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이윤기 외 대담 / 민음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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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내가 알고 싶은 건,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며 사는 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펼쳐든 책인데, 너무 어마어마한 사람들만 잔뜩 들어있는 이책이 그래도 반가웠다. 소위 초고농축 먹물들의 이야기. 이성의 과포화가 빚어내는 그 쉴틈없는 지성의 향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나도 내가 누리는 사유의 틀이 무너지고 겁도 없이 나를 그들과 함께 두는 요상한 버릇이 생겨났다. 적절히 가공이 된 대화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그 무지막지한 지적 소산들은 부럽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대담... 그 말그대로 큰 이야기들이었다. 인문, 사회, 경제, 문학, 역사, 종교의 영역을 마구 넘나들며 펼쳐대는 그들의 이야기는 시종 나의 눈과 귀를 깨어나게 했으며, 일상에 쫓겨 잊어가던 커다란 담론들을 다시 일깨우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속에서도 쉽게 인정할 수 없거나 반박하고 싶은 내용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최창조의 풍수에 대한 접근들은 무척이나 새로웠고, 김화영의 작가와 글에 대한 생각들은 깊은 공감을 주었다. 사람들이 직접 나눈 이야기이다 보니, 특별히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겨나게 마련인데, 나에겐 특히 김화영과 김주환이 그랬다. 탁월한 그들의 사유의 폭으로 이문열과 정재서는 시종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 후에 그들의 저작을 꼭 읽어보고 싶다.

<세계의 문학> 100호 기념으로 출간된 이 단행본으로 인해 근래들어 비슷한 편집의도를 가진 책들이 속출하고 있다.(꼭 대담형식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시도들이 무너져가는 이나라 인문학의 위기를 돌파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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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4-05-2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읽으며 참 소중하게 받아들였답니다..
 
손님
황석영 지음 / 창비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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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의 글은 내게 늘 어렵다. 남들은 다 좋다고만 하는 그의 소설들이 내게 그렇게 어렵기만 하다는 것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면서도 책을 마치고 나면 무엇인지 무겁게 나를 지배하는 그것은 언제나 내가 그의 책을 다시 집어들게 하는 마력이다. 그것은 '오래된 정원'을 통해서도 가시지 않은 석연찮음이었는데, 이책을 통해 또다시 나를 헷갈리게 하는 것이다.

분단의 반세기를 우리는 또 아무런 분노없이 흘려 넘고 있다. 그래서 이젠 그만 외면하고도 싶겠건만 이렇게 시의적절하게(?) 다시 들추어내는 온갖 장르적 시도들은 언제나 아프기만 하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떠나지 못하는 이땅의 원령들은 이제 그 화해조차 새삼스러워해 할 것 같다. 커져만 가는 시간의 공백은 자꾸만 많은 것들을 잊어가게 한다. 그래서 애써 들춰보는 이러한 역사들이 내눈엔 발악처럼 절실하기도 하다. 하여, 한의 세월동안 우리가 그나마 쌓아왔어야 한 이해와 용서, 화해의 틀은 온데 간데 없고, 나는 또 슬픈 악몽을 그려본다.

어머니와 아이들이 함께 있는 것은 너무 행복하다 싶어 갈라놓고 서로 부르며 찾다 애가 타서 죽게 하라고 지령했다는 해리슨.. 아이들은 어머니를 찾아 시멘트 바닥을 기어다니며 울어.. 팔굽과 무릎이 다 까지고 피가 나고.. 아이들이 계속 물을 달라 보채고 울자 문을 지키던 보초들은 바께쓰에 휘발유를 떠다 주고.. 신발에 휘발유를 떠먹고 몸부림을 치는 아이들을 보고 구경하며 웃은 미군.. 이어서 안에 불을 지르고.. 아이들을 불에 타서 죽고 연기로 가득 차서 질식해 죽고.. 다시 거기다 수류탄을 던진 그 짐승들...

이런 증오의 현장만이 눈에 짠하게 들어오는 나를 또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원망을 해본들 이제 소용없을 것을 언제까지 이리 갇혀 나는 미워만 하고 있을 것인가? 많은 것들에서 벗어나고 싶다.

