표현되면 불평이나 불만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실제인 것과 상상의 소산은 뇌에서는 아주 유사한 방식으로 경험된다. 이는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이미 증명된 바 있다.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을 통해 뇌 속을 살펴보면 사람이 무언가를 상상할 때는 그것을 실제로 체험할 때와 놀랄 만큼 비슷한 전기적, 화학적 활동이 일어난다. 때로 현실은 아주 혹독하고 수많은 한계와 문제점을 안고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매일매일 우리는 조금씩 늙고 약해진다. 성공하려면 희생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나 상상 속에서 우리는 이런 한계를 뛰어넘어 온갖 가능성을 즐길 수가 있다. 상상에는 사실상 한계가 없다. 그리고 상상은 실제로 경험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만큼의 힘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늘 무언가 지금보다 나은 것을 상상하고, 그렇게 상상을 할 때면 현실에서 놓여난 해방감에 약간의 기쁨을 느끼는 존재가 됐다.”

ㅡ 「law 05. 선망의 법칙 -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욕망의 대상이 되라」  

 

인간 본성의 6번째 법칙은 사건을 뒤흔드는 더 큰 흐름을 주시하는 것이다. 이 장에서는 18세기 초 영국회사 사우스시컴퍼니 투기 사건이 자세히 소개되는데, “지금 보고 듣는 것, 이를테면 최신 뉴스, 트렌드, 주위 사람들의 의견과 행동, 아주 극적으로 보이는 온갖 것으로부터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은 당신의 본성 중 동물적인 부분이다. 빠르게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손쉬운 돈벌이를 약속하는 반짝거리는 미끼에 당신이 걸려드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과잉 반응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불충분한 정보로 즉흥적으로 대처하거나 생각 없는 반응 수준의 행동을 보이고 있다. 근시안적 사고를 보여주는 신호를 인식해야 극복도 가능하다.

 

인간 본성의 7번째 법칙은 상대를 긍정해서 저항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을 연구한다. 미국의 정치인 린든 베인즈 존슨의 스토리가 보여주듯이 “영향력과 권력을 얻는 최선의 방법은 정반대로 가는 것이다. 관심의 초점을 상대에게 넘겨줘라. 상대가 이야기하게 만들어라. 이 쇼에서 상대방이 스타가 되도록 하라. 상대의 의견과 가치관은 내가 따라 할 가치가 있으며, 그가 지지하는 대의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다고 말하라. 요즘 세상에 이런 관심은 워낙에 드물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런 관심에 굶주려 있다. 이렇게 상대를 긍정해 주면 그는 방어막을 내리고 뭐가 되었든 당신이 암시하고 싶은 그 아이디어에 마음을 열 것이다.” 이 대목에서 나는 박근혜 씨를 둘러쌌던 세력들이 취한 게 이 방법이 아니었을까 싶었다.

 

인간 본성의 8번째 법칙은 자신이 어떤 태도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태도가 내 지각을 어떻게 왜곡하는지 파악하는 일이다. 안톤 체호프는 불우했던 가정사 속에서도 세상을 다르게 보고 태도를 바꿈으로써 발전했지만 우울과 자기혐오라는 감정까지 극복하지는 못했다. 이 자유는 타인과 나에게 너그러운 마음을 갖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특정한 방식으로 행동 또는 반응하려는 정신의 준비” 과정을 우리가 의식하는 경우는 결코 없다. “우리는 그저 뇌의 이런 발화와 예민함이 일으킨 ‘효과’를 경험할 뿐이다. 이 효과들이 합쳐져서 우울함이나 적대감, 불안함, 열정, 모험심 등으로 부르는 전체적인 기분이나 정서적 배경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아주 다양한 기분을 경험한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는 세상을 보고 해석하는 자신만의 방식이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적대감이나 원망 같은 하나의 감정 혹은 여러 감정의 조합의 지배를 받는다. 이게 바로 우리의 태도다.” “태도는 우리의 지각에 색칠을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생에 일어나는 일들을 직접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태도는 우리의 건강,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우리의 성공까지 결정한다. 태도는 자기실현적 특성이 있다.” 일상생활에서 내 태도를 즉각 관찰하기 쉽지 않은데, “당사자가 자리를 떴을 때 당신이 그를 어떻게 판단하는지 보면 된다. 당신은 그의 부정적 성향과 형편없는 의견에 곧장 주목하는가 아니면 상대의 결점도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용서하는가? 태도의 확실한 신호를 볼 수 있는 것은 역경이나 저항을 만났을 때다. 당신 쪽에서 실수를 저질렀을 경우 당신은 금방 잊거나 잘 둘러대는가? 뭐든 나쁜 일이 생기면 당신은 본능적으로 남 탓을 하는가? 모든 종류의 변화를 두려워하는가? 예기치 못한 일이나 이례적인 상황을 피하기 위해 늘 하던 대로 하는 경향이 있는가? 당신의 아이디어나 가정에 대해 누가 이의를 제기하면 발끈하는가? 남들이 당신에게 반응하는 모습, 특히 비언어적으로 반응하는 모습에서도 태도의 신호를 포착할 수 있다. 당신과 있으면 사람들이 초조해하거나 방어적이 되는가? 당신은 어머니나 아버지 역할을 해줄 사람을 잘 끌어들이는 경향이 있는가? 당신이 어떤 태도를 갖고 있고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은 각각 무엇인지 충분히 알고 나면 태도를 바꿀 수” 있다. 적대, 초조, 회피, 우울, 원망이라는 대표적 부정적 태도 유형은 누구라도 꺼리기 마련이다. 

