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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머니 이야기 세트 - 전4권
김은성 지음 / 애니북스 / 201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피덩’은 이 책에서 ‘엄마’ 다음으로 많이 나오는 단어다. 함경도 사투리인
‘어피덩’은 ‘어서’라는 뜻이다. ‘어피덩’은 고단한 삶에서 매일 자연스레 내뱉어졌고, 서로를 다독이며 함께 하기 위해서도 건넸고, 혼란한
시기를 이겨내려는 기합 같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산업화 영향으로 더 생활에 뿌리내렸을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를 생각하며 이 단어가 재밌는 북청
사투리로만 생각되지 않았다. 이 책의 울고 웃는 모든 순간에 '어피덩'이 등장한다.
*1~4부까지 '어피덩' 대사 종합 모음*
삶이 어피덩어피덩 흘러도 하나의 작품이 탄생하기까지는 긴 세월이 걸린다. 영화를 찍고 싶었지만 잘 풀리지 않았던 작가는 『내 어머니 이야기』를 만화로 그리기 몇 해 전 엄마를 대상으로 홈 비디오를 찍는 작업을 했는데 그때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일제강점기에 함경도 촌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일본군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억지 결혼을 하고, 전쟁으로 부모와 생이별을 한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서 살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일가친척 중에 두지 않았고, 일본인이 세운 학교를 즐겁게 다녔으며, 결혼한 지 닷새 만에 해방이 되어 남편이 군대에 끌려나가지 않게 됐다는
이유로 해방된 게 너무도 싫었다는 엄마의 얘기도 ‘역사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인 역사와 엄마가 체험한 역사는 달랐지만, 주관적인
체험이 지닌 신선함이 있었다. 또 두 가지 역사는 어느 외길에서 만나기도 했으며, 그 길에서 엄마의 인생이 곤두박질치기도 했다. 만화를
그려나가면서 나는 해외 입양아가 자신의 부모를 찾았을 때 느꼈을 것 같은, ‘저 멀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질기게 이어져 있던 ’끈‘을
스스로에게서도 확인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때늦은 확인이었지만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아직까지도 고향과 부모님이 나오는 꿈속에서 놀라 깨는 이복동녀 여사에게 이 역사는 끝난
게 아니다. 이야기꾼이기도 한 이복동녀 여사의 인생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고 곁을 지키고 있는 작가에게 어머니(이야기)가 이대로 사라지는 게 몹시
안타까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처음에 작가는 전쟁으로 인한 이별과 피란으로 어머니의 얘기를 끝내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인생을 다 그렸을 때
현재의 어머니가 있게 된 원인과 배경들을 더 제대로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게 돼 계속 그림을 이어갔다. 어머니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은 조급해졌다. 어머니의 기억력이 갑자기 떨어지셔서 모두를 놀라게 한 일 중 3부 김장 일화는 내 눈물도 쏙 빼놨다. 6.25로
어머니와 생이별하는 장면도 눈물이 터져 나오는 장면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격동의 시기를 보낸 어머니의 이야기는 작가에게까지 이어진다. 군부
정권과 민주화 운동, 학생운동 시절을 보낸 작가의 삶도 어머니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작업은 꼬박 십 년이 걸렸다.
* 1부의 명장면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로 이어지는...)
* 2부의 명장면 (생이별의 순간)
* 3부의 명장면 (서로 어머니 되기)
* 4부의 명장면 (화해를 위한 그림굿)
나도 어머니 얘기를 써보고 싶은 적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이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냈는지 더 궁금했다. 6.25 전쟁 전에 양친을 다 잃은 내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셔서 옛날 얘기를 잘 하시지 않았다. 어머니의
과거를 처음 인상 깊게 들었던 기억이 난다. 맥주 반잔에도 힘들어하시는 어머니가 그날은 무슨 속상한 일이 있으셨던지 만취하신 채 불쑥 과거
이야기를 꺼내셨다. 내게 그 이야기는 은성 작가가 그랬듯 처음 듣는 ‘놀라움’이었는데, 어머니는 다음날 전혀 기억을 못 하셨다. 그 뒤부터 나는
어머니에게 옛날 얘기를 물어보곤 했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는 어머니가 처음 음악을 들으셨던 얘기다.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던 때 밤
심부름을 하다 어느 담장에서 들려오던 아름다운 소리에 발길을 멈추고 한참 들으셨다고 했다. 그게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라는 것도 모른 채 홀린
듯 들으셨다. 고생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본능적으로 알아챈 그 순간은 지극히 인간적인 순간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것을 음미할 시간도 생활도
아니었다. 우리는 그런 수많은 기억들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다. 그때도, 지금도, 앞으로도. 남의집살이를 하던 그 소녀는 먼 훗날 집에 하나둘
제 소유의 물건들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디오 세트를 장만했고 나는 그것으로 라디오와 음악을 들었다. 내 첫 워크맨도 어머니가 사주셨다.
안타깝게도 어머니도 나도 자신이 처음 들었던 음악을 기억지 못한다. 기억력이 대단한 이복동녀 여사는 축음기로 춘향가를 들었던 기억을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지금은 어떤 음악을 들으시는지. 나는 어머니에게 유튜브로 나훈아의 음악을 찾아듣는 법을 알려드렸다.
은성 작가가 어머니와 유머러스한 대화를 나누는 풍경은 삶의 소중함을 낱낱이 보여준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었고 이후 그 모든 순간을 사무치게 그리워할 거라는걸. “내가 죽으면 엄마가 그리워서 이 책을 읽을 것이다”라고 한 은성
작가의 어머니 예언은 적확하다. 작가만이 아니라 나도 엄마가 그리워질 때 이 책을 다시 펼쳐볼 것 같다. 세월에 따라 놋새, 복동녀, 보천개
사램, 동주 엄마 등 수많은 호칭으로 불린 은성 작가 어머니가 남 같지 않다. 몸에 이가 생길 정도로 어머니 간호를 했던 어린 시절 이복동녀
여사도 꼭 내 과거 이야기 같다. ‘어피덩’, ‘일없다’, ‘시이’(언니) 등 북청 사투리가 이 이야기를 친근하게 만들어서 더 그렇다. 이
이야기 속 많은 인물들에게도 연민이 간다. 시절 탓도 있었지만 그들이 다르게 살 수 있었을 순간들도 많았다. 이 책은 묻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질문을 건넨다. “당신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의 마음은 어피덩어피덩 달려가지만은 않겠다고 별빛처럼 반짝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