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클루지
개리 마커스 지음, 최호영 옮김 / 갤리온 / 2019년 7월
평점 :
판매중지


˝어떤 문제에 대한 서툴거나 세련되지 않은 (그러나 놀라울 만큼 효과적인) 해결책˝이란 뜻의 ‘클루지kluge‘ 개념을 통해 진화, 마음, 정신병 등이 클루지의 산물이라 추측하는 설득력 있으면서 도발적인 책.

맥락 기억은 저장된 정보에 접근하기에 적합한 우편번호 체계를 만들어낼 수 없었던 자연이 그것을 보상하기 위해 만들어낸 투박한 임시변통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 체계에도 몇 가지 명백한 장점이 있다. 우선 맥락 의존적인 기억은 컴퓨터처럼 모든 기억을 똑같이 취급하는 대신에 우선순위를 매긴다. 그래서 자주 일어나는 것, 우리가 최근에 필요로 했던 것, 지금과 비슷한 상황에서 이전에 중요했던 것 등을, 한마디로 말해 우리에게 가장 유용할 가능성이 큰 정보를 가장 빨리 머릿속으로 불러낸다. 나아가 맥락 의존적인 기억은 빠르게 병렬로 탐색될 수 있다. 이것은 뉴런이 디지털 컴퓨터의 메모리칩보다 수백만 배 느리다는 점을 보상하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게다가 우리는 (컴퓨터와 달리) 우리 자신의 내부 하드웨어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기억 속에서 찾기 위해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에게 올바른 질문을 던지는 일이지, 뇌 속 특정 세포 집단을 찾아내는 일이 아니다.
이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확실히 아는 사람은 없다. 내게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추측은 기억 저장 위치를 알려주는 지도가 어느 중심부에 보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는 조회가 맞으면 우리 뇌의 기억들이 그냥 ‘알아서’ 반응하는 식으로 자율적으로 작동하리라는 것이다. 물론 찾는 것이 어디에 있는지 미리 아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과 일치하는 것을 뽑아내는 방식에서는 항상 ‘옳은 기억’이 반응하리라는 보장이 없다. 왜냐하면 제공하는 단서가 적을수록 기억은 더 높은 ‘적중률’을 보일 것이며, 결국 정말로 원하는 기억은 원치 않는 기억들 사이에 묻혀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맥락 기억에 고유한 단점은 신뢰성과 관련된 것이다. 인간의 기억은 뇌 속의 위치가 아니라 단서를 중심으로 매우 강력하게 조종되기 때문에 쉽게 혼동이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오류의 경향이 있는 기억과 추론 능력 사이에는 아무런 논리적 연관이 없다. 과거 사건들에 대해 완벽한 기록을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미래에 대해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는 것은 원칙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예컨대 컴퓨터에 기초한 기상예측 체계는 바로 이런 식으로 작동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과거에 대한 신뢰할 만한 자료를 바탕으로 미래를 추정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 체계가 지니고 있는 기억의 질을 떨어뜨린다면 그것은 예측을 향상시키기보다 오히려 훼손할 것이다. 나아가 기억을 왜곡하는 경향이 유난히 강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거나, 추론을 더 잘한다거나, 미래를 예측하는 예리함을 지니고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통계 자료를 근거로 상관관계를 따지자면 오히려 그 반대가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평균 이상의 기억력과 일반 지능 사이에는 상당한 상관관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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