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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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면서 죽는 날까지 모든 순간은 다르다. 우리는 특별한 행복이 오거나 불행이 빗겨갔다고 생각하면 지금을 감사히 생각하면서도 대부분 일상에 매여 있다고 감옥 같다고 여기며 매일을 고마워하지도 않는다. 새로운 재미, 몰두할 대상이나 취미를 찾으며 삶의 중압감과 권태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길 원한다. 삶이 이미 여행이지만 우리는 다른 여행을 꿈꾼다. 삶이 이미 고역이라고 생각하면서 가장 고약한 업무인 글쓰기를 스스로에게 부과하듯이.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내 순례의 목적은 늘 다른 순례자다”라는 문장은 여행의 순간을 곰곰이 생각하게 했다. 사물과 장소가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도 있지만 100편이 넘는 이 에피소드에서 사람이 빠져 있다면 우리가 이 여행을 이토록 흥미로워 할 수 있을까. 아무도 아무것도 만나지 않는 여행을 우리는 여행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는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신드롬’을 앓는 존재이자 ‘호기심의 방’이라 이야기와 구경과 수집에 열광한다. 전쟁, 전염병, 재난, 시체마저도 적당한 거리만 유지할 수 있다면 은밀한 혹은 노골적인 관객이 된다. 여행 중에는 타지의 쓰레기마저도 흥미롭지 않던가!

 

 

관광객이 되긴 쉽지만 유랑자나 순례자가 되는 건 어렵다. 여기 ‘재발성 해독 증후군’(어떤 이미지를 향해 끊임없이 돌아가려는 의식의 작용, 나아가 그러한 이미지에 대한 강박적인 추구)에 빠진 화자가 몸소 기록한 여행 지도가 있다. 희귀하고 괴상하고 기이한 것에 끌리고 전통적인 수집가들의 기호나 취향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것에 관심을 가지는 외로운 순례자가 다른 순례자들에게 건네는 보고서이다. 이 이야기 속에서는 누구나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어떤 여행이든 가능하다. 우리는 섬처럼 만나고 섬을 떠나듯 멀어진다.

「여행 심리학에 따르면, 섬은 사회화 이전의 가장 이르고 가장 원시적인 상태를 말한다. 에고가 어느 정도의 자의식은 획득할 정도로 개별화되었지만, 아직 주변과 만족스러울 만한 관계를 구축하지는 못한 상태. 섬의 상태란 외부의 영향에 좌우되지 않고 자신의 고유한 영역 안에 머무르는 상태를 말하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자폐증이나 자기도취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오로지 혼자 힘으로 모든 필요조건을 충족시킨다. ‘나’만이 현실로 느껴지고 ‘너’나 ‘그들’은 희미한 망령, 아니면 저 멀리 수평선에서 나타났다가 금방 사라져 버리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처럼 여겨진다. 어쩌면 이것은 시야를 상하로 명확히 가르는 직선에 익숙해져 버린 눈이 만들어 낸 평범한 허상일지도 모른다.」 ㅡ 「섬의 심리학」

「그러다 갑자기 대상을 바라보는 데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걸. 첫 번째 방법은 사물, 즉 인간이 사용하는 물건을 있는 그대로, 구체적으로 보는 방법이다. 이 경우 해당 물건의 사용법과 용도를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파노라마로, 더 일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 경우 개체 사이의 연관성과 서로에 대한 반응을 네트워크로 파악하게 된다. 사물은 더 이상 사물이 아니다. 뭔가에 기여하고 유용하게 쓰인다는 사실은 이제 중요치 않다. 그것은 피상적인 가치일 뿐이다. 신호나 기호가 되어 사진 속에 없는 뭔가를 지칭하면서, 사진의 테두리 너머에 있는 어떤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시선을 유지하려면 극도로 집중해야 했다.」 ㅡ 「쿠니츠키 : 대지」

                   

 

 

일관된 인과관계의 논리를 구축하는 것이 불가능하고, 각자의 궤변과 저마다의 사건으로 이어지는 이 세계는 하나의 서사로 이어지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겪고 본다. 아파트가 계속 허물어지고 고래가 뭍에 올라 자살을 하며 플라스틱이 온 대양을 누비는 동안 우리도 각양각색으로 떠돌다 어느 순간 멈춘다. 방향만을 가리킬 뿐, 목적지를 드러내지 않는 욕망을 엔진으로 삼고 있는 우리는 도처에 있다. 쿠니츠키는 섬 여행에서 아내와 아들이 실종되어 찾아야 하는 고생을 겪었다.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돌아온 아내와 아들은 다시 사라져버렸고 그도 새로운 길을 떠나야 했다. 에릭은 『모비 딕』의 모험적 삶을 실제로 살아본다. 아누슈카는 병든 아들과 과묵한 남편과 억압적인 시어머니에게서 벗어나 거리의 삶을 살아보다가 결국 돌아간다. 독재적인 아버지의 시체 표본 수집 일을 도맡던 샬로타는 선원으로 떠나는 꿈도 꿔 보지만 현실에 안주한다. 여성 생물학자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옛 연인의 안락사를 돕기 위해 30년 만에 폴란드로 와 007 첩보전 같은 행보 뒤 떠난다. 18세기 제임스 쿡은 남쪽으로 탐사를 떠났고 20세기 토머스 쿡은 최초의 여행사를 만들었다. 17세기 해부학자 프레데릭 라위스 교수와 21세기 외과 의사 블라우 박사처럼 인체가 여행지인 사람도 있다. 박제된 아버지의 시신을 돌려받기 위해 요제피네 졸리만이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1세에게 보낸 비난 편지도 지금 우리에게까지 전달된다. 쿠니츠키에게는 ‘카이로스’가 그리스신화 속 존재라는 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그리스 문명 연구에 한평생을 바친 교수에게 ‘카이로스’는 ‘인간의 시간과 신의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순환의 시간, 장소와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 다시 오지 않을 기회, 적절한 가능성을 만들기 위해 아주 짧게 열리는 순간, 무에서 무로 달려가는 직선이 원과 맞닥뜨리는 지점’을 뜻했다. 교수는 그리스 문명에 열광하다 그 속에서 임종을 맞는다. 교수가 죽음을 맞는 의식의 여행은 인간의 삶과 죽음을 압축한 대목이어서 인용한다. 우리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그가 자신의 말을 들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밤새도록 교수를 데리고 먼지 낀 도로를 달렸다. 광고판과 창고, 경사로와 지저분한 차고, 고속도로변을 지나치면서.

