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이지도르는 다락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하늘의 조각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불현듯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신은 남자도, 여자도 아니었다. 무심결에 ‘하느님 맙소사’라고 감탄사를 내뱉다가 이지도르는 순간적인 깨우침에 눈을 떴다. 바로 이 단어 속에 신의 성별에 대한 고민을 해결하는 열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루’, ‘하얀색’, ‘하천’, ‘하품’, ‘하지만’, ‘하하하’처럼 남성형도 여성형도 아닌 중립적인 단어였다. 이지도르는 흥분해서 자신이 발견한 참된 신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불러보았다. 그리고 소리 내어 그 이름을 부를 때 ‘ㅎ’ 소리를 반복하면서 점점 더 많은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하느님 맙소사’는 아직 어리고 미숙했지만, 동시에 태초부터, 아니 그보다도 먼저 존재해왔다(마치 ‘하염없이’나 ‘한결같이’처럼). 만물을 포용하는 조화로운 존재였지만(마치 ‘하모니’처럼), 특별하고 독보적인 존재이기도 했다(마치 ‘하나’처럼). 그리고 모든 생명체에게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마치 ‘해’처럼). 어디에나 존재하지만(마치 ‘하늘’처럼), 막상 찾아내려 하면 그 어디에도 없었다(마치 ‘허상’처럼). ‘하느님 맙소사’는 사랑과 기쁨이 넘쳤지만, 때로는 잔인하고 위협적이기도 했다. 이 세상의 모든 성향과 속성이 그 속에 담겨 있었다. 그리고 모든 시공간과 대상을 아우르고 이었다. 창조하고 파괴했다. 아니면 창조한 대상이 스스로를 파괴하도록 만들었다. 어린아이나 정신 나간 사람처럼 예측 불가능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반 무크타와 비슷했다. ‘하느님 맙소사’는 너무도 당연하게 자신의 존재를 확고히 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282쪽, 「이지도르의 시간」)
「안개에서 힘이나 형상을 빼앗아 올 수도 있고, 자욱한 먹구름을 움직여 해를 가리거나 수평선을 흐릿하게 만들고, 밤을 늘일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익사자는 스스로가 ‘안개의 왕’임을 깨닫게 되었고, 그 순간부터 자신이 ‘안개의 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개의 왕은 물속에 있을 때 최상의 상태를 유지했다. 그는 여름 내내 유사(流沙)나 썩은 잎사귀로 만든 침대에 누운 채 수면 바로 아래에서 지냈다. 물 밑에서 찰랑거리는 물 밖을 내다보며 계절이 바뀌는 걸 보았고, 해와 달의 유랑을 보았다. 물 밑에서 내리는 비와 떨어지는 낙엽을 보았고, 여름철에 나방이 춤추는 모습과 멱을 감는 사람들, 야생 오리와 주황색 다리를 보았다. 이따금 뭔가가 나타나 꿈인지 뭔지 모를 상태에서 그를 깨우기도 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게 뭔지 조금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저 버텼다.」(102~103쪽, 「익사자 물까마귀의 시간」)
「빛이 스스로 움직였고, 타올랐다. 빛의 기둥이 갈라져서 어둠으로 흩어졌고, 거기서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던 질료(質料)를 발견했다. 그 속에서 신이 눈을 뜰 때까지 빛의 기둥은 온 힘을 다해 그 질료를 강타했다. 신은 의식이 명료하지 않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자기 말고는 아무도 눈에 띄지 않았기에 자신이 신이라는 걸 깨달았다. 스스로를 부를 수 있는 이름도 없었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도 없었기에, 신은 자기 자싱에 대해 알기를 원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상세히 살펴보다가 문득 ‘신’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안다는 건 이름을 붙이는 일이라고 신은 생각했다.
(중략)
신은 시간의 흐름을 통해 자신에 대해 알게 된다. 잡을 수 없고 끊임없이 변하는 것만이 신과 가장 닮았기 때문이다. 신은 바닷속에 잠겨 있다가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바위를 통해 자신을 보고, 태양을 사랑하는 식물들을 통해, 그리고 여러 세대의 동물들을 통해 자신을 본다. 인간이 처음 나타나자 신은 계시를 경험한다. 그리고 처음과 밤과 낮을 가르는 가녀린 선을, 밝음이 어둠이 되고 어둠이 밝음이 되는 그 미세한 경계를 명명하게 된다. 그때부터 신은 인간의 눈으로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서로 다른 수천 개의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고, 가면과 다름없는 그 얼굴들을 마치 배우처럼 썼다 벗었다 하면서, 일순간 가면이 되기도 한다. 인간의 입으로 스스로에게 기도를 하면서 그는 자기 안에서 모순을 발견한다. 그리하여 거울 속에 비친 상(像)은 현실이 되었고, 현실이 상 속에 투영되었다.
신이 물었다. “나는 누구인가? 신인가, 인간인가? 혹은 신이면서 인간인가, 아니면 신도, 인간도 아닌가? 내가 인간을 창조했는가, 아니면 그들이 나를 만들어냈는가?”
인간이 그를 유혹하자 그는 은밀히 연인의 침대로 들어간다. 거기서 사랑을 발견한다. 노인의 침대로 남몰래 들어가서 무상(無常)을 발견한다. 죽어가는 자의 침대로 숨어 들어가서 죽음을 발견한다.」 (113쪽, 「게임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