 

인간 본성의 9번째 법칙은 내 안의 어둠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이다. 똑똑하고 정치적 재능이 있었지만 본인 성격의 어두운 면을 가늠하지 못할 때 닉슨 대통령 같은 비극을 직면할 수밖에 없다. 내면의 그림자 특징이 눈에 띄는 유형이 있는데, ‘남다른 자신감, 유난히 착하고 상냥함(수동적인 공격성을 가진 매력남과 매력녀), 대단한 도덕적 청렴성(광신도), 성인군자 같은 아우라, 터프 가이, 어마어마한 지성(완고한 이성주의자), 트렌드세터이자 허영꾼, 극단적 사업가’ 같은 강한 특징들은 ‘정반대의 특징 위에 놓여 있고, 사람들의 시선을 분산시켜 그 밑에 놓인 것을 감추는 역할을 한다.’

 

인간 본성의 10번째 법칙은 상대의 시기심을 건드리지 않는 현명함이다. 이 장에서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셜리가 친구인 줄 알았던 제인의 시기심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았던 사례가 소개된다. 시기심이 가장 흔하게 발동되고 가장 큰 고통을 주는 것은 친구들 사이에서인데, 역설적이게도 시기심을 느끼는 사람은 처음부터 친구가 되려는 경우가 많다. 시기심을 드러내 보이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독이 되므로 시기하는 자는 시기 대상 가까이에서 친절한 가면을 쓰지만 머릿속에서는 상대를 부정적 대상으로 설정한다. 이런 사고 과정을 거치면서 상대에 대한 우호감이 적대감을 압도하기 시작하고 상대에 대한 나쁜 행동을 합리화한다. 우정이 깨지는 배신의 원인은 대부분 시기심이다. 누구나 하루에도 몇 번씩 시기심을 겪는다. 재산, 지능, 매력, 재능 등 나보다 우월한 사람은 항상 있게 마련인데, 약간의 조롱이나 퉁명스러운 발언 같은 ‘수동적 시기심’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시기심을 드러내는 미세 표정(특히 첫인상에서 가장 노골적), 독설 같은 칭찬, 험담(시기심을 숨기기 위해 흔히 동원되는 위장술), 칭찬하면서도 약점을 건드리는 밀고 당기기 등 ‘능동적 시기심’의 신호는 파악해두는 게 좋다. 남보다 시기심을 더 많이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하는데, 모두까기 인형, 자기도취형 게으름뱅이, 지위 집착, 권력자의 껌딱지, 높은 지위에서 초조해하는 상사 등이 이런 유형이다. 지위가 바뀌었을 때 시기심이 가장 발동하게 되는데, 자조적인 농담을 늘어놓고 남들이 성공을 잘 알지 못하게 만드는 게 최선이다. 연예인과 유명인들은 피할 방도가 없다는 게 난관이다. 세월호 가족의 단식 투쟁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는 이들까지 나올 정도로 ‘샤덴프로이데(남의 불행을 보고 느끼는 기쁨)’가 넘쳐나고 있는데, ‘미트프로이데(함께 기뻐하기, 니체)로 사회 구성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 본성의 11번째 법칙은 자신이나 타인에게서 과대망상의 신호가 없는지 살피고 자신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평가하는 일이다. ‘훌륭하다는 감정은 오직 일, 업적, 사회에 대한 기여와 관련해서만 느끼자.’ 파라마운트픽처스, 디즈니를 이끌었던 마이클 아이즈너 회장은 성공의 주된 원동력이 본인이라고 생각한 망상으로 자신의 발목을 잡았다. 과대망상은 자기중심적 리더들만 있는 게 아니다. ‘남보다 뛰어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내가 중요한 사람인 것처럼 느끼고 싶은 우리의 깊은 욕구’에서 연유하는 인간 본성의 내재적 특성이다.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하인즈 코헛에 따르면 과대망상은 아주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 태어난 지 몇 달 안 되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어머니와 완전한 유대를 형성하고 있어서 분리된 나의 정체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어머니는 나의 모든 요구를 들어주고 우리는 나를 먹여주는 어머니의 가슴이 실제 나의 일부라고 믿는다. 우리는 전능했다. 그저 배고픔 같은 어떤 욕구를 느끼기만 하면 됐다. 그러면 어머니가 와서 그 욕구를 충족시켜줬다, 마치 나에게 어머니를 조종할 수 있는 어떤 마법 같은 힘이 있는 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서서히 인생의 두 번째 단계를 지나게 되면서 어쩔 수 없이 현실과 마주한다. 어머니는 나와 분리된 존재이고 다른 사람에게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전능한 게 아니라 나약하고 작고 의존적인 존재였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깨달음이었고 이후 많은 행동의 근원이 됐다. 우리는 내 주장을 펴고, 내가 그렇게 무력하지 않다는 걸 보여주고, 내가 갖지 못한 힘을 공상하려는 깊은 욕구가 생겼다. 이를테면 아이들은 종종 벽을 통과하거나 하늘을 날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상상한다. 아이들이 슈퍼 히어로 이야기에 끌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 이상 몸집이 작지는 않지만 내가 하찮은 존재라는 인식이 더 강해진다. 내가 친척들, 학교, 이 도시뿐만 아니라 70억이라는 사람으로 가득한 지구에 속한 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우리의 생(生)은 비교적 짧다. 내가 가진 기술인나 지적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너무나 많은 것들, 특히 내 커리어든가 글로벌 트렌드 같은 것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나는 죽을 것이고 금세 잊힐 테고 영원 속에 묻힐 거하는 사실은 꽤나 견디기 힘든 진실이다.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내가 중요한 존재라고 느끼고 싶다. 날 때부터 조그만 존재라는 사실에 항의하고, 자아인식을 확장하고 싶다. 서너 살 때 무의식적으로 경험한 것들이 평생 나를 괴롭힌다. 우리는 어느 순간 나의 작음을 인식했다가 다음 순간 또 그것을 부정하려고 한다. 그래서 나의 우월성을 상상할 방법을 찾게 된다.

