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관점
토미 테니 지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잠이 오질 않는다. 내가 잘못 들은 걸까? 아니다. 그럴 리가 없다. 분명 전에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음성과 다름이 없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일어나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따라 별들이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밤하늘을 올려다 볼 때마다 해변을 거닐 때마다 나는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던 하나님의 약속을 떠올리곤 했다. 꿈만 같던 약속이 이루어졌건만 하나님은 그 약속의 선물을 지금 스스로 버리라 명령하신다. 오랜 세월 하나님을 알며 나는 이제는 하나님을 의심할 아무런 근거가 없음을 깨달았다. 나의 어떠한 말이나 행동도 그의 약속을 깨뜨릴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꼭 그의 약속을 지키신다. 이번에도 분명히 그럴 것이다.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일은 없으리라.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지만 나는 하나님을 생각하며 마음을 굳게 했다. 그리고, 일어나 아들을 불렀다. "이삭아. 일어나거라. 같이 가야 할 곳이 있다."


아브라함은 이 부분에서 내가 따라갈 수 없는 인물이 되어버린다. 아들을 바치라는 명령을 듣고 마음 편하게 잘 수 있는 아버지는 흔치 않다. 그리고 그 명령대로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바보이거나 아니면 정말 믿음의 조상이다. 아브라함은 나를 좌절케 하는 인물이었다. 죽어도 그처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가끔은 믿음은 이성과 반대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믿음의 행동을 취할 때 이성의 기능을 마비시켜버려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는 그게 싫었다. 하나님은 분명히 자동로봇으로부터 사랑받는 것이 싫어서 인간에게 자유의지와 이성을 심어주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스스로 그 선물을 쓰레기통에 처넣어야 한다는 사실은 분명히 모순이다. 분명 아브라함도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로 선택했다. 나는 토미 테니를 통해 아브라함의 결정을 도왔던 아주 특별한 근거 한 가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관점'이었다.


토미 테니를 처음 만난 것은 'The God Chasers' 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아직도 그 책에 나온"Do you want me?"라는 하나님의질문을 가끔 내게 던져 본다.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 고민할 때 또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이리저리 분주하게 다닐 때 안타깝게도 나는 이 질문에 "네? 그래야 하나요?"로 대답할 때가 많았다. '하나님의 관점'은 왜 내가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원할 때 우리 삶의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일깨워주었다.


'하나님의 관점'은 정말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아빠의 팔에 들어올려진 어린 아이의 경험처럼 말이다. 그러나,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어쩌면 관점의 변화는 내 몸을 밝히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산제사로 나의 몸을 드리기 위해서 내가 경험해야 할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예배가 무슨 소용이 있는지 의심이 들 때가 있다. 예배가 제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교회에서 많이 하지만 너무 형식적이라는 느낌이 들 때가 많이 있다. 이렇게 매주 예배하는 것이 나에게 어떤 도움을 줄 것인가? 우리는 예배에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테니는 하나님의 관점을 갖기까지 예배하라고 우리를 격려한다. 어쩌면 우리의 예배는 나아갈 방향을 잃고 낮은 수준에서 멈춰버리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세상과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이야기 속에서 전체를 보지 못하고 그저 우리 주위에 일어나는 작은 일들에 압도되어 버린다. 예수님은 내게 능력을 주지 못하는 연약한 어린양이며 사탄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용으로 보인다. 세상 사람들이 용을 쫓아다닐 때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그러한 사람들을 따라다닐 때가 많다. 테니는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되었을 때 벼랑을 향해 달려가는 도마뱀 한 마리와 그것을 쫓아가는 많은 무리를 보게 될 것이라고 일러 준다.


토미 테니는 내게 예배의 가치를 가르쳐준다. 때로는 너무 일상적이고 형식적으로 보이는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준다. 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이야기해준다. 그래서 나는 테니의 책이 좋다. 테니가 책에서 언급하는 영점의 가치는 그의 책 자체 내에서도 드러난다. 하나님에 대한 관심, 예배에 대한 관심으로 나는 세상을 살기 시작해야 함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다. 산을 모래더미로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은 간단하다. 세상의 여러 가지 소리로부터 벗어나 나를 사랑하시는 한 분과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마음의 평안을 누리는 방법은 간단하다. 그것은 예배다. 하나님의 관점을 갖게 되는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예배를 통해 나는 세상을 간단히 이길 수 있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 방법은 간단하지만 그 길이 쉬운 길은 아님을 안다. 열정단속반에 의해 식어버린 나의 마음과 열정에 다시금 불이 붙어야 함을 느낀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아브라함처럼 되고 싶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물인 자유 의지와 이성 또한 버리고 싶지는 않다. 나는 가장 똑똑한 상태에서 가장 이성적인 상태에서 하나님을 선택하고 싶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각을 통해 가능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아브라함의 선택은 정말 탁월하고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아마도 아브라함은 그러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테니로 인해 나의 기도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전에는 부흥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이제는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하나님 없는 부흥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우리의 예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고 하나님의 관점을 가지게 해주세요. 우리의 눈을 밝혀서 우리의 온 몸이 밝아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인생은 쉽지 않다. 때로는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죽음을 향해 치닫는 것이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지나치게 빠르고 정신 못차릴 정도로 치열하다. 그러나 우리의 비명이 즐거운 비명이 될 수 있는 방법이 있음을 깨닫는다. 하나님과 함께 상승기류를 타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비명을 지르며 살고 있는 것 같지만 그 소리는 즐거운 외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에서 나오는 이런 감탄을 듣게 될 것이다.


