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보슬비 > [흔적] 너는 사랑이다
너는 사랑이다
박세희 지음 / 은행나무 / 2004년 11월
품절


애인에게-겨울이 올 때
 


겨울이 온다 애인아 다시
다시 겨울이 온다 그대
있는 곳은 안녕하신가 날마다
추운 바람이 창 밖으로 쓸쓸히 불어오고 십일월의
끝에서 헐벗은 나무와 텅 빈 거리를 등에 업고 겨울이
온다 그러나 나는
이제 곧 보석처럼 내릴 눈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릴 수
없다 밤사이 쌓인 눈이 어머니처럼
포근히 온 세상 감싸줄 때에도 나에게는
거친 눈보라만이 아프게 불어 닥칠 뿐

애인아
너, 없음으로-.쪽

제목을 붙일 수 없는 슬픔
 


태어나 단 한 번도 사랑한단 말을 한 적 없는 나는
불행하다


=>과연 사랑한다고 한번도 한적 없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쪽

바람이 분다
 


그대 없는 빈 자리
바람이 분다

떠난 사람 생각나
고개 돌린다

보고 싶은 마음을
편지로 쓴다

그냥 눈만 감아도
눈물이 난다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가 생각나는 시네요.

혼자 남은 가슴에
겨울이 온다-.쪽

제발
 


너를 사랑했던 마음들이
변하지 않기를

언제나
언제나 맑고 순수하기를
 
=>떠난 사랑에 대한 서로의 예의가 아닌가 싶네요.-.쪽

작별
 


울지 마라
너만 슬픈 게 아니다

나도 슬프다

=>아프냐? 나도 아프다...-.쪽

한때는 그랬다
 


한때는 그랬다 애인아
그대를 알게 된 그 날 이후
내 이 힘없는 다리가
나무 같은 굳건한 뿌리가 되어
그대 한 사람만을 욕심 없이
바라보고 사랑했던 아름다운
시간들 그러나 무슨 마음인지
너를 만난 처음의 그 날에서
일년이 가고 다시 일년이 가고
또 일년이 지나갈 무렵
그대 날 생각하지 않아 너로 인해 사는 나를
알아주지 않아 돌아보지 않아 그대
사랑함에 지쳐갈 무렵
세상 잠든 늦은 시간 홀로 밤기차를
탔다 시골 간이역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마을에 내려
천천히 그대 내 안의 그대
미련 없이 보내려 했다 그러나
그대 있었다 내가 가는 내 눈이 가는 모든 것들 앞에
그대 있었다 그대여 너는
왜 나를 놓아주지 않는가 나는
왜 너를 벗어나지 못하는가 눈으로도
흐르지 못한 눈물 가슴으로 마음으로
사랑으로 흘린 후 나는 다시
그대 있는 곳
멀어진 거리에서 여전히
나무 같은 단단한 뿌리로 너를
바라보고 있다 사랑한다 애인아
한때는 그랬다 사랑에 지쳐
사랑을 버리려 했었다

=>애인아, 하고 부르는 말이 좋네요.-.쪽

비 내린다


너 내린다

눈물 운다-.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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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봄눈 온다
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47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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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 온다

나무가 눈을 뜨면
저 눈은 자취도 없을 것이다.
나무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눈
자기를 깨운 것이
봄바람이거다 봄비거나 봄볕인 줄 알겠지.

나를 깨운 것은
내가 막 눈을 뜬 순간
내 앞에 있는 바로 그가
아닐지도 몰라.

오,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나를 바라보다 사라진 이여
이중으로 물거품이 된
알지 못할 것들이여.-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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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예전에 써 놓은 글들...
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구판절판


"-재미있다, 재미없다는 자네의 척도에 따라서는 다르지만, 애초에 이 세상에 재미없는 책 같은 건 없어. 어떤 책이든 재미있는 법이지. 따라서 읽은 적이 없는 책은 대체로 재미있지만, 한 번 읽은 책은 그것보다 재미있어 하는 데에 좀더 수고가 든다, 그저 그뿐일세." -14쪽

"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 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 -23쪽

"생물은 아이를 낳기 위해 사는 셈이로군. 그리고 그 아이도 아이를 낳기 위해 태어난 것이고. 하지만 그렇다면 씨를 보존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고, 살아 있는 것 자체에는 의미가 없다는 뜻이 되네. 생물이란 대체 뭔가?" "아무것도 아니야. 의미 따윈 없네. 그런 거야. 아니 - 그런 것이었네 -."

