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 9.11 테러와 이슬람 이해하기
이희수.이원삼 외 12인 지음 / 청아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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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며칠전 신문에 한 이슬람 국가의 여성차별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그 나라에서는 여자가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판단될 때 이른바 명예살인이라는 것이 자행된다고 한다. 그 기준도 불분명한 이 괴상한 관습으로 아버지가 딸을 오빠가 동생을 서슴없이 살해하고도 죄책감조차 갖지 않는 그 종교적 믿음이 놀라웠고, 그런 자들에게 길어야 1년, 보통 3~4개월의 가벼운 처벌을 안기고도 이 관습을 은연중에 허용하는 그 나라의 사법체계가 놀라웠다. 단적인 예지만, 우리가 흔히 접하고 알고 있는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들이 대개 이러한 것이었다. 언론이나 여러매체를 통해 우리가 그동안 접해온 이슬람은 다분히 호전적이며, 여성의 권리를 억압하며, 하루에도 몇번씩 성지를 향해 예배를 하는 다소 비효율적인 국가로 인식되어 있곤 했다. 현대사의 굵직한 전쟁과 테러의 중심엔 이들이 있었고, 그들에 대한 왜곡의 틀은 공고해져만 왔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그들은 지구촌의 골칫거리요, 분쟁덩어리였다. 허나 9.11이라는 한차례의 거센 폭풍을 맞으며 세계는 이들을 다시 주목하기 시작했다.

 

책을 통해 퍽 놀란 것은 이슬람이 이렇게 광대하고 엄청난 세력이었나 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지도로만 보아도 거의 세계의 반이라 해도 될 만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이미 이슬람은 그 세를 떨치고 있었다. 10억을 헤아리는 그들의 존재에 대해 왜 여태 우리는 그렇게 무지했는가라는 자괴감마저 들 정도였다. 생각해 보면 그들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세계4대문명 중 세개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책의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이슬람지역의 찬란한 유적들 카르나크신전, 페트라, 아르케스궁, 메디나, 모헨조다로 - 등은 감탄을 넘어선 경외의 대상이었다. 지구상 어느곳 보다도 풍성한 문화를 일구었던 그들이 어느날부턴가 하나의 믿음으로 일어선다. 그 단결은 놀라웠고, 믿음은 강성했다. 하여, 그 포교의 과정을 시기하는 무리들은 그들을 헐뜯기 시작한다. 처음부터 포용과 화합을 내세웠던 이슬람의 시련은 그렇게 시작된다.

이교도를 처단해야 할 당위성을 그들의 경전에서 찾은 자들과, 이교도를 포용해야 할 당위성을 그들의 경전에서 찾은 자들과의 싸움은 과연 누가 옳은가? 은자 피에르의 혓바닥에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이라는 해괴한 사건의 발단으로부터 인류는 헤어나올수 없는 반목의 역사로 들어섰고, 그때부터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은 이미 분명했다. 시대를 달리하며, 가하는 자와 당하는 자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변한 것은 하나없다. 그러나, 한손에 칼, 한손에 꾸란 그 어느 이슬람인도 하지 않은 그 말이 어느새 이슬람을 전쟁광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언제나 가해자가 정의의 사도가 되고, 당하는 쪽이 악의 축이 되는 이 세계의 논리가 야속하기만 할 따름이다.

이 책에서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이슬람 여성에 관한 부분도 그러한 편견속에서 인식되고 있다. 얼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히잡을 푹 눌러쓴 여인들의 모습이 우리가 생각하는 이슬람 여성의 전부다. 그 이면에 지켜지고 있는 이슬람 여성들의 나름의 권리를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물론, 서두에서 밝힌 것과 같이 아직도 이슬람지역 중 많은 곳에서 여성에 대한 비인륜적 사고가 만연해 있는 것도 사실인 듯 하다. 하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여성에 대한 차별은 전 인류의 과오였다. 굳이 이슬람에 그 잘못을 전가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책에서 밝힌 것에 따르면 이슬람 여성들은 그 어느 문명권의 여성들보다 그들의 권리를 지켜나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슬람 시대 이전부터 환경적 필요성에 의해 이루어져오다 종교적 의미가 더해져 하나의 관습으로 이어져온 히잡의 존재 하나로 이슬람 여성의 인권을 제멋대로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직도 여성의 지위와 인권은 전세계가 다함께 고민해야 할 과제인 듯 싶다.