황석영은 이 한판 씻김굿을 통해 화해를 갈망했다. 그의 원령들은 스스로 갈 곳을 찾았으나 아직 너무 많은 혼들이 길을 몰라하고 있다. 통일이 되고 다시 오십년이 지나,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하고 있었으면... 100년 전 사람들이 서로 미워해서, 아파했다고.. 하지만 지금 그들은 편안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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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평전
최하림 지음 / 실천문학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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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싶다. 싶은 사람이 있다 김수영이 그렇다. 그는 정말 달나라의 장난같다. 나는 '풀'이란 시를 무척 좋아한다. 교과서에 나오는 시는 별로 좋아하게 되지 않지만 '풀'만은 예외였다. 언젠가 '젊은이의 양지'라는 드라마에서 종희(전도연 분)가 제 집안에서 '풀'을 소리내어 읊조리는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잠시 멍했던 적이 있다. 그 후로 난 '풀'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 시를 알면 알수록 점점 더 좋아지는 거다. '풀은 풀의 비애로서 인간을 헐겁게 한다' 난 이말이 참 맘에 든다.

고등학교때 동아리활동을 하며 김수영과 신동엽을 비교하는 프린트물을 엮은 적이 있다. 사실 그땐 사람으로서의 김수영이 아니라 교과서에 나오는 유명한 시인들을 연구하는 거라 하면서도 참 재미없었다. 그를 다시 알고 나서 그의 시들이 참 좋은 효과로 다가오면서 그가 나에게 무언갈 줄 수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책을 공교롭게도 '아름다운 집'이란 책과 같은 시기에 읽었다. 어찌보면 우연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나로서는 행운이 된 셈이다. 동시대를 살아간 두 사람... 가장 격정적인 반세기를 혁명적 지식인으로 살다간 두사람... 한명은 언론인으로 한명은 문학인으로 였지만 왠지 두사람은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참 다르다는 것. 그건 충분히 흥미있는 비교거리였다.

이책은 크게 두분으로 나누어 보면 전반부는 역사의 흐름을 충실히 따라가는 김수영을 보여준다. 후반부에서는 그의 작품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돕는다. 전반부에서는 주로 1921년 그의 탄생에서부터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그리고 이승만, 장면, 박정희 정권을 아우르는 그의 생애를 인간적인 세세함으로 따라간다. 서울에서 동경으로 다시 만주로 북으로 거제도로.... 이다지도 파란만장한 역사속 삶의 궤적을 인간 김수영으로 잘 응축해내고 있다. 실지로 해방이후 현대사에 대한 구체적 이해... 4.19에 대한 시각과 2공화국의 상황등에 대해서는 정말이지 눈여겨볼 만한 시각들이 발견된다.

후반부에서는 그가 서울에 다시 안착하면서 등단을 하고, 그의 문학인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활동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우리는 사실 그를 시인으로 알지만, 그는 시인이기 이전에 훌륭한 지식인이었고, 그의 사상들은 수많은 산문들을 통해 신랄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의 시세계또한 예외가 아닌데 '시여, 침을 뱉어라'에서는 그의 시와 삶에 대한 태도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김수영의 변증법 또한 눈여겨볼만 한다.

이책은 김수영이란 인물에 대한 평전이지만, 그 시기를 가늠하는 좋은 역사서로서도, 김수영에 대한 전기문으로서도, 김수영 작품에 대한 비평서로도, 또는 문학입문서로서도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는 훌륭한 구성이다. 개인적으로는 최하림이라는 지은이의 공이 가장 크다고 본다. 문장자체도 쉽고 유쾌했으며, 상당히 공감가는 표현들, 인식들을 많이 보여주고 있다. 읽으면서 너무 기분이 좋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이책에서 나오는 김수영의 작품들은 김수영전집1,2(민음사)에 거의 모두 실려있다. 비교해 가면서 읽었는데 정말 전집에서 그냥 작품으로 읽을때와는 또다른 감흥이 실려왔다. 꼭 같이 한번 읽어보길 권한다. 1968년 어이없는 교통사고로 김수영은 갔지만, 그해는 전세계가 혁명의 불길에 사로잡힌 해였다. 이 공교로운 역사의 우연은 어쩌면 그에 대한 애달픔이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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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의 수도원 기행
공지영 지음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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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랜 기다림이었다. 나는 공지영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라고 당당히 처음으로 이름올려졌던 작가이고, 그의 소설은 나의 고딩시절을 온통 장악한 세계였다.
그런 그가 다시 돌아왔는데, 다소 의외였다. 수도원기행이라니. 나는 그가 유물론자인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가 좋았고, 그의 소설이 좋았고, 그 소설속의 인물들에 이끌렸던 것 같다. 그런 그가 수도원이라니.

