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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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사위는 멈추기 위함인가 굴러가기 위함인가. 신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지만 세상에 대한 희망을 잃은 상속자 포피엘스키는 랍비 치유사에게 ‘한 명의 게이머를 위한 유익한 게임’이라는 상자를 건네받았다. 상자에는 태고 마을이 중앙에 있는 지도와 함께 태고 마을에 있는 것과 유사한 사람, 동물, 물건들의 모형과 팔면 주사위 한 개가 들어 있었다. 포피엘스키는 게임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전쟁이 닥치든 사회주의 정권에 재산을 몰수당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이런 상징적인 물건이나 상황과 엮여 있다. 미하우가 전쟁터에서 살아남아 돌아올 때 가져온 커피 그라인더가 그녀의 아내 게노베파, 딸 미시아, 손녀 아델카에게 차례차례 옮겨가게 되는 상황도 끝없는 시간과 게임의 연속성과 닮았다. 인간과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바꿔왔던 주사위와 마찬가지로 커피 그라인더도 중요한 상징이다. 아델카가 태고에서 이 사물을 가지고 나가는 결말은 또 다른 태고로 축이 이동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든 “소유하고 싶고 소유되고 싶은 욕망이 들끓어오르기 때문이다.”(6쪽)

 

「그라인더는 ‘갈아낸다’라는 관념으로부터 도려낸 형상의 조각이다.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라인더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라인더는 아마도 전체적이고 본질적인 변화의 법칙, 거기서 떨어져 나온 파편일 수도 있다. 그것 없이는 이 세계가 돌아갈 수 없거나, 아니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그런 법칙 말이다. 어쩌면 커피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그라인더 주위에서 돌고 진보해나가는 현실의 축. 그라인더는 이 세계에서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일 수도 있다. 나아가 미시아의 그라인더는 ‘태고’라고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54쪽, 「미시아의 그라인더의 시간」) 

 

사물들의 완결성만큼 이 세계는 닫혀 있다. 동물, 식물, 인간은 사물의 생명력에 비해 시간을 뛰어넘어 존재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고, 우리는 공간, 질서와 법칙이 지배하는 경계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욕망, 상상, 관념 같은 것들은 그래서 더 자라난다. 가끔 변화가 찾아오기도 하니까.

토카르추크는 이 소설의 배경을 1910년에서 1990년대까지 설정하고 니에비에스키 가족 삼대(미하우와 게노베파 부부, 그들의 자녀 미시아와 이지도르, 손녀들)를 중심으로 태고 마을 사람들, 그곳에 머무르는 신과 악귀의 시간까지 신화적으로 그렸다. 크워스카가 안젤리카 식물과 사랑을 나눠 딸을 수태한다거나 신이 인간에게 말을 거는 마법 같은 일뿐 아니라 ‘太古’라는 가상 마을 설정부터 삼대에 걸친 가족사, 역사적 사건(1·2차 세계대전, 유대인 학살과 전후 폴란드 국경선의 변경, 사유재산의 국유화, 냉전 체제와 사회주의, 민주화 운동과 체제 전환) 속에 신비하고 굴곡 많은 삶을 사는 인물들의 이야기 등에서 마르케스 『백 년 동안의 고독』과 마술적 리얼리즘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토카르추크의 변별점이라면 심리학과 융, 철학과 종교에 대한 작가의 관심이 반영된 종교적이면서도 신화적인 색채, 여성 인물을 부각하면서도 모두를 평등하게 다루는 페미니즘 성격이라고 하겠다. 그래서 ‘~의 시간’이라는 소제목의 84편의 단락은 기승전결이라는 전통적 소설 플롯으로 묶이지 않는다. 니에비에스키 가족, 태고 마을 사람들, 외부인, 동식물, 神, 사물, 짐승으로 변한 나쁜 인간, 죽은 자들은 각각의 주체로서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이들의 이야기는 출생에서 죽음까지 태고라는 공간 속에 유기적으로 맞물려 있다. 몸이 떠나더라도 마음이나 영혼은 이곳을 벗어나지 못한다. 크워스카의 딸 루타는 브라질로 떠났지만 이지도르에게 편지를 보내며 태고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물까마귀’라 불린 소작농 익사자는 신과 비슷한 상태로 이곳에 머물렀다. 토카르추크는 번뇌와 고독 속에 스스로 깨달아간다는 점에서 사람과 신과 악귀도 평등한 선상에서 그렸다.