자신이 비교적 작은 존재임을 깨달아야 하는 이 두 번째 단계를 유아기에 겪지 않는 아이들이 있다. 그들은 나중에 더 깊은 형태의 과대망상에 취약해진다. 응석받이로 자라 버릇없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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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인간은 이런 과대망상적 욕구를 종교에 쏟을 수 있었다. 고대에는 부모에게 오랜 세월을 의존한 후에만 내가 작다는 인식에 이르는 게 아니었다. 서슬 퍼런 자연의 힘과 비교했을 때 내가 얼마나 나약한지를 느낄 때도 그런 인식이 생겼다. 신이나 정령이라는 것은 인간이 가진 힘이 얼마나 작은지를 깨닫게 하는 자연의 광포한 힘을 대표했다. 그 힘을 숭배함으로써 우리는 그들의 보호를 받을 수 있었다, 나 자신보다 훨씬 큰 무언가와 연결됨으로써 내가 확장되는 것을 느꼈다. 어쨌거나 내 부족이나 도시의 운명은 신이나 하느님이 돌봐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나’라는 개인의 영혼도 돌봐주었고, 이것은 우리가 중요한 존재라는 신호였다. 우리는 단순히 죽어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수백 년 후 비슷한 식으로 우리는 이 에너지를 우리가 숭배하는 리더들에게 쏟아부었다. 대단한 대의를 대표하거나 미래의 유토피아를 홍보하는 사람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프랑스 혁명, 마오쩌둥과 공산주의 같은 것들에 쏟아부었다.