그러나 교수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피의 강물이 흘러넘쳐 붉은 대양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바닷물은 점차 다른 지역으로 범람했다. 먼저 그가 태아고 자란 유럽의 한 평원을 집어삼켰다. 도시와 다리, 그리고 그의 조상들이 대대손손 어렵게 지은 댐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바다는 갈대숲에 감춰져 있던 그들의 집 문턱까지 침범했고, 과감하게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돌바닥에 깔린 붉은 양탄자와 토요일마다 문질러 닦던 부엌의 나무 바닥을 휩쓸더니, 마지막으로 벽난로의 불을 꺼뜨리고 찬장과 테이블까지 덮쳤다. 그다음으로는 기차역과 공항, 언젠가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해 교수가 고향을 떠난 바로 그곳을 집어삼켜 버렸다. 또한 그가 여행을 다녔던 도시들과 거리들이 전부 물에 잠겼다. 그가 임대해서 지내던 방, 싸구려 호텔, 끼니를 해결하던 음식점도 모조리 사라졌다. 붉게 빛나는 그 수면은 그가 너무도 사랑하던 도서관의 첫 번째 서가를 공격했다. 책장들이 물에 퉁퉁 불었다. 표지에 그의 이름이 적혀 있는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검붉은 혓바닥이 문자들을 핥았고 검게 인쇄된 활자를 지워 없앴다. 자녀들이 졸업장을 받은 학교의 계단과 마룻바닥도. 교수 임명을 받기 위해 자랑스럽게 달려가던 도로도 전부 붉은 바다에 가라앉아 버렸다. 그와 카렌이 함께 누워 늙고 노쇠한 육신을 처음으로 결합했던 침대 시트도 붉게 물들었다. 붉은 빛의 그 끈끈한 점성 액체는 그가 자신의 신용 카드와 비행기 표, 손자들의 사진을 넣어 둔 지갑의 칸막이도 영원히 봉인해 버렸다. 물살은 기차역과 철로, 공항과 활주로를 모조리 덮쳤고, 이제는 그 어떤 비행이고, 그 어떤 기차도 거기서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해수면은 끈질기게 상승했고, 말과 개념과 추억을 모두 집어삼켰다. 가로등 불빛이 모조리 꺼지고 전구들이 터져 버렸다. 전선은 끊어지고 네트워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죽은 거미줄이 되어 버렸으며 전화기는 먹통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 느리고 무한한 대양이 마침내 병원 근처까지 왔다. 그리고 아테네 전체가 핏물에 잠겼다. 신전들, 성스러운 길과 수풀들, 이 시각엔 늘 비어 있는 아고라, 여신의 빛나는 조각상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올리브나무까지 모두.

그녀는 계속 그와 함께 있었다. 그들이 불필요한 장치를 그에게서 떼기로 결정하는 순간까지, 그리고 그리스 간호사가 단 한 번의 능숙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그의 얼굴을 시트로 덮는 순간까지.」 ㅡ 「카이로스」 

 

       

            

쇼팽은 죽어서 프랑스에 묻혔지만 그의 심장은 조국 폴란드에 묻혔다. 이 소설에서 떠다니는 유령섬처럼 등장하는 시체 표본들처럼 우리는 죽어서도 여행을 한다. 죽어서도 ‘나’는 나일까. 우리는 시간 속에 변화하는 모습일 뿐.

이 소설에 또 많이 등장하는 문장은 “여기 내가 있다”이다. 일상에서 ‘인간은 왜 살까’ 하는 물음처럼 여행지에서 자주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나는 여기 왜 있을까?’ 늘 답은 ‘모르겠다’이다. 여행 심리학의 궁극적 최상ㅡ목적지가 어디건 간에, 우리는 항상 “내가 어디에 있든 중요치 않다.” 어디에 있는지 상관없다. 여기 내가 있으므로ㅡ 단계는 우리가 삶에 임하는 태도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계속 죽음을 품은 채 죽음과 함께 할 것이다. 또 다른 순례자가 “지금 플렉시 글라스 속에 담겨 있거나, 아니면 다른 방에서 플라스티네이션 처리가 된 상태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고, 잊힌 이야기 혹은 지금 태어나는 이야기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삶과 타인을 계속 만날 것이고, 한 줌의 재로 돌아갈 우리의 물음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무엇에 대해 묻고 있는지 아는 사람은 얼마 안 가서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아마도 저울의 눈금을 기울게 할 수 있는, 속담에 나오는 딱 한 줌일지도 모르겠네요.”」 ㅡ 「블라우 박사의 여행 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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