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웃으면서 죽음을 이야기하는 방법
줄리언 반스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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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가 키케로를 인용하고, 키케로가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고, 줄리언 반스가 그들을 인용하고, 그렇게 한없이 우리는 삶과 이야기와 죽음의 공동체.


옥스퍼드 재학 시절에 처음 몽테뉴를 읽었다. 죽음에 관한 우리의 현대적 사유가 시작되는 지점에 그가 있다. 그는 고대 세계의 현명한 본보기들과 우리가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종말을 현대적으로, 원숙하게, 종교를 초월해 받아들이고자 하는 노력을 하나로 이어준다.

“Philosopher, c’est apprendre à mourir.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죽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몽테뉴는 키케로를 인용하고, 키케로는 이어서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한다. 죽음에 관한 그의 박학한 면모를 드러내는 유명한 저서들은 금욕주의적이고 문학적이며 일화가 많고 경구적이고 (어쨌거나 그가 의도한 바대로) 위안을 준다.

(중략)

몽테뉴는 죽음을 물리칠 수 없는 우리가 ‘죽음에 반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한시도 놓지 않는 것’이라고 믿었다. 너의 말이 넘어지거나 지붕에서 타일 한 장이 떨어질 때마다 죽음을 생각하라. 네 입안에선 언제나 죽음의 맛이, 네 혀끝에선 언제나 죽음의 이름이 감돌아야만 한다. 이런 식으로 죽음을 예견할 때 죽음의 예속에서 스스로 해방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다른 이에게 죽는 법을 가르쳐준다면, 기실 사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과 같다.


(중략)

몽테뉴는 “종교의 가장 확실한 토대는 삶에 대한 경멸이다”라고 말했다. 잠시 빌려 사는 이 세계를 낮게 평가하는 것은, 기독교도에게는 논리적이며 실로 본질적인 것이었다. 현세에의 과도한 애착(말고도 죽지 않는 몇몇 육생의 형태를 욕망하는 것까지)은 신에 대한 무례였을 것이다. 영국의 몽테뉴라고 할 수 있는 토마스 브라운 경84은 이렇게 썼다.
“이교도에게도 삶을 사랑하게 될 동기들이 있겠지만, 기독교도에겐 죽음을 외경하는 (즉, 두려워하는) 동기들이 있다. 기독교도가 이런 딜레마를 어떻게 피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형은 세포 재생에 관한 첫 번째 농담이 기원전 5세기에 생긴 것임을 지적하며 ‘자신은 예전에 돈을 빌렸었던 놈과는 다른 인간이 됐기 때문에 빚을 갚지 못하겠다고 버티는 놈’도 관련이 있다는 말을 했다. 그는 나아가 내가 몽테뉴의 표어 ‘philosopher, c’est apprendre à mourir’를 잘못 해석했다고 지적했다. 키케로의 그 말은 꼬박꼬박 죽음을 생각하면 두려움을 덜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철학자는 철학적 사색을 통해 죽음을 연습한다는 뜻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자신의 정신으로 소일하고 있으며 죽음이 제거할 육체는 무시하고 있다.nn플라톤학파는 죽은 후 인간은 순수한 영혼이 되어 육신의 장애를 벗어나기 때문에 더 자유롭고 명징하게 사유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자는 살아 있는 동안 죽음 이후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단식과 자학과 같은 기술을 연마해야 했다. 플라톤학파는 죽은 후에 모든 것이 좋아지기 시작한다고 믿었다. 반면에 에피쿠로스학파는 죽은 후엔 아무것도 없다고 믿었다. 듣자 하니(여기서 ‘듣자 하니’란 말은 ‘형이 말해준 또 한 가지는’을 의미한다) 이 두 개의 전통을 조합해 스스럼없는 고대인 특유의 ‘이것 아니면 저것’의 개념을 만들어냈다. 즉 ‘죽은 후 우리는 더 낫다고 느끼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다고 느낀다’라는.