오늘날 서구 사회에서는 종교나 훌륭한 대의가 그런 구속력을 상실했다. 우리는 더 이상 그런 것을 믿기 힘들어졌고, 더 큰 힘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과대망상적 에너지를 충족시키기도 어려워졌다. 그러나 더 크고 중요한 존재처럼 느끼고 싶은 욕구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이 욕구는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더 커졌다. 다른 분출구가 없다 보니 사람들은 이 에너지를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한다. 그들은 스스로 훌륭하고 우월한 사람처럼 느끼고 자아인식을 확장할 방법을 찾아낸다. 이런 사실을 자각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이들이 이상화하고 숭배하기로 선택한 것은 자기 자신이다. 그 때문에 우리 중에는 과대망상적 경향을 가진 개인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그 외에도 과대망상이 증가하는 데 기여한 요인들이 있다. 첫째, 어릴 때 응석받이로 관심을 독차지했던 사람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아졌다. …… 둘째, 상대가 아무리 높은 수준의 훈련과 경험을 가졌고 스스로 그것들을 갖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 어떤 종류의 권위나 전문성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 늘고 있다. ‘ 왜 저들의 의견이 내 생각보다 더 타당해야 해?’ …… 셋째, 기술 덕분에 인생의 모든 게 온라인에서 긁어모으는 정보처럼 빠르고 간단할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됐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과대망상 바이러스를 널리 퍼뜨린 것은 소셜 미디어다. 소셜 미디어를 통해 우리는 나의 존재를 확장할 수 있는 거의 무제한적인 힘을 갖게 됐다. 내가 수천 명, 수백만 명의 관심과 예찬을 받고 있다는 착각이 생겼다. 과거의 왕이나 여왕이 누리던, 혹은 심지어 신들이 누리던 그런 명성을 가지고 언제 어디에나 존재할 수 있다.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그 누구도 자기 자신에 대해 균형 잡힌 감각이나 현실적인 태도를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ㅡ 「law 11. 과대망상의 법칙 ? 나의 한계를 현실적으로 평가한다」  

 

과대망상을 높은 수준의 만족감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이 욕구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실행하지 못하고 꿈만 키우기보다 간단히 달성할 수 있는 목표나 단일 프로젝트로 에너지를 집중한다. 프로젝트를 실행하면서 현실 속 피드백과 비판을 통해 더 높은 단계를 모색한다. 우리의 능력치보다 살짝 높은 도전을 찾아내는 성취할 때 훌륭해지고 싶은 욕구는 만족된다. 그다음은 더 좋아질 테고.

 

인간 본성의 12번째 법칙은 나에게 맞는 성 역할 찾기이다. 우리는 누구나 남성적 속성과 여성적 속성을 갖고 있다. 사회에서 일관된 정체성을 보여줘야 하기 때문에 그런 속성들을 억누르고 우리에게 기대되는 역할에 맞추는 경향이 있다. 거기에는 대가가 따르는데, 우리 성격을 구성하는 귀중한 축을 상실하고 사고와 행동 방식이 경직된다. 내 안의 다양한 측면을 끄집어낼 때 창의력이 방출되고 사고가 유연해진다. 젠더 투영의 여러 유형은 책 속에서 확인해 보시라.

 

정교한 본능에 의존해 행동하는 다른 생물과 달리 타고난 본성상 인간은 방향성을 갈망한다. 인간 본성의 13번째 법칙은 지루함, 불안, 초조, 스트레스, 우울 같은 기분, 남들의 의견에 이리저리 휘둘리며 표류하지 말고, 인생의 소명을 발견하고 그것을 지침 삼아 의사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마틴 루터 킹이나 전태일 열사 같은 사람들이 그런 예이다. “내부의 가이드 시스템을 따라갈 경우 목표를 상실한 우리를 괴롭히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중화될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긍정적 감정으로 바뀐다. …… 목적의식이 있으면 우리는 덜 ‘불안’하다. 내 잠재력의 일부 또는 전부를 실현하면서 전체적으로 내가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크든 작든 내가 이뤄놓은 다양한 것들을 뒤돌아볼 수 있다. …… 내면의 회복력이 생겨서 실패하더라도 다시 일어나고 실패로부터 교훈을 얻는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이런 자각이 인생의 닻이 되어준다. 이렇게 가이드 시스템이 생기고 나면 ‘초조함’과 ‘스트레스’를 생산적인 감정으로 바꿀 수 있다. …… 목적의식이 있으면 ‘우울함’에 덜 빠진다.” ‘쾌락, 돈과 지위, 관심, 권력, 그저 가담하는 대의, 사이비 종교 같은 과도한 신념, 세상에 대한 냉소주의는 ’가짜 목적‘이다. “더 우월하고 덜 우월한 소명이란 없다. 중요한 것은 개인적인 욕구와 성향에 맞는 소명을 찾아서 힘을 내어 개선하고 경험으로부터 꾸준히 배우는 것이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위대한 것 앞에서 늘 고개를 숙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이다. 만약 사람들에게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위대한 것을 모두 빼앗아버린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살지 못하고 절망 속에 죽을 것이다. 인간에게 헤아릴 수 없는 것, 무한한 것은 그가 살고 있는 작은 행성만큼이나 꼭 필요하다.”

