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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앵티아 (Science) - 과학에 불어넣는 철학적 상상력
최종덕 지음 / 당대 / 2003년 12월
평점 :
4월은 바람이 좋다. 가만히 눈을 감으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 세미한 소리를 내던 존재들이 내게 말을 걸고 내 손을 스치고 지나간다. 세상 모든 사물들이 자기만의 파동을 만들고 공기의 움직임을 통해 그 파동을 내게 전달한다. 바람의 길을 알려주는 하얀 벚꽃잎은 눈을 감으면 더 찬란하게 빛이 난다. 나는 가끔 바람을 통해 세상을 듣고 느끼고 만진다.
바람을 좋아해서 나는 바람을 공부했다. 이론과 실험, 시뮬레이션을 통해 공기의 흐름을 결정하는 지배 방정식을 알게 되었고 바람의 길을 예측하며 바람의 힘을 계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범위는 너무 제한적이라서 내가 풀 수 있는 문제는 극히 일부분이었고 금방 한계에 도달했다. 사람들이 보통 무한한 가능성과 전지전능을 기대하는 과학은 생각보다 그 끝이 멀지 않았다. 나는 과학의 원초적 모습에 접근을 시도했다. 경험하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을 대상으로 하는 과학이 아닌 철학과 통합되어 있던, 앎 자체를 추구했던 '시앵티아'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시앵티아는 문제를 쉽게 만들어 주거나 정답을 가르쳐 주지는 않았다. 시앵티아는 개별적 존재로서 해석하고 이해했던 존재들의 관계성을 부각시킨다. 또한 과학과 결별했던 철학적 사유와 질문과 상상력 등을 다시 과학의 영역으로 불러들여 문제의 난이도와 복잡성을 한층 높게 만들었다. 시앵티아는 누구나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만유 인력의 법칙에 '왜'라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도대체 왜 물질은 서로 끌어당기는 것일까? 물론 아무도 대답할 수 없다. 정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동안 과학의 영역에서 철저히 배제되어온 질문이다. 그런 식으로 과학은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 것처럼 스스로를 포장했지만 사실은 세상을 제한적으로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앵티아의 역할은 그 과학의 경계를 허물어버림으로써 인식의 확장과 과학의 발전을 선도하려는데 있다.
내가 바람이 좋아서 바람을 공부하게 된 것처럼 과학은 세상의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인해 시작되었을 것이다. 과학으로 인해 세상은 신비의 베일을 벗는 듯 했다.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는 것은 50년 전에는 신에게만 가능한 시선이었겠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가 딛고 있는 곳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다. 또한, 과학은 물질을 이루는 최소단위를 찾아 원자를 쪼개고 양성자와 중성자 안에 쿼크를 발견하기까지에 이르렀다. 인간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에서 벗어난 듯하다. 그러나, 시앵티아는 사실 아직도 인간은 세상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을 갖고 있음을 알려준다. 마치 바다 멀리 나가면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옛날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한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 두려움으로 인해 인간은 대답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세상만이 전부라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어 저 바다 너머를 상상하고 개척해갈 의지를 스스로 꺾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과학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인간 내부의 두려움의 문제이다. 그래서 과학의 경계를 만들고 그 경계를 넘는 것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과 언어로는 표현조차 힘든 창조적 상상력의 나래가 필요하다. 지금은 바닷가에서 첨벙거리면서 놀고 있지만 나는 바다 저 너머를 꿈꾸게 되었다. 닿을 수 없는 세계를 꿈꾸는 이유는 그 너머도 또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넓은 세상에서 스스로를 제한해 좁은 세상으로 사는 것은 자유롭고 싶어하는 인간의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다.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과학입니다."라는 광고카피가 유행했던 적이 있다. 현시대에 과학은 아주 긍정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철학과의 경계가 무너진 과학은 아마도 그 매력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것은 신비이며 그것은 모든 예술과 과학의 근원(The most beautiful thing we can experience is the mysterious. It is the source of all true art and science.)'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실 인간이 과학을 하는 이유는 세상을 조각조각 분해해서 그 정체를 밝히고 또한 그것을 지배하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라 좀 더 세상을 알고 이해하고 느끼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렇다면 신비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과학의 한계를 무시하거나 부정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그 경계의 영역을 넘는 순간은 이제 정말 아름다운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진짜 재밌어지려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