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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관객모독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8년 12월
평점 :
한트케의 다른 소설 <소망 없는 불행>과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은 오래전에 읽었는데, 그의 초기작 <관객 모독>부터 다시 읽기 시작.
실제 연극 무대에서는 각색에 따라 어쩔지 모르겠으나, 번역 순화 때문인지 한트케가 찰진 욕을 못해서 그런지 불쾌한 것 없이 무덤덤했다-_- (((( 모독 어딨어 )))) e book 듣기로 읽어서 종이책보다는 연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이 책을 통해 서사보다 언어 중심, 구조주의와 비트겐슈타인의 언어 철학에 경도됐던 한트케의 창작 기조를 엿볼 수 있다. 향후 그의 소설에서도 이 점을 눈여겨 볼 것이다.
1. 우리는 말만 하기 때문에 그리고 허구적인 것은 말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확실치 않거나 모호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기 때문에, 이곳에 두 차원 혹은 여러 차원은 존재할 수 없고 연극 속 연극도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몸짓도 하지 않고, 어떤 이야기도 하지 않고, 아무런 연기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적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단지 말만 하기 때문에, 우리는 문학이 지닌 다양한 의미를 상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를 들어 이미 언급한 죽음의 표정과 몸짓으로 지금 현재 통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성교의 몸짓과 표정을 동시에 보여 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중 의미를 지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중 의미를 지닌 채 연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세상에서 떼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문학적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최면을 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허상을 보여 주며 믿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거짓 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자연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연극을 보는 것은 최면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상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눈을 뜬 채 꿈꿀 필요는 없습니다. 여러분은 꿈의 비논리로 무대의 논리를 대하도록 강요받지도 않습니다. 무한히 펼쳐질 수 있는 여러분의 꿈은 좁은 무대 위에서 제한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조리한 여러분의 꿈은 무대의 현실적인 규칙에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꿈도 현실도 상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삶에 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사회에 대해서도 개인에 대해서도, 자연에 대해서도 초자연에 대해서도, 쾌락에 대해서도 고통에 대해서도, 현실에 대해서도 연극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시간은 우리에게서 어떤 비가(悲歌)도 불러내지 못합니다.
2. 이 작품은 일종의 머리말입니다. 다른 작품에 대한 머리말이 아니라 여러분이 과거에 했던 것과, 지금 하고 있는 것, 그리고 앞으로 할 것에 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은 주제입니다. 이 작품은 주제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관습과 도덕에 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행위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의 무위(無爲)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누워 있는 것, 앉아 있는 것, 서 있는 것, 걸어가는 것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이것은 삶의 진지함과 유희적인 면에 대한 머리말입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할 연극 관람에 대한 머리말이기도 합니다. 또한 다른 모든 머리말들을 위한 머리말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세계극입니다.
3. "여기서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도 서술 불능이 독일 문학을 지배하고 있다.(무언가 아는 것이 없더라도 적어도 서술은 할 수 있어야 한다.) 창조성과 성찰도 부족하며, 이러한 산문은 무미건조하고 어리석다. 그리고 무미건조하고 어리석기는 비평도 마찬가지며, 비평의 방법은 아직까지도 여전히 낡은 서술 문학에서 성장한 것이어서 모든 다른 종류의 문학에 대해서는 그저 비난이나 하고 지루함이나 퍼뜨릴 뿐이다."(1966년 5월 6일, 《디 차이트》) ㅡ 페터 한트케
4. 전쟁 중에 태어나긴 했지만 자라면서 독일과는 다른 적대국의 문학과 새로운 사조의 영향을 받고 문학의 꿈을 키운 첫 세대로서 47그룹보다 이십 년 늦게 문단에 등장한 한트케는 "문학이란 언어로 만들어진 것이지 그 언어로 서술된 사물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47그룹 작가들의 문학적 가치와 서술 방법들을 강력하게 거부하고 이들을 "서술 불능자"로 비난하면서 주목을 끌었던 것이다. 화해될 수 없는 논쟁이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자."라는 47그룹의 주장은, "컴퓨터를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라면 47그룹 작가보다 백과사전이 훨씬 뛰어나다."라는 한트케의 냉소적인 공격을 발단으로 1967년에 사라진다.
5. "내 첫 희곡들의 작법은 (……) 연극 진행을 단어들로만 한정한 것이었다. 단어들의 서로 다른 의미는 사건 진행이나 개별 이야기를 방해했다. 연극이 어떤 구체적인 상(想)을 그리지도 않고, 현실을 그대로 묘사하거나 현실이 아닌 것을 현실로 착각하게끔 하지도 않으며, 오직 현실에서 쓰이는 단어와 문장으로만 구성된다는 점, 그것이 이 작법의 핵심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방법들에 대한 거부가 내 첫 희곡의 작법이었다." ㅡ 페터 한트케
사건이나 개인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서술해서 어떤 상(想)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단어와 문장만으로 작품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없고 단어나 문장이 비트 음악처럼 반복되는 연극인 것이다. 이것을 한트케는 언어극이라 부른다. 한트케가 거부한 기존의 연극은 구체적으로 현실을 서술하며, 언어극과 대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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