OPEC의 유래 또한 그랬다. 그저 석유파동으로만, 오일쇼크로만 기억하는 OPEC의 존재가 지극히 자위적인 투쟁의 결과였음을 이책은 밝힌다. 나는 자국의 자원을 서구의 석유재벌에 강탈당하며 그들이 당해왔을 분노의 단면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슬람 지역이 오늘날처럼 분쟁의 중심지가 된 데에는 선진국들의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음이 주지의 사실이다. 석유라는 인류 최대의 자원을 두고 또다시 그들을 덮쳐온 서구의 손길은 그 옛날 십자군의 잔임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터이다. 세계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지키고자 한 그들의 자위권은 눈물겹기만 한 것이었다.

 

정말 생소한 지식들.. 이자가 없는 이슬람은행, 오르지 않는 임대료, 독특한 장례의식과 같은 일련의 지식들 속에서 우리는 이슬람을 정말 다른 기준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은 그들의 정치와 생활과 종교가 일체화된 독특한 생활양식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그들은 그저 서구가 만들어놓은 이미지속의 그들일 뿐이다. 물론,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정치와 종교가 엄격히 분리된 우리나라와 같은 상황에서 그들을 전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맞다 하겠다. 허나, 그들은 그 이해못할 하루하루의 삶을 성직자도 없이 천년을 넘게 이어왔다. 이미 그것은 우리가 이해를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삶 그 자체일 것이다. 우리가 하루 세끼 밥을 먹는 것처럼, 당연한 것들을 굳이 따져들고, 시비를 가리려 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믿음과 일상이 일치되는 그들의 신성한 삶속에서 나는 작은 경건함을 얻는다.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꾸란의 가르침을 수억의 사람들이 지켜가고 있다는 생각을 해보자. 나역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잠시 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일생의 목표가 성지를 순례하는 것인 사람들과 우리는 같은 지구상에 살고 있다. 우리의 일생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리가 술과 고기에 찌들며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적어도 그들은 꾸란이 준 소중한 가르침들을 되새김질 한다. 그들은 종교에 얽매인 광신도들이 아니라, 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이야기하고, 어느 민족보다 축제를 즐기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들일 뿐이다. 이슬람에 대한 편견의 극복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의 삶을 사랑하려는 우리의 노력이다.

 

이슬람은 아직도 시끄럽다. 2,200만의 쿠루드족이 세계를 떠돌고, 코소보의 오랜 총성이 아직 멎지 않았으며, 독립군이 버젓이 반군으로 불린다. 보스니아, 아프가니스탄, 인도/파키스탄, 인도네시아, 알제리 역사가 이들에게 준 상처는 스스로 곪아 안으로 안으로 파고 든다. 끝도 보이지 않는 싸움들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들이 미국을, 영국을, 프랑스를 원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미 시위는 당겨졌다. 그들은 변하고 있으며, 세계의 커다란 물결에 서서히 적응해 가고 있다. 그동안 무수한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 겪어온 혼란들을 그들은 알라의 이름으로 추스르고 있다. 문제는 이제 세계가 함께 그들과 머리를 맞대야 할 때라는 것이다. 왜 그들이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지, 왜 그들이 추곡수매를 하지 않는지, 이제는 관심을 가져야 할때이다. 알라알라신을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가 계속되는 한 이슬람의 진정한 변화와 발전은 너무나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슬람은 그 시초부터 지금까지 화해와 용서, 절충과 합의, 포용과 화합,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평화의 다른 이름이었다. 공존을 해하려는 이들은 언제나 그들이 아니었지만, 피흘리며 상처입는 건 결국 그들이었다. 모든 것은 신의 뜻이라는 그들의 믿음은 때로 가혹해보인다. 그들이 스스로를 다독이며 헤쳐온 세월은 결코 만만한 무게가 아니었을 것이다. 잘못이 있는 쪽과 잘못이 없는 쪽을 때로 혼동하는 듯한 그들의 신을 나는 솔직히 인정할 수 없다. 허나 이 역시 신의 뜻임을 오늘도 의심하지 않는 그들의 삶을 나는 또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믿음이 옳건 그르건, 그들은 이 세상에 전인류와 함께 공존하리라는 신념을 잃지 않을 것이다. 그들에게 닥쳐올 또 다른 수많은 시련들속에서도 그들은 그들의 알라와 함께 의연할 것이다. 오늘의 계속되는 그들의 기도가 그들을 끝내는 지켜주는 사랑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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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문화예술 - 통합의 가능성을 꿈꾸는 KAIST 사람들 현대의 지성 100
최혜실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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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빈토플러는 <제3물결>에서 정보화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했다. 농업사회, 산업사회의 질곡을 넘어 새로운 세계는 정보의 소유관계에 따라 세계가 이해되고 작용되리라는 견해였다. 이미 우린 그 헤어날 수 없는 숙명(?)속에 들어와 있는 듯 싶다. 이전의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따른 사회계급의 형성과정과 권력의 이동관계는 이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다양한 정보의 유무에 따라 재편되고 있다.

