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소망 없는 불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5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4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이 이야기>

6.
소망한다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또한 소망하는 것에 시한(時限)을 두어야 한다는 의식도 가능하리라. 근데 그런 의식은 그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할 수 없었던 예전과는 다르게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7.
아이의 생활 리듬에 따라 흐르는 일상을 잔인하고도 무의미한 운명으로 받아들이며 더 강도 높게 체험했다. 물건들은 무기처럼 비스듬하게, 악의를 품고 비현실적으로 놓여 있었다. 물건들 사이에는 무기 창고 속에 무기가 쟁여져 있는 것처럼 공기 한 점의 여지도 없었다. 그리고 그 안에 묶여 있는 자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고 그 혼란 속에서 어디를 보나 적대적인 무질서만이 있었다. 훨씬 나중 에야 비로소 그는 아이가 어질러놓은 잡동사니를 참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모든 것이 아무렇게나, 심지어는 형편없이 흩어져 있는 듯 보이더라도 무질서 속의 질서를 깨닫고선 그 속에서 아이와 똑같이 편안하게 느끼는 것을 배웠다. 단지 자유로운 순간과 꾸준히 지켜봐 주는 것만이 필요했다.

8.
그는 아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지금까지 인류가 표현할 수 없고 또 생각할 수도 없는 구식의 어투로 말을 건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들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언젠가 그런 적이 있었던 것처럼 소리 죽여 울면서 맑고 빛나는, 뿌연 물기를 없앤 두 눈을 잠깐이나마 들어 보인다. 비참한 한 인간에게 그보다 그럴 듯한 위 안은 드물었다(아이는 나중에 ‘그땐 다른 도리가 없었으니까’라고 말한 적이 있다). 누구나 그렇게 어른을 이해하고 가엾게 여긴다. 그와 같은 사건으로 아이는 처음으로 그의 이야기 속에 행동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그후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때마다 그의 간섭은 이마에 이마를 대듯이 간단했고 경험 많은 심판관이 ‘경기 계속’을 알리는 표지처럼 매우 간결했다(그것은 이 세계에서 아주 특별한 것이다).

9.
(한때는 자신도 단체 생활에 속할 능력도, 의지도 없이 개인 플레이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바로 자기 같은 사람도 세월이 지남에 따라 완전히 자의에 의해, 작으나마 자신의 공동체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런 것을 만드는 데는 매번 근본적인 깨달음이나 전반적인 통찰이 무조건 필요했다. 그런 것 없이는 그에게 어떤 합법적인 혈연체도 있을 수가 없었다)

10.
아이에 대한 그의 기본 감정은 지금까지 느낀 어떤 애정보다 앞선, 무조건적이고 열렬한 신뢰감이었다. ‘아이들’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를 갖기 이전에 그는 이 특정한 아이를 신뢰했다. 그는 아이가 자신이 잊어버렸거나 결코 가져보지 못했던 위대한 법칙을 구현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아이는 그에게 개인 교사로 보이지 않았던가? ‘아이의 입’에서 어떤 특별한 말이 나와서가 아니라 단순히 아이가 존재한다는 것, 즉 아이가 구현하고 있는 인간 존재를 믿었던 것이다. 아이가 구현하는 인간 존재는 남자에게 삶이 어떠해야 한다는 진리의 척도를 제시해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아이를 객관적으로 존중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는 영화관에서 페이소스라고 흘려 듣고 옛날에는 쓸모 없는 글이라고 대충 읽어버렸던 말을 이제는 세상에서 가장 실질적인 말이라 여기며 때때로 입에 올리곤 했다. 위대한 말들은 ‘역사적’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 그 의미를 잃는다고 주장할 만큼 잘난, 뭘 모르는 사람이 있었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미몽에 빠져, 혹은 그저 무심함과 피로에 싸여 그런 말들을 주고받지 않았던가? 그런 말이나 하는 현대인들은 어떻게 살았나? 누구와 함께? 그들은 또 별뜻도 없는 말을 하면서도 심하게 허풍을 떨고 그 밖의 모든 것은 남의 일처럼 말한다는 것을 완전 히 잊었단 말인가? 공개 토론장, 일간 신문들, 텔레비전, 신간 서적과 가장 사적인 관계 등 어느 곳에서나 통용되는 표현들이 왜 천박한 말이 지니는 파괴성, 진부한 악취, 신성 모독성에다 영혼과 신경과 뇌를 죽이는 요소를 지니게 되었을까? 왜 사방팔방에서 속이 텅 빈 시대의 나태한 언어만이 울려 퍼졌을까? 어쨌든 남자가 비난을 많이 해왔던 위대한 말들을 하루하루 지나면서 더욱 쉽게 이해하게 된 것은 아이와 함께한 덕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