플로베르와 모파상과 공쿠르와 졸라가 마치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듯 묘사와 분석을 통해 이 세계를 전부 소진시켜 더는 픽션 장르가 할 수 있는 게 남지 않게 된 시점에, 즉 소설의 시대가 막을 내릴지도 모르게 되었을 때 르나르는 산문을 쓰기에 이르렀다. 돌파구는 오로지 요약, 주석, 점묘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그는 결론을 내렸다.
사르트르는 『일기』를 거창하지만 다소 마지못한 태도로 상찬하는 글에서, 르나르가 제시한 해결책보다 그 딜레마에 더 큰 갈채를 보냈다.
“한 가지 것의 본질을 파악하려는 수많은, 더 현대적인 시도는 그 기원을 쥘 르나르에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사르트르는 이런 말도 했다.
“그를 현대문학의 시작점으로 본다면, 그 이유는 그가 스스로 들어가길 금했던 영역에 대해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일기』를 썼고 시기상 르나르의 『일기』와 몇 년이 겹쳤던 지드는 (아마도 경쟁심에) 르나르의 『일기』는 ‘강이 아니라 증류주 공장’이라고 볼멘소리를 했지만, 뒤이어 ‘열광하며’ 읽었다는 소회를 밝혔다.
양조장을 원하는가? 아니면 강을 원하는가? 삶이 독주에서 걸러낸 몇 방울 같기를 바라거나 노르망디 사과주 1리터 같기를 바라는가? 이는 독자들이 선택할 몫이다. 작가는 개인의 기질은 물론, 역사적 순간도 통제할 수 있는 바가 거의 없으며, 다만 작가 본인의 미학에 얼마간의 책임을 질 뿐이다. 증류주 같은 르나르의 글은 이미 사라진 문학에 대한 그 자신의 응답이자 거리낌 없는 본성의 표출이었다. 1898년에 그는 이렇게 썼다.
“거의 모든 문학작품에 대해서 지나치게 길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단평은 천 페이지 분량의 『일기』에서 4백 페이지째에 등장하는데, 르나르가 사망한 후 그의 부인이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길 바라는 페이지들을 골라 태워버리지 않았다면 『일기』는 천오백 페이지에 달했을 것이다.
『일기』에서 르나르는 고도의 정확성을 기해 자연계를 살피면서, 감정을 배제한 찬탄을 곁들여 묘사한다. 그리고 똑같은 정확성을 기해 인간계를 살피면서, 회의적인 태도와 아이러니를 곁들여 묘사한다. 그러면서도, 숱한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과 달리 자연과 아이러니의 기능을 이해한다. 1899년 12월 26일, 아이러니라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필요해진 새로운 세기가 막 도래할 즈음 그는 이렇게 썼다.
“아이러니는 잔디를 시들게 하지 않는다. 다만 잡초를 태워 없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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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나르의 친구 중, 희곡작가이자 재담꾼이었던 트리스탕 베르나르는 지나가던 영구차를 보고 마치 택시나 되는 것처럼 멈춰 세운 적이 있었다. 영구차가 멈춰 서자 그는 쾌활하게 물었다.
“타도 돼요?”
마흔여섯 살의 나이로 죽기 전에, 르나르는 지척에서 죽음을 경험한 적이 몇 번 있었다. 다음은 그가 여느 때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 죽음을 수습한 사례들이다.