이 보이지 않는 혁명 속에 디지털은 그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 혁명과 냉전시기를 거쳐 자본주의가 이른 종착은 더 많은 지식과 정보의 요구였다. 그것은 개개인의 이해를 넘어선 사회적 필연이 되고 있다. 이미 시장은 세계로 확장되어 있었고, 과학은 그 끝을 규정짓지 못하고 있었다. 지식 그 자체가 자원으로 치부되는 사회가 도래한 것이다. <지식의 지배>에서도 저자는 ‘이제 부는 지식이 결정한다’고 명확히 선언하고 있다. 인간은 그 방대한 지식의 활용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그 일을 대신하는 기계들을 제어하는 정보처리자로 둔갑하여, 그 거부할 수 없는 유혹에 푹 젖어 있다. 컴퓨터라는 필수품은 이제 TV만큼이나 친숙한 생필품이 되었으며, 인류는 이 전자회로의 덩어리로 ‘먹고 살 수’있게 되었다. 이른바 ‘디지털 정보시대’의 개막이다.

미래사회가 우리에게 주는 청사진이 언제나 장밋빛일거라는 기대는 최근의 각종 문제제기를 통해 보기 좋게 무너진다. 컴퓨터의 발달로 이제 떼어낼 수 없는 영상기술, 오락문화의 발전은 그 선전성과 폭력성으로 한계에 이르렀고, 이제 인간을 무자비하게 휘둘러대는 지경에 이르렀다. - 최근의 한 조사에 의하면, 뇌를 반복되는 폭력의 무차별한 수용은 도덕적 판단 기준을 무너뜨리게 된다고 한다. - 또한 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집중된 정보가 가져올 수 있는 그 막강한 권력의 위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다. 실지로 이미 디지털 정보들은 우리사회의 여론을 조정해가고 있고, 이 집단의 무자비함은 어떤 경우 개인을 완전히 매장시켜 갈 수도 있게 된다.

이는 디지털 매체의 그 신속성과 직관성으로 인해 기존의 인쇄매체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던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정보의 독점이 우려되는 시기를 넘어, 일개 기업이나 유능한 정보기술자의 손안에 세계의 안보가 위협받게 되는 시기를 맞게 되는 것이다. 제러미리프킨은 <소유의 종말>을 통해 이를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건 사람들이 친구를 잃어가고, 이웃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인간이 주위 세계에 적응하고 주변 사람을 이해하려면 일관된 참조의 틀이 있어야 하는데 이 틀을 형성하는 데 필요한 끈끈한 인간적 관계의 경험과 참을성 있는 주의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인간들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새로운 인격체의 등장이다.

무엇이 정말 진정한 행복인가? 이 화두는 이제 인류의 영원한 숙제로 남을 것이다. 최근에 세계 도처에서 등장하는 플럼빌리지, 오로빌, 떼제, 우드브룩, 토요사토, 핀드혼 등등 이러한 갖가지 공동체의 모습들은 바로 이러한 고민의 결과일 것이다.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고유의 가치와 속성들은 필연적으로 소통과 연대를 요구한다. 이제 그 소통의 매개가 인간 자체인지 디지털 컴퓨터 기술인지에 대한 판단의 시대로 들어선다. 선택은 계속되고 있다. 쉽게 결론 내려지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가 이론(異論)없이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의 행복 그 유토피아는 디지털 정보시대의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나무와 하늘과 땅과 벗이 되는 삶 속에 있을 것인가? 세계는 이미 컨베어벨트 위에 있다. 이 벨트를 돌리고 있는 것은 디지털이지만, 인간은 이 벨트를 멈출 수 있다. 오직 인간만이 멈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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