 

「어느 날 이지도르는 다락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조각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불현듯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무심결에 ‘하느님 맙소사’라고 감탄사를 내뱉다가 이지도르는 순간적인 깨우침에 눈을 떴다. 바로 이 단어 속에 신의 성별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 열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루’, ‘하얀색’, ‘하천’, ‘하품’, ‘하지만’, ‘하하하’처럼 남성형도 여성형도 아닌 중립적인 단어였다. 이지도르는 흥분해서 자신이 발견한 참된 신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불러보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부를 때 ‘ㅎ’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하느님 맙소사’는 아직 어리고 미숙했지만, 동시에 태초부터, 아니 그보다도 먼저 존재해왔다(마치 ‘하염없이’나 ‘한결같이’처럼). 만물을 포용하는 조화로운 존재였지만(마치 ‘하모니’처럼), 특별하고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했다(마치 ‘하나’처럼). 그리고 모든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마치 ‘해’처럼). 어디에나 존재하지만(마치 ‘하늘’처럼), 막상 찾아내려 하면 그 어디에도 없었다(마치 ‘허상’처럼). ‘하느님 맙소사’는 사랑과 기쁨이 넘쳤지만, 때로는 잔인하고 위협적이기도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성향과 속성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시공간과 대상을 아우르고 이었다. 창조하고 파괴했다. 아니면 창조한 대상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어린아이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예측 불가능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반 무크타와 비슷했다. ‘하느님 맙소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282쪽, 「이지도르의 시간」)

 

「안개에서 힘이나 형상을 빼앗아 올 수도 있고, 자욱한 먹구름을 움직여 해를 가리거나 수평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밤을 늘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익사자는 스스로가 ‘안개의 왕’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자신이 ‘안개의 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개의 왕은 물속에 있을 때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는 여름 내내 유사(流沙)나 썩은 잎사귀로 만든 침대에 누운 채 수면 바로 아래에서 지냈다. 물 밑에서 찰랑거리는 물 밖을 내다보며 계절이 바뀌는 걸 보았고, 해와 달의 유랑을 보았다. 물 밑에서 내리는 비와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고, 여름철에 나방이 춤추는 모습과 멱을 감는 사람들, 야생 오리와 주황색 다리를 보았다. 이따금 뭔가가 나타나 꿈인지 뭔지 모를 상태에서 그를 깨우기도 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버텼다.」(102~103쪽,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               

                   

「빛이 스스로 움직였고, 타올랐다. 빛의 기둥이 갈라져서 어둠으로 흩어졌고, 거기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질료(質料)를 발견했다. 그 속에서 신이 눈을 뜰 때까지 빛의 기둥은 온 힘을 다해 그 질료를 강타했다. 신은 의식이 명료하지 않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자기 말고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기에 자신이 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를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없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도 없었기에, 신은 자기 자싱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상세히 살펴보다가 문득 ‘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안다는 건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고 신은 생각했다.

(중략)

신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잡을 수 없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만이 신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신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바위를 통해 자신을 보고, 태양을 사랑하는 식물들을 통해, 그리고 여러 세대의 동물들을 통해 자신을 본다. 인간이 처음 나타나자 신은 계시를 경험한다. 그리고 처음과 밤과 낮을 가르는 가녀린 선을, 밝음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밝음이 되는 그 미세한 경계를 명명하게 된다. 그때부터 신은 인간의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서로 다른 수천 개의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가면과 다름없는 그 얼굴들을 마치 배우처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일순간 가면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입으로 스스로에게 기도를 하면서 그는 자기 안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거울 속에 비친 상(像)은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상 속에 투영되었다.

신이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혹은 신이면서 인간인가, 아니면 신도, 인간도 아닌가? 내가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나를 만들어냈는가?”

