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새끼 쥐. 순수, 나는 그걸 이 단어로밖에 표현하지 못하겠다. 삶에서 얻은 생태로 사람을 보자마자 달아나는 것보다 너는 낙엽들 속에서 장난을 한창 부리고 있었다. 나와 눈을 마주치면서도 멈추지 않았다. 그런 너를 보며 내게 잔뜩 배어있을 습속이 조금 서러웠다. 사람들이 벤치로 몰리자 그제야 너는 달아났다. 너의 소리가 남긴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설치류의 얼굴이 감정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지만, 자세한 연구를 통해 설치류도 양미간을 좁히고 귀를 낮추고 뺨을 부풀리는 행동을 통해 괴로움을 나타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른 설치류 동료는 이런 얼굴을 쉽게 알아보는데, 실험을 통해 고통을 나타내는 얼굴보다는 편안한 얼굴을 한 쥐 사진 옆에 앉기를 선호한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스위스 과학자들은 실험실 쥐들을 매일 간질이고 함께 놀아주는 과정을 포함한 긍정적 치료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회기가 끝날 때마다 조용한 순간에 쥐들의 얼굴을 분석했다. 그들은 단지 얼굴을 쳐다보는 것만으로 어떤 쥐가 긍정적 치료를 받았는지 구별할 수 있었는데, 분홍색이 더 뚜렷해지고 더 편안해 보이는 귀가 그 단서였다. 이 연구들은 설치류의 얼굴이 정적이라는 개념(동일한 포커페이스를 한 쥐들이 서로 다른 감정을 가졌다고 표현함으로써 쥐들을 조롱한 만화도 있었다)에 종지부를 찍었다.
감정은 파악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측면이기도 하다. 감정은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실험을 통해 사람은 감정이 충만한 사진과 이야기를 중립적인 이야기보다 훨씬 잘 기억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우리는 자신이 하거나 하려고 하는 거의 모든 일을 감정적 용어로 묘사하길 좋아한다. 결혼식은 낭만적이거나 축제처럼 흥겨운 사건이고, 장례식은 눈물바다가 되는 상황이며, 스포츠 경기는 결과에 따라 아주 즐거운 사건이거나 실망스러운 사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동물에 대해서도 동일한 편견을 갖고 있다. 야생 카푸친(꼬리감는원숭이)이 돌로 견과를 깨는 장면을 보여주는 인터넷 영상은 물소들이 새끼를 구하려고 사자를 내쫓는 영상보다 조회 수가 훨씬 적다. 물소들이 뿔로 사나운 포식 동물을 물리치는 동안 새끼는 포식 동물의 발톱에서 벗어난다. 두 영상 모두 인상적이고 흥미롭지만,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두 번째 영상이다. 우리는 새끼와 동질감을 느끼면서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미와 다시 재회하는 장면을 보고 매우 기뻐한다. 사자에게는 이 결과가 전혀 만족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는 편리하게도 눈을 감는다. 이것은 감정이 지닌 또 하나의 측면이다. 감정은 우리에게 어느 편을 들게 한다. 우리는 단지 감정에만 관심이 많은 게 아니다. 감정은 우리가 잘 인식하지 못하는 수준에서 우리 사회를 조직화한다.
본질적으로 사람의 행동처럼 보이는 제스처가 영장류의 일반적인 패턴이라는 사실을 그들은 그때 처음 알았다. 진화의 연결 관계는 작은 것들에서 가장 잘 드러날 때가 많다. 그런데 두려움을 느꼈을 때 얼마 없는 우리 몸의 털이 곤두서는 방식(소름)에서부터 남자들과 수컷 침팬지들이 기쁨에 넘쳤을 때 서로의 등을 찰싹 때리는 방식에 이르기까지 사람이 나타내는 표현 중 약 90%가 이러한 연결 관계를 보여준다.
유인원을 바라볼 때, 우리만 공통의 역사를 보는 게 아니라, 우리를 쳐다보는 유인원도 그 역사를 본다. 만약 유인원이 우리에게 타임머신이라면, 우리 역시 유인원에게 타임머신이다.
그 자체만 놓고 본다면, 감정은 별로 쓸모가 없다. 단순히 두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그 동물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두려움이 동물에게 달아나거나 숨거나 반격하도록 자극한다면, 그 동물의 목숨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요컨대 감정은 위험과 경쟁, 짝짓기 기회 등에 적응적 반응을 유도하기 위해 진화한 것이다. 감정은 행동을 촉발하기 쉽다. 우리 종은 나머지 영장류와 많은 감정을 공유하는데, 모두 대체로 동일한 행동 목록에 의존해 살아가기 때문이다. 비슷하게 설계된 신체로 표현되는 이러한 유사성 때문에 우리와 나머지 영장류는 비언어적 방식으로 서로 연결된다. 우리 몸은 그들의 몸과, 그리고 그들의 몸은 우리의 몸과 완벽하게 대응하기 때문에, 상호 이해의 길은 바로 눈앞에 있다. 얀과 마마가 사람과 짐승으로서가 아니라, 동등한 개체로 만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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