ㅡ 표도로 도스토옙스키

 

 

우리는 자신의 성격 속에 녹아 있는 사회적 인격을 잘 모른다. 소속감 속에 빠져들고 싶어 하고 그 속에서 연기하며 쉽게 감정에 전염되고 과잉 확신에 빠지는 등 집단 속에서 활동할 때 우리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 우리가 속한 첫 번째 집단 ‘인류’는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인간 본성의 14번째 법칙은 집단의 영향력에 저항하는 것이다. 집단 내에서 우리의 자동적인 반응이나 남들을 흉내 내려는 성향은 우리 본성의 가장 원시적인 뿌리이다. 우리는 우리가 문명화되고 교양 있으며 자유의지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집단행동은 이런 신화를 산산조각 낸다. 마오쩌둥이 선동한 ‘문화대혁명’은 인간 본성을 바꾸려고 한 시도였다. 이 실험은 인간 본성을 뿌리 뽑을 수 없고 인간 본성을 바꾸려고 하면 다른 모양, 다른 형태로 다시 출현한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마오쩌둥이 바랐던 새로운 혁명 사회는 그를 숭배하는 가장 억압적이고 미신적인 중국의 봉건 체제를 더 닮아 버렸다. 외부인에 대한 불신이나 그들을 악마로 만들고 싶어 하는 욕구와 차별 행동 등은 선조들 시대에는 전염병의 위험이나 공격적인 부족 경쟁에서 비롯됐지만 지금 시대에도 여전히 집단행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리더를 둘러싼 모사꾼, 말썽꾼, 게이트 키퍼, 배후의 조종자, 궁정 광대, 공감의 여왕, 총신과 동네북 유형들이 가득한 집단이 아니라 협업하며 의사 결정을 내리는 ‘집단지성’이다. 

 

인간 본성의 15번째 법칙은 따르고 싶은 리더십 기르기이다. 부모를 사랑하면서도 적개심과 반항심을 가지듯이 인간은 늘 양면적인 감정을 느낀다. 권력자에 대해서도 두려워하면서도 얕보는 이중적 감정이 작동한다. 권위나 리더를 업신여기는 풍토는 우리 문화 전반에 퍼져 있는데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 주었다.

 

“이렇게 양면성을 느끼는 데는 강력한 하나의 감정만 느끼는 게 겁이 나는 탓도 있다. 강력한 하나의 감정만 느끼는 것은 일시적으로 통제력을 상실한다는 뜻이고, 그렇게 되면 내 의지가 부정될 것만 같아서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반대되는 혹은 상충하는 감정으로 균형을 잡는다. 또 일부는 우리의 기분이 계속 바뀌고 중첩되는 탓도 있다. 이유가 뭐가 되었든 우리는 내 감정의 양면성을 인식하지 못한다. 복잡한 감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은 당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단순한 설명에 의존하는 편을 선호한다. 주위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상대의 감정을 최대한 소화하기 쉽게, 단순하게 해석하려고 한다. 실제로 밑바닥에서 흐르고 있는 감정의 양면성이 작용하는 순간을 포착해내려면 상당한 노력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 아주 정직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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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를 막론하고 가장 최근의 성공이나 실패에 따라 금세 리더에 대한 평가가 뒤바뀐다는 것, 순식간에 지지와 존경을 잃을 수 있다는 것은 뉴스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런 변덕이 현대에 와서 생긴 현상이라고 믿고 싶을지 모른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극히 민주적인 시대의 산물이라고 말이다. 어쨌거나 우리 조상들은 현대인들보다는 훨씬 더 순종적이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참 옛날로 돌아가 토착 문화나 초기 문명을 살펴보더라도 한때는 존경받는 족장이고 왕이었던 자들이 죽임을 당하는 일은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노쇠한 신호가 보여서, 전투에서 져서, 갑자기 가뭄이 들어서(신이 더 이상 그에게 은총을 내리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혹은 집단을 희생시키고 그의 핏줄만 편애했다는 것이 죽임을 당하는 이유였다. 이런 처형식은 그동안 억눌러왔던 리더에 대한 적개심을 마음껏 방출하는 축제의 순간이었다. 이에 대한 수많은 예를 제임스 프레이저(James Frazer)가 쓴 《황금가지》 에서 찾을 수 있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은 한 개인이 권좌에 오래 머무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두려워했을 것이다. 참신하고 새로운 리더가 더 조종하기 쉽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든 그들의 복종 아래에는 어마어마한 경계심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더 이상 우리가 족장의 목을 베지는 않을지 몰라도, 우리는 선거를 통해 혹은 미디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그들을 처형한다. 권력자의 의례적 추락을 목격하면서 기쁨을 느낀다. 비가 오지 않는다고 권력자를 탓하지는 않을지 몰라도, 경제가 조금이라도 나빠지면 그들을 탓할 것이다. 경제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들의 통제를 벗어난 것이라고 해도 말이다. 비가 오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은 신의 은총이나 행운을 잃은 것처럼 보인다. 감정의 이중성이나 불신이라는 측면만 살펴본다면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별로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유명한 리더 중에는 이런 변덕에 맞서 보호막을 쳐둘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일종의 공고한 존경과 지지를 얻어내서 오랜 기간 동안 위대한 일을 성취했다. 성경에 나오는 모세나 고대 인도의 아소카 황제,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1장 참조),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엘리자베스 1세가 바로 그런 리더들이다. 좀 더 현대로 와본다면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마틴 루터 킹 주니어, 워런 버핏, 앙겔라 메르켈, 스티브 잡스 같은 이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의 권력은 본래의 의미에 맞게 ‘권위’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권위(authority)’라는 단어는 ‘늘리다, 증강시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auctoritas’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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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세 번째는 이 시대의 비생산적 편견에 넘어가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대는 권위라는 개념을 오해하고 경멸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사람들은 권위와 리더 일반을 혼동한다. 세상의 너무나 많은 리더들이 본인의 권력을 지키고 자신의 잇속만 채우는 데 급급해 보이기 때문에 권위라는 개념 자체에 의심을 품는 것도 당연하다. 또한 우리는 아주 민주적인 시대를 살고 있다. ‘대체 왜 우리가 권위 있는 자를 따르며 열등한 역할을 자처해야 하는 거야?’ 우리는 그렇게 자문할 수도 있다. ‘권력자들은 맡은 일만 하면 돼. 권위란 왕이나 여왕 시대의 유물이야. 우리는 거기서 한참이나 더 진보했어.’