진지함이라. 예컨대 1840년대까지의 교황령에서 태어난다는 건 나로선 바라는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때는 교육 수준이 지독히도 낙후돼 있어서 전체 인구의 불과 2퍼센트만 문맹을 면했다. 사제와 비밀경찰이 모든 걸 주관했다. ‘사상가들’은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불온한 부류라는 낙인이 찍혔다. 그런 가운데 그레고리 16세는 ‘중세에 어울리지 않는 건 무조건 불신했기 때문에 철도와 전신이 자신의 통치권 안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것을 금했다’. 이것이 진지하냐고? 천만에. 철저히 잘못된 방향에서 ‘진지하다’면 모를까. 이후 피우스 11세가 1864년에 제정한 ‘금서 목록’의 칙령으로 갈무리되는 세계가 있다. 그 세계에서 왕은 교회가 과학, 문화, 교육 전반을 통제할 것을 주장했고, 다른 종교를 숭배할 자유를 배척했다. 천만에, 내가 이런 것에 끌릴 리 없다. 그들은 처음엔 종파분리론자를 추적할 것이고, 그다음엔 다른 종교들을, 그런 후 나 같은 사람들을 찾아 나설 것이다. 이럴진대, 거의 대부분 종교 체제하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자본주의가 독점을 좋아하는 것처럼, 종교는 권위주의를 좋아한다. 혹여 지금 이 말을 듣고 자동적으로 권위의 상징 같은 저 바티칸에 있던(‘보좌에 앉아 계시던’이라고 해야 하나?) 교황들이 떠오른다면, 그러지 말고 교황의 역사에선 악명 높은 적과 같았던 반가톨릭교도를 떠올려보라. 바로 로베스피에르 말이다. 이 ‘청렴결백한 자’는 1789년 가톨릭교회의 사치와 세속성을 공격하며 국가적 명사로 떠올랐다. 삼부회에서 행한 연설에서, 그는 사제들에게 투명한 수단을 동원해 모든 자산을 팔아 그 수익을 빈자들에게 분배하는 것으로 초기 기독교의 금욕과 미덕을 다시 배우라고 촉구했다. 그럼에도 교회가 저어한다면 혁명은 기꺼이 도울 것임을 넌지시 시사했다.
대부분의 혁명 지도자들은 무신론자이거나 진지한 불가지론자였고, 새 정부는 수립되기 무섭게 가톨릭 신과 그의 지방 대표들을 제거했다.

서머싯 몸의 명언이 두 개 있는데, 내 딴엔 그 두 명제와 줄기차게 논쟁을 했기 때문인지 몇 년 동안 내게 울림을 주었다. 첫 번째는 ‘아름다움이란 따분한 것’이란 주장이다. 두 번째는 (초록색 색인 카드가 일러주기를) 『서밍 업』의 제77장에 나온다.
“인생의 크나큰 비극은 사람이 죽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당시 내가 이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그건 영감님한테나 그런 거겠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서머싯 몸은 삶을 이끌 최상의 정신 상태는 ‘유머를 간직한 체념’이라고 생각했던 불가지론자였다. 『서밍 업』에서 그는 그때까지 사람들에게 신의 실재를 믿게 했던 온갖 미흡한 주장들을 (주요 원인부터, 설계부터, 완성부터) 숨 가쁘게 검토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주장들보다 더 설득력이 있는 것은 길고 유행에 뒤지는 주장인 ‘e consensu gentium’, 즉 ‘만민의 합의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이 말은 곧 인간의 시대가 시작된 이래로 천차만별의 문화가 배출한 최고의 위인들과 최고의 현자들까지 포함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모두 신에 대한 모종의 신념을 품어왔으니 신은 실재한다는 의미다. 그토록 광범한 본능이 충족될 가능성 없이 어떻게 존재할 수 있겠는가?
세계에 대한 실질적인 지혜와 지식, 그리고 명예와 부를 갖춘 것이 무색하게 서머싯 몸은 ‘유머를 간직한 체념’의 정신을 고수하지는 못했다. 그의 노년은 평온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모든 것이 앙심, 멍키 글랜드,적의에 찬 유서 작성으로 점철돼 있었다. 그의 육신은 정력과 정욕 속으로 잠겨 들어가면서 심장은 더욱 딱딱해지고 정신은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날이 공허한 부자로 전락했다. 행여 그가 자신의 (쌀쌀맞고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조언을 포함한 유언장에 내용을 추가하고자 했었다면 ‘인생의 또 다른 비극은 우리가 제때에 죽어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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