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스트 Axt 2019.9.10 - no.026 악스트 Axt
악스트 편집부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도리스 레싱을 페미니스트 작가라고 한정하기보다 카산드라 혹은 샤먼 같다고 하는 이유는 작가 특유의 어투로도 짐작 가능하다. 그녀의 글은 차갑고 명징하다. 그녀의 메시지는 저 심연의 기저에서 흘러나오므로 빨리, 쉽게 포착되지 않는다. 카산드라의 노래처럼 우회하지 않고 진실을 말하지만 너무 비극적이어서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을 듯하다. 카산드라의 언어는 치솟은 파도 너울 안쪽의 접혀진 음영 지대에 머물러 있는 어둡고 난해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나는 레싱의 글이 통속적이지 않아 좋다. 가령, 자식들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는 어미 새들의 소음 같은 것이 들리지 않아 좋다. 남자에게 버림받은 한 여인이 낼 법한 자기분열적이고 자기파괴적인 신음이 들리지 않아 좋다. 욕망을 비운다고 하면서 욕망을 증폭시키는, 아직도 긴장과 흥분 상태 속에 있는 피곤한 글이 아니어서 좋다. 도리스 레싱은 그저 차갑게 예증할 뿐, 너무 자세한 해설을 보태지 않는다. 자기연민에 빠질 필요는 없지 않은가. 페미니즘적인 글쓰기는 무엇일까? 여성적인 글쓰기가 따로 있기는 한 건가?

(중략)

섹스라는 단어도 실상 어원대로라면 교합이 아니라 분리이다. 라틴어 섹수스(Sexus)는 암수 분리라는 뜻이다. 고대 로마의 황제 섹수투스는 분리와 통합을 이중적으로 구사하는 고도의 통치 능력을 염원하며 섹수스에서 파생한 ‘섹수투스’를 자신의 황제 명으로 정했다고도 한다. 결혼에 이은 이혼은 외견상 결정적 파국 같지만, 내적 논리로만 보면 유기적이고 연기(緣起)적인 수순 같기도 하다.

도리스 레싱은 늘 자신을 탈영토화함으로써 위대한 작가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녀는 늘 ‘바깥’에 있었다.

ㅡ 류재화,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

만나는 건 쉽고 헤어짐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조언을 구하고, 상담을 하게 된다. 데이트를 하러 온 젊은 커플들이 가득한 한 카페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정신과전문의 선생님이 이런 말을 했다.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하나요를 물으러 오지 않지만, 이 사람과 헤어져야 하나요는 물으러 오지요." 입사할 때보다 퇴사할 때 더 고민이 많고, 장사를 시작할 때보다 접을 때 더 헷갈리는 것처럼, 결혼과 이혼도 똑같단다. 그 의사 선생님에게 소설 「이혼 지침서」의 내용과 ‘이모들’로부터 받았던 조기교육의 내용을 이야기해드렸더니 이렇게 말했다. "삶의 에너지가 더 강한 사람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지요. 물론 의사인 제가 권장할 방법은 아니죠. 나도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까요."
영국의 대중저술가 로버트 롤런드 스미스는 『이토록 철학적인 순간(Driving with Plato)』이라는 책에서 오늘날 이혼이 갖는 부정적인 의미가 많이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혼이 어려운 이유에 대해 이와 같이 말한다. "서로 헤어지는 데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헤어지려 하는 두 사람이 헤어지는 방법에 관해 강제적으로 동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ㅡ 김보경, <쑤퉁 「이혼 지침서」>

그는 마치 부활하는 것처럼 방의 일부가 되어버렸고, 이 시점에서 화자는 줄곧 ‘그’였던 것에서 ‘그녀’로 바뀐다. 그 방에 들어온 (아내임이 분명한)그녀는 누군가가 들어온 흔적을 알아채지만 잃어버린 것이 없다는 것에 곧 안도한다. 그리고 그녀는 잃어버린 것이 없는 대신 새로운 물건 하나를 발견한다. 여기에서 이 소설의 문장은 시간을 마구 뒤집어놓는다. 분명 새로운 물건을 발견했는데 "그 물건은 그녀가 매우 좋아했던 것이었으므로"라는 과거형으로 그 새로운 물건에 대해 얘기한다. 그로 미루어보건데 그는 이 집에서 아내의 남편이자 집의 일부인 가구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처음부터 가족이란 제도에서 남자 가장의 방은 없다. 남자에게 집은 가장 낯선 공간이다. 특히 가부장제는 오랜 과거에서부터 남자를 끝없이 집밖으로 내몰았다. 최인호의 「타인의 방」에서 아내의 외출은 상황을 전도시킨 그의 배제였고, 그 배제에서 그가 아내의 집에 계속 남아 있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가구가 되는 길뿐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메모지를 찢어 달필로 다음과 같이 써서 화장대 위에 놓았다.(생략)"

ㅡ함성호, <최인호 「타인의 방」>

최제훈 : 저는 기본적으로 소설뿐 아니라 모든 창작의 세계에서는 가급적 제한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새로운 미적가치는 어디서 싹을 틔울지 모르는 건데 밭 자체를 폐쇄해버리면 그만큼 세계의 인식 가능성이 줄어드는 셈이니까요. 극단적인 생각일 수도 있는데 그렇게 되면 무엇을 허용하고 허용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에 대한 대중의 판단력 자체가 떨어질 수도 있고, 결국 필터를 자처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세계만 읽으면서 살게 될 수도 있는 거겠죠.
.
.
.
그런 태도가 점점 확대되면 결국 우리는 비슷비슷한 인물이 등장하는 비슷비슷한 소설만 읽게 되겠죠. 소설은 어떤 지향점을 바라보기보다는 지금 여기를 파헤치는 데 특화된 장르라고 생각해요. 현실에서도 선한 사람들만 살아가면 좋겠지만 그건 바람일 뿐이잖아요. 왜 그렇게 되지 않는지를 소설은 냉정하게 보여줄 수 있어야죠.

ㅡcover story 최제훈+손보미, <이 세계에 사는 동안, 나는 계속 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