이렇게 권위나 리더를 업신여기는 풍토는 우리 문화 전반에 퍼져 있다. 우리는 예술에서 더 이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두가 비평가고 개인이 기준이다. 그 누구의 취향이나 판단도 우월한 것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과거에는 육아가 권위의 표본으로 여겨졌으나 더 이상 부모는 자녀에게 특정한 가치관이나 문화를 심어주는 권위자로 보여지길 바라지 않는다. 부모는 자신이 약간의 지식과 경험을 더 가진 자녀와 동등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역할은 아이의 감정을 인정해주고 아이들을 계속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나이만 더 많이 먹은 친구인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평등을 추구하는 관계는 선생님과 학생 사이에서도 똑같이 적용되고, 학습은 재미난 것이 되어야 한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리더들은 마치 자신이 관리자 같다고 생각하게 됐다. 뒤에 서서 집단이 옳은 결정을 내리게 도와주고, 모든 것을 합의에 따라 실행하는 사람 말이다. 혹은 요즘 들어 이용 가능하게 된 대량의 정보를 흡수해 숫자를 해석하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방향을 결정하는 주체이자 진정한 권위자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이라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나 아이디어는 모두 의도치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예술에 권위가 없다면 반항할 대상도, 전복시킬 운동도, 동화되거나 거절할 깊은 생각도 없다. 점점 더 빠르게 점멸하고 사라지는 무정형의 트렌드가 있을 뿐이다. 권위자로서의 부모가 없다면 부모의 생각을 거부하거나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사춘기의 반항이라는 중요한 단계를 경험할 수 없다. 방향을 상실한 채 어른이 되고 그 정체성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외부를 탐색할 것이다. 나보다 우월하고 존경할 가치가 있는 선생님이나 대가가 없다면 그들의 경험이나 지혜로부터 무언가를 배우고 나중에는 새로운 아이디어나 더 나은 생각으로 그들을 넘어서려는 시도조차 할 수가 없다.

정신적 에너지를 쏟아 트렌드를 예견하고 우리에게 장기적 해결책을 안내해줄 리더가 없다면 우리는 길을 잃는다. 그리고 그 상태가 일상이 되어버리면 늘 안내자로서 어떤 권위를 필요로 해온 우리 인간은 가짜 권위에 쉽게 빠져버린다. 혼돈과 불확실성의 시대에 급증하는 그런 가짜 권위 말이다.”

ㅡ 「law 15. 변덕의 법칙 ? 권위란 따르고 싶은 모습을 연출하는 기술이다」

 

 

 

 

‘리더인 척, 방향성이 있는 척, 착각을 만들어내지만 실제로는 어디로 가야 할지 비전은 없는 독재자’, ‘그들이 가진 아니디어나 행동은 모두 본인의 자존심을 만족시키고 본인이 통제한다는 느낌을 높여주는 것들뿐’, ‘대중이 듣고 싶은 것을 영리하게 흉내 냄으로써 본인이 집단을 잘 보살피고 집단이 원하는 것을 제공한다는 착각을 만들어내는 리더’라는 말에 트럼프가 생각났다. 