그러나, 유물론 때문에 신을 거부했고, 다시 18년만에 성당에 섰다는 공지영은 짐짓 성스러웠다. 그가 다시 돌아가 그자리에 안착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그를 아로새겼을까. 이해할 수는 있을 것 같았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나를 사로잡은 봉쇄수녀원 안의 수녀님들. 하나의 의문을 넘어선 경외심이었다. 모든것을 각오하고 스스로를 가둬넣은 그들. 그들은 스스로를 평생동안 가둠으로써 얻고자 한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공지영의 남편의 염려도 있었지만 그래도 내가 안심한 건 요즘같은 세상에도 수도원이 아직 춥고, 그래도 젊은 사람들이 오간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안에 살고있는 영혼들의 아름다움... 어린아이 같이 너무나 맑은 눈빛을 가지신 아르정탱의 수녀님들의 사진은 왠지 모를 위안이 되어준다.

솔직히 공지영이란 이름값 앞에서도 이책은 내게 큰 감흥을 주진 못했다. 어쩌랴, 교회라곤 초코파이에 눈이 멀어 끌려다닌 군시절의 기억이 전부고, 앞으로도 다시는 갈 생각이 없는 나인걸... 개인적으론 최영미의 '시대의 우울'을 딱 10배 정도 더 추천하고 싶다. 하지만 공지영은 나를 교회로 성당으로 신앞으로 이끌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내 영혼의 안식은 소복이 내려준 것 같다.. 그게 그저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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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
레기네 슈나이더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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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은 '오래된 미래'나 스콧니어링,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을 적절히 짚어내면서 소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한다. 독일사람들의 인터뷰나 수기를 엮어 만든 이책은 그래서 더욱 생생한 삶의 단편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소유라는 것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공허한 개념인지를 풍성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소유라는 개념, 혹은 소비라는 개념은 자본주의의 태동과 함께 가장 권장되는 미덕일 수 밖에 없었다. 소비가 있어야 생산이 있고 이를 통해 발전의 역사를 일궈내어 온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근래들어 이러한 소비에 대한 여러 새로운 인식들이 불궈져 나오고 -실지로 이러한 변화들은 '소유의 종말'등을 통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새롭게 소박함의 미덕을 사람들에게 내세워가게 된다.

소유는 또 다른 소유를 불러들인다. 소유가 필요에 의한 최소한의 욕구가 아니라, 소유라는 행위자체가 즐거움이 되고, 유희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끌려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끊임없는 순환고리속에서 헤어나오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소유가 주는 즐거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더이상 소유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없음을 간파해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것이 소유에의 유혹이다.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현대사회에서 돈이란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언제나 삶의 중심을 소유에 대한 끝없는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아이디어와 열정에 의해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높은 삶의 질은 오히려 내적인 평온과 여유로움, 그리고 사람들과의 시간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리나'나 '바바라'의 수기는 그런 점에서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데 이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나아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단순히 소비의 절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져가야 할 삶의 자세나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너무나도 현실적인 증언말이다. 과연 소박하다는 것은 단지 소비를 줄이고 궁색해지는 걸까? 소박함이란 더이상 돈을 적게 쓰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에게 있어 소박함이란 조금도 어려온 일이 아니다. 그 소박함으로 오히려 지갑이 두툼해질 뿐이다. 이미 100억을 소유한 사람이 하루에 1000원씩만 쓴다고 100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소박함'이란 우선 가진 것을 내놓고 남과 나누는 행위를 이른다. 진정으로 소박하다는 것은 돈을 많이 쓰고 적게 쓰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필요한 것만 갖고, 나머지 것들을 혹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변과 나누는 행위가 덧붙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는 '새로운 소박함'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온전한 자기 것이 어디있을까? '제가 만약 가나에서 전축 한 대를 샀다면, 그것은 결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나누어 써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 독일에서 전축을 사면 그건 오직 저만의 물건입니다. 제가 기뻐하게 될 지 그렇지 않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레기말드의 이 말은 과연 진정한 소박함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지 않았는가? '진정한 부는 소유 그 자체가 아니라 이로움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주어지는 행복은 없다! 행복은 언제나 자신의 두 손과 땀과 열정과 정성들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몫은 언제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큼이면 충분한 것이다. 오늘의 그 행복과 그 행복의 나눔을 이책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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