인간이 그를 유혹하자 그는 은밀히 연인의 침대로 들어간다. 거기서 사랑을 발견한다. 노인의 침대로 남몰래 들어가서 무상(無常)을 발견한다. 죽어가는 자의 침대로 숨어 들어가서 죽음을 발견한다.」 (113쪽, 「게임의 시간」)

 

 

 

신이 그랬(다고 말하)듯 인간도 이름을 붙여가며 창조하고 파괴했다. 그러나 주사위가 게임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듯 커피 그라인더가 커피를 완성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이나 마음이 세계를 결정짓는 것도 아니고 아이도 어른을 결정짓거나 완성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결합과 분리 과정의 우연적 시간 속에 있으며 공통적으로 무지하다.

 

「더러워진 눈 밑에서 모습을 드러낸 빨간 장갑은 상속자에게 깨달음을 주었다. 뭔가가 변화하고 나아질 거라는 생각, 모든 것은 발전한다는 확고한 믿음, 모든 종류의 낙관주의는 결국 청춘이 품고 있는 가장 큰 기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그가 언제나 독약처럼 은밀히 지니고 다니던, 절망으로 가득 찬 그릇이 그의 내부에서 산산이 부서졌다. 상속자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더러움처럼 여기저기 퍼져 있는 고난, 죽음, 부패를 목격했다.」(43쪽, 「상속자 포피엘스키의 시간」)

 

「미시아는 어른이나 아니나 모든 면에서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든 어른이든 전부 일시적인 상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미시아는 자신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주변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변해가는지 주의깊게 관찰했지만, 사실 이러한 변화의 목적이나 의도가 무엇인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49~50쪽, 「미시아의 시간」) 

 

 

우리의 무지와 “실현되었고 흘러갔고 끝났고, 또 시작”(39쪽)되는 삶과 욕망의 게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과거를, 전쟁을, 잘못을 되풀이한다. 또한 현실이 꿈이길 바라거나 상상이 현실이 되길 바란다. 어디서 어디로 가길 바라지만 목적과 이유는 간밤의 꿈처럼 묘연해지고, 이지도르의 편지들처럼 증발한다. 어떨 때 우리의 삶은 백지 편지 같거나 아무도 모르게 돌 밑에 남겨둔 손자국 같다.

 

「미하우가 보았던 건, 지금 이 전쟁이 아니라 그때 그 시절의 전쟁이었다. 예전에 자신이 횡단했던 광활한 대지가 또다시 눈앞에 펼쳐졌다. 이것은 꿈이리라. 모든 게 후렴구처럼 되풀이되는 것은 오직 꿈속에서만 가능하니까. 그는 언제나 똑같은 꿈을 꾸었다. 광대하고 고요하며, 마치 군대의 끝없는 행렬이나 고통 속에 잠잠해진 폭발처럼 끔찍한 꿈이었다.」(171쪽, 「미하우의 시간」)

 

이 무지는 시간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지 못한다. 인간은 자신의 고통 속에 시간을 묶어놓고, 과거와 미래를 고통으로 가득 채우며 절망을 거듭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 중 그런 고통 속에서 그나마 자유로울 수 있던 인간은 그런 번민에서 벗어난 인간이었다. 성녀와 창녀, 영매의 특징까지 가진 크워스카, 모든 것을 가졌지만 모든 것을 버릴 수 있었던 상속자 포피엘스키, 감정과 관념까지 모두 버리고 죽음을 맞았던 이지도르. 전쟁 혼란 속에 집단 강간 기억의 고통과 증오 때문에 이지도르가 아닌 우크레야와 결혼을 했던 루타도 모든 걸 버리고 탈출하고 나서야 자유로워졌다. 이들의 공통점은 불신자가 아니었다는 점인데 그렇다고 이들의 삶이 행복한 것도 아니었다. 두 번의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을 수 있고, 가족을 모두 잃고도 살아갈 수 있으며, 과거의 삶을 완전히 바꾸더라도 우리는 결국 죽는다. 인간의 삶은 매 순간 어렵고 깨달음은 늘 늦다. 어떤 시공간 속에 살더라도 우리의 숙명이다. 삶도 죽음도 단 한 번이기에 이 시간은 유일무이하게 빛난다. “기대했던 바가 전부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131쪽) 태고의 신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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