'오! 신나는 인생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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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2006-02-28 22: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음성을 듣고 놀람과 갈등과 번민 등의 갖가지 약한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하겠지요. 그러나 로마서 4장 17절에 보면,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심을 그가 믿었다고 해요.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은 이성과 항상 상반되는 것일까요? 상반되는 듯하게 보여도 저는 믿음의 기초가 이성이라고 생각해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속성을 인지하는 이성을 먼저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거지요. 모리아산에 이삭을 데리고 올라가면서 사환들은 산 아래에서 기다리라고 할 때(정확히 몇 장인지는 모르겠음 창 20장~25장 사이), 아브라함은 <아이와 경배하고 함께 돌아오리라>라고 대답했어요. 이 대답이 사환과 이삭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이 아니고 그의 믿음에서 나온 대답이라고 생각해요. 당장은 하나님께서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게 무슨 이유인지 확실하게 모르나 하나님은 분명히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이>이심을 그가 믿었기에 산을 내려 올 즈음에는 다시 아이와 함께 하리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믿었고 또 행했던 거죠, 행동과 말로써요.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될 만치 대단한 사람인건 확실하지만, 우리가 죽었다 깨나도 도저히 발뒷꿈도 못 따라갈만큼 위대한 인물이라고는 성경에서 말하진 않는 것 같아요. 그도 그저 약하디 약한 평범한 한 사람이었을 뿐이었는데, 아주 조금 남달랐을 뿐이라고 생각해요. 만약 그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는데 100세에 낳은 아들을 바치라고 했다고 말 한마디에 덜컥 바쳤다면 그에게 믿음(?)의 점수를 훨씬 후하게 줬겠지만, 그는 평소에 하나님을 잘 알고 있었기에 믿음의 행위도 자연스럽게 뒤따랐기 때문에 설박사님같이 신실하신 분이 혀를 내두르며 도저히 못 따라갈 인물은 아니라고 봐요^^
설박사님 아버님께서 " 의겸애비야, 급해서 그러는데 너희들 전세 자금 좀 빼서 나한테 융통 좀 해주라." 하셨다면 설박사님께서는 불안해서 거역했을까요? ㅎㅎ 물론 제가 님의 집 사정을 제대로 모르면서 이런 비유를 해서 적절할지 모릅니다. 의겸이 할아버지께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기업 회장님쯤되신다고 가정한다면(그러니까 자금 능력이 충분히 되시는^^;;) 이사하는 수고야 따르겠지만 전세금 정도는 아버지를 믿고 융통해 드릴 수 있다고 봅니다. 왜냐면 다시 그 돈은 돌려 주실 거고, 어쩌면 이자까지 쳐서 더 좋은 집을 주실 수도 있으니..^^(여기서 효에 관한 건 좀 접어두고서라도요)
님의 리뷰의 주제인 하나님의 관점과 얼마간 차이가 나는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믿음과 이성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말하고 싶었고,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서 믿음이 약하다..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보다 뛰어난 게 있다면, 하나님의 속성을 아주 제대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믿음의 조상이 될 수도 있었다고요^^;
그리고 조상이란 건-우리가 도저히 못 따라 갈 존재가 아닙니다. 나의 모체가 되기 때문이지요. 나의 근원이 조상이기 때문에 조상이 할 수 있는 건- 나도 할 수 있도록 그런 유전인자가 흐르고 있다고 우겨 봅니다. 안 우겨도 돼요. 의겸이가 님을 쏙 닮은 것처럼 우린 조상을 닮게 되어 있다고요. 결론은 우리도 아브라함만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거죠! 아자!

설박사 2006-02-28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댓글은 추천할 수가 없을까요? ^^
진주님의 귀한 생각 나누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2006-03-07 06:0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