 

인간 본성의 16번째 법칙은 남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어 하는 이들을 간파하는 일이다. 대기업가로 성장한 존 D. 록펠러는 상대에게서 그것을 잘 간파했고 그 힘을 행사하는 데에서는 더욱 노련했다. 인간의 공격성은 단순히 남을 해치거나 남의 것을 빼앗고 싶은 충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근원적 불안으로부터 유래했다.

 

“만성적 공격자의 경우에는 우리가 반드시 이해해야 할 중요한 자질들이 있다. 첫째, 공격자는 무력감이나 초조함을 잘 견디지 못한다. 우리에게 좌절감이나 불안을 유발할 수 있는 것이 종종 감정의 방아쇠가 되어 그들에게는 훨씬 더 강력한 반응이나 분노를 유발할 수 있다. 만성적 공격성이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훨씬 흔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남자들이 여자보다 의존성이나 무력감이라는 감정을 잘 감당해내지 못한다는 사실을 남자 유아를 통해 목격했다. 남자들은 일반적으로 직장 혹은 다른 곳에서 본인의 지위를 더 불안해한다. 남자들은 또한 끊임없이 본인의 주장을 내세우고 타인에게 끼치는 자신의 영향력을 가늠하려고 한다. 이들의 자존감은 권력이나 통제, 자기평가에 대한 존중의 감정과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종종 남자에게 공격적 반응을 자극하는 것이 더 쉽다. 어찌 되었든 공격자는 우리보다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늘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또한 상대가 그런 유형임을 알게 되면 그들의 자존감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들을 비판해서 무심코 그들의 분노 반응을 자극하지 않도록 특히 조심해야 한다.

또 하나 공격적인 행동의 흔한 측면은 쉽게 중독될 수 있다는 점이다. 노골적이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본인의 욕망을 드러내고 본인의 조종을 통해 사람들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공격자는 아드레날린이 한껏 분비되는데 이게 중독이 될 수 있다. 이들은 자극과 흥분을 느낀다. 그에 비해 사회적으로 더 쉽게 용인되는 방식으로 지루함을 달래는 것은 뜨뜻미지근하게 보일지 모른다. 쉽게 돈을 버는 데서 오는 스릴은 분명 미심쩍은 투자를 하는 월스트리트 브로커나 무언가를 훔치는 범죄자처럼 대단히 중독적이다. 언뜻 보면 이는 자기파괴적으로 보일 수 있다. 각각의 공격적 폭발로 인해 더 많은 적과 의도치 않은 결과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격자는 감히 도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을 만큼 점점 더 위협적인 행동을 하는 데 능한 경우가 많다.”

ㅡ 「law 16. 공격성의 법칙 ? 상냥한 얼굴 뒤의 적개심을 감지한다」 

 

 

수동적 공격자들은 본인이 교묘하게 어떤 식으로든 당신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욕구가 있다. 이런 공격자들에 대하는 전략은 교묘히 그들의 행동을 반사해서 보여주거나 그들이 동요할 상황을 만들어 고민에 빠지게 만들어야 한다. 동정심을 유발하는 공격자, 의존적인 공격자와는 거리를 유지하는 게 최선이고, 독한 말을 뱉어놓고 “농담도 못하냐?”라는 말을 하며 의심을 심는 공격자에게는 그들의 발언이 내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한다. 자신이 잘못해놓고 내게 책임 전가하는 공격자, 독재적 공격자와는 관계를 끊어야 한다.

 

인간 본성의 17번째 법칙은 시대의 흐름을 읽고 기회를 포착하는 것이다. 루이 16세와 조르주 자크 당통은 같은 시기에 최고의 지위에서 교수형을 당하는 운명을 맞았다. 루이 16세가 시대 변화를 읽지 못하고 왕실의 권위만 내세웠다가 비극을 맞았다면, 당통은 본인이 시작한 공포정치가 실수였고 멈출 때라는 것을 알았지만 타이밍을 맞추지 못해 라이벌들에게 제거된다. “지식인들은 종종 제일 마지막에 가서야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아보곤 한다. 이론과 관습적 틀에 너무나 깊이 묶여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당신은 전체적 분위기에서 변화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사람들이 과거와 어떻게 멀어지고 있는지 감지해야 한다. 시대정신을 느끼고 나면 배후에 있는 것이 뭔지 분석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만족하지 못하는가 사람들이 정말로 갈망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들은 왜 이 새로운 형식을 향해 몰려드는가?” 