-332쪽

"하라사와, 나는 지난 전쟁은 옳은 싸움이라고 믿던 사람 중 하나일세. 패전을 알리는 천황의 방송을 들었을 때는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지. 하지만 지금 머리를 식히고 생각해 보면 역시 그 때는 이상했던 것 같아. 지금의 이 민주주의 세상이 옳다고 생각하네. 그렇게 보면, 정의라는 것은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 같은 게 아니겠는가? 이기면 관군이라는 말처럼, 강한 자가 어느 세상에서나 정의인 법일세. 그러니 -." -400쪽

"일상과 비일상은 연속되어 있어. 분명히 일상에서 비일상을 들여다보면 무섭게 생각되고, 반대로 비일상에서 일상을 들여다보면 바보처럼 생각되기도 하지. 하지만 그것은 별개의 것이 아닐세. 같은 것이야. 세상은 늘, 무슨 일이 있든 변함없이 운행되고 있네. 개인의 뇌가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일상이다, 비일상이다 하고 선을 긋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당연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도 당연한 걸세. 되어야 하는 대로 되고 있을 뿐이야. 이 세상에 이상한 일 따윈 아무것도 없어.-624- 6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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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물만두 > 내 가슴에 남은 시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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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1

소금 그릇에서 나왔으나 짠맛을 알지 못했다
절여진 생선도 조려놓은 과일도 아니었다
누구의 입맛에도 맞지 않았고
서성거렸다. 꽃이 지는 시간을
빗방울과 빗방울 사이를
가랑비에 젖은 자들은 옷을 벗어두고 떠났다
사이만을 돌아다녔으므로
나는 젖지 않았다 서성거리며
언제나 가뭄이었다
물속에서 젖지 않고
불속에서도 타오르지 않는 자
짙은 어둠에 잠겨 누우면
온몸은 하나의 커다란 귓바퀴가 되었다

쓰다 버린 종이들이
바람에 펄럭이며 날아다니는 소리를
밤새 들었다

-38쪽

그림 일기

그런 날이면 창백한 물고기에게 황금빛 수의를
땅이 내준 길만 따라 흐르는 작은 강물에게 거미의 다
리를
무엇에 차이기 전에는 아무 데도 가지 못하는 돌멩이
에게 이쁜 날개를
한 번도 땅의 가슴을 만져본 적 없는 하늘에게 부드러
운 손가락을
높은 곳에서 떨어져본 마음을
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마음 받아주는 두 팔을
높은 곳에 올라가기 전에
네 곁으로 가는 다리를
그러나 높은 곳에서 떨어져 이미 삐뚤어진 입술을
그 입술의 미세한 떨림을

떨림이 전하지 못하는 신음을
크게 그려줘 내 몸에 곱게 새겨줘
그런 날이면 망친 그림을
잘못 그려진 나를 구기지 말아줘 버리지 말아줘
잘못 그려진 나에게 두껍게 밤을 칠해줘
칼자국도 무섭지 않아 대못도, 동전 모서리도, 그런
날이면 새로 생긴 흉터에서 밑그림 반짝이는 그런 날
-42-43쪽

어제

나는 너를 잊었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내 집 유리창이 녹아버린다. 벽들이 흘러 내리고
시간의 계곡으로 나는 내려가고 싶다

어릴 적에는 어제를 데려다 키우고 싶었다
오 귀여운 강아지, 강아지들, 내
가 굶겨 죽인 수백만 마리

강철 종이의 포크레인으로
어제들의 거대한 공동묘지를 뒤집을까?
오늘 혼자 부르는 노래는 지겹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을 명명한다. 베껴 쓰기의 시간이
돌아왔다고

플라톤을 베낀다 마르크스를 베낀다 국가와 혁명을
베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베낀다
어떤 목소리는 바위처럼 단단하고
어떤 목소리는 바위에 떨어지는 빗물 같다

오늘의 메마른 곳에 떨어진
어제라는 차가운 물방울

무수한 어제들의 브리콜라주로 오늘의 화판을 메워야
한다
태양이 너무 빛났다. 어제와 장미 향기가 다 증발하기
전에
너를 그려야 한다-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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