 

인간 본성의 18번째 법칙은 죽음을 깊이 인식함으로써 삶의 모든 측면을 더 강렬히 경험하는 일이다. 메리 플래너리 오코너는 작가로 떠오를 즈음 관절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전신 홍반성 루프스 진단을 받았다. 사랑하던 아버지도 같은 병으로 마흔다섯 나이로 요절했던 터라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죽음에 대한 고민보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 여정에 대해 더 깊이 생각했고 자신의 에너지를 작품에 집중하려 했다. “인생에서 많은 것을 바랄 수 없으니 그녀가 얻는 모든 것이 무언가 의미를 가질 것이었다. 불평하거나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가 없었다.” 죽어가며 심각한 육체적 고통 속에 있는 그녀는 친구들과 방문객, 서신을 주고받는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람들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죽음으로 대표되는 궁극의 현실을 철저히 이해한 그녀는 사람들과 교감하고 공감하는 능력이 더 깊어졌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자각을 요리조리 피하며 내 앞에 시간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을 회피하는 태도는 우리가 다른 불쾌한 현실이나 역경을 대처할 때도 하나의 패턴을 만들어놓았다. 우리는 쉽게 히스테리를 부리고 균형감각을 잃고 우리의 운명에 대해 남 탓을 한다. 분노하며 나 자신을 안쓰럽게 여기거나 각종 오락으로 눈을 돌려 그 통증을 빨리 무디게 만들 방법을 찾는다. 이런 회피는 곧 습관으로 만들어져 전반적 불안과 공허함을 가져온다. 이것이 평생의 패턴이 되기 전에 우리는 실질적이고 지속될 수 있는 방법으로 이 몽롱한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 우리도 움찔하지 않고 내 죽음을 마주 볼 수 있어야 한다. 금방 사라질 죽음에 대한 추상적 명상 같은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죽음이 대표하는 불확실성에 제대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른 역경이나 이별처럼 죽음 역시 바로 다음 말의 일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는 더 이상 죽음을 자각하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내가 우월하고 특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죽음이라는 운명을 다 함께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계기로 더 깊은 공감을 느끼고 유대감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죽음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다.”

ㅡ 「law 18. 죽음 부정의 법칙 ?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생각한다」

 

 

1665년 런던에 페스트가 돌아 거의 10만 명이 사망하는 일이 있었는데, 당시 다섯 살이었던 대니얼 디포는 60여 년이 지난 후 많은 조사와 삼촌의 일기, 자신의 기억을 토대로 『역병의 해 일지 Journal of Plague Year』을 썼다. 전 세계 사망자 38만 명이 넘어가고 있는 코로나19 영향인지 2020년 4월 『페스트, 1665년 런던을 휩쓸다』 (부글북스)란 제목으로 국내 번역되었다. 전염병은 많은 혼란과 적개심이 나타나는 때이기도 하지만 동료 시민과 더 높은 수준의 공감을 나누며 우리 사이의 반목을 제거하고 다른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도 만들어줬다. 

         

“인간이 위대해지기 위한 나의 처방전은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에 대한 사랑)다. 있는 그대로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것이다. 미래에도, 과거에도, 영원히. 필연적인 일을 단지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다.”

ㅡ 니체 

 

코로나19라는 죽음의 문지방을 넘으며 우리는 어떻게 바뀔까. 불안과 망상과 중독은 좀 줄어들까. 사람들은 서로를 좀 더 사랑하게 될까. 인생이 나한테 가하는 고통과 남들이 나를 위해 해주지 않는 일들을 불평하고, 타인의 고통을 이용하면서 어려운 상황으로부터 더 멀리 도망가는 반복을 재차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서.

 

 

 

에필로그)

로버트 그린의 3부작 『권력의 법칙』, 『유혹의 기술』, 『전쟁의 기술』을 다 읽고, 『인간 본성의 법칙』은 두 번 읽었다. 매번 엄청난 분량에 힘들었는데, 저자의 저술 특징인 역사적 인물의 사례를 통한 스토리텔링으로 가독은 수월했다. 다른 책에서도 공통으로 느꼈던 점인데, 이 책에서도 “불가능한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기대를 사람들 눈앞에서 흔들어라” 같이 자기 계발 특유의 선동적인 표현이 좀 거슬렸다.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위험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러나 세상이 더 나아지고 사람들이 서로 공감하고 더불어 살아가는 걸 바라는 저자의 맘이 이번 책에서 잘 느껴져서 큰 우려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유혹의 기술』을 요점 정리해 나온 『인간관계의 법칙』(2020.2, 웅진지식하우스)처럼 내용을 좀 더 압축해서 전달해 주셨으면 좋겠다. 그린 선생님이 길게 쓰려는 법칙을 고수하시는 게 아니라면. 인물 사례를 소설처럼 상술하시는데 그 부분이라도 줄여 주시면 매우 감사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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