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받는 오리엔탈리즘
에드워드 W. 사이드 지음, 성일권 옮김 / 김영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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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루쉰의 동생인 저우쭤린은 그의 글 『도쿄를 추억한다』에서 ‘동양의 비애’라는 말을 쓴다. 중국과 일본이 전쟁을 일삼는 상황속에서도 그는 양국의 예술가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통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목전의 관계에서 벗어나 영구적인 성질을 논한다면 양쪽 모두 선척적으로 서양과는 운명이나 환경이 전혀 다른 동양인이라며 동양을 일종의 운명공동체로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긍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양국 예술가들이 가슴 깊은 곳에 공유하고 있는 그 ‘동양의 비애’를 말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과연 서양과 동양의 구분은 무엇인가? 서양에게 동양은, 동양에게 서양은 과연 어떤 의미란 말인가? 과연 양쪽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단 말인가?

  이러한 원초적이고 근원적인 질문에 답하기에 이책은 다소 미흡한 면이 있다. 이 책은 에드워드사이드가 몇몇 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묶어서 엮어낸 책으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성실한 개론서와는 거리가 멀어,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체계적이고, 명확한 이해를 바라기에는 무리였다. 하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이 문제들을 오늘의 쟁점에 되살려 그 해결을 모색해 가고자 하는 저자의 시도는 무척이나 긍적적인 것으로 보인다.

 

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번째 부분에서는 자유주의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하여 세계화를 부르짖는 서구와 이를 동조하는 지식인 집단에 대한 비판과 이에 맞서는 진정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담론, 두번째 부분에서는 1948년 이스라엘의 도발로 촉발된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양세력간의 다툼의 역사와 화해와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고찰, 마지막으로 세번째 부분에서는 한 프로듀서와의 인터뷰문과 저자 개인의 성장기가 담겨 있다.

 

미국을 정점으로 하여 끊임없이 책동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그 올가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 밖에 없는 비서구지역의 서글픔..  에드워드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통해 오리엔탈리즘의 실체에 대해 다양하게 밝혀내고 있다. 서구에서 말하는 '동양' 또는 '동양적인 것'이란 동양의 실체에 가깝기보다는 서구인들의 입맛에 의한 편견과 왜곡으로 빚어진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다분히 흥미위주이며, 상업주의적이며, 침략주의적 차원에서 비롯된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여 억압하기 위한 서양의 스타일이라는 것. 하여 수백년에 걸쳐 동양의 역사와 성격 및 운명에 줄거리를 부여했다는 것도 그가 말하는 오리엔탈리즘의 모습이다.  발전을 위해서 언제나 ‘적’이 필요했던 서구의 역사에서, 그것은 동양에 대한 동료애적 관심이나 체계적이고 학술적인 연구와는 거리가 먼, 그저 침략하고 약탈하기 위한 명분아닌 명분일 뿐이었다. 거기에 자꾸만 살을 붙여 오리엔탈리즘은 거대한 편견의 집합체가 되어버렸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헌팅턴이나 네이폴, 프리드먼과 같은 사람들의 문제는 그들 개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서구라는 무의식의 공감대가 만들어낸 하나의 집단폭력의 광기다. 서구라는 이기(利器)화된 문명의 틀이 이미 그들에게 태어날때부터 씌워둔 ‘자본과 자유주의’라는 허울좋은 온상이다.

시오니즘을 과연 민족주의적 이상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해를 바탕으로 한 책략으로 봐야 할 것인가? 이 애매한 갈등의 바탕에는 사실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서구의 아랍세력에 대한 견제가 숨어있다고 본다. 이슬람을 계속해서 논쟁의 불씨로 남겨놓아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시오니즘은 더없는 훌륭한 명분일 수 밖에 없고, 언제나 그래왔듯 그들의 목적을 위해서, 이슬람은 여전히 위험하고, 잔인하고, 무지한 집단이어야 했다. 팔레스타인이라는 ‘태풍의 눈’ 때문에 정작 더 많은 고통을 겪고 있는 주위의 이슬람 국가들은 미워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적 앞에, 스스로 갈라지고, 상처입어 더욱더 커다란 수렁속으로 빠져든다. 분노는 분노를 낳고, 그렇게 화해는 자꾸만 멀어져 간다. 따지고 보면 어느쪽의 잘못도 아니다. 빼앗는 자들은 빼앗을 이유가 있고, 뺏기는 자들은 뺏기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모순된 상황을 만들어놓은 그들이, 이 모순된 상황을 이용하여 계속해서 모순을 만들어 가려는 현실이 그저 답답할 뿐이다. 분명한 건, 그들은 어떠한 해결책조차 고민해보지 않는다는 것이고, 언제나 해결은 당사자들의 몫인 것이다. 비행기가 폭탄으로 둔갑하여 제심장을 겨누는 오늘날에도 진정으로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이슬람의 도발이 아니고, 이슬람의 고요인 것이다.

마지막 부분의 그의 독백은 가장 깊은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현대세계의 가장 큰 담론으로 굳어져버린 그 논란의 지역 한복판에서 태어나 혼란한 생을 이끌어온 그의 성장사는 그대로 오늘날의 비극이다. 그가 그 어린시절 이유도 모른채 원망스러워 했을 양극의 세계는 지금도 유효할 뿐이다. 무엇을 위해서 서로를 할퀴며 싸워야 하는지, 그것은 피부색으로도 종교로서도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유란 것은 적당히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었고, 심지어는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으니까. 중립이 오히려 더 큰 죄일 수밖에 없었던 그의 삶이 택한 외로운 싸움은 인류의 평화를 염원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계속해서 널리 퍼져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9.11 사태를 통해 이슬람에 대한 관심히 높아지며 그동안 암암리에 묵과되어 왔던 이슬람세력에 대한 이미지(서구의 관점과 입장에 의한)가 얼마나 큰 허구였는지가 많이 밝혀졌다. 하지만, 아직도 역시 이슬람은 왠지 모르게 우리에게 호감을 주는 지역이 아니다. 어쩌면 오리엔탈리즘의 가장 큰 병폐는 스스로 동양이라 일컫는 우리안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서구가 만들어 서구가 증폭시켜온 오리엔탈리즘, 그 편견의 광기에 어느새 휩쓸려 버린 동양속의 오리엔탈리즘, 제민족과 제종교를 배반하고 서구의 앞장이가 되어버린 일부 이슬람 지도부속의 오리엔탈리즘, 이 성대한 잔치에 돌을 던지며 또 새롭게 펼쳐지는 ‘옥시덴탈리즘’이라는 편견의 틀. 언제까지 세계는 이 허황된 망령들속에 사로잡혀 있어야 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저자의 지적처럼 동양, 서양이라는 양비론적 구분을 넘어서 ‘다른 문화’라는 개념은 과연 유익한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결국 그것은 도리어 자기찬미이거나, 타자모독이 아닌가? 과연 문화의 공존과 공생은 불가능한가? 서로의 차이가 서로를 적대하는 구실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관심의 계기로 작용하고, 서로의 차이가 서로에 대한 우열의 구분이 아니라, 합리적인 교류의 필요성으로 귀결되는 그런 세계는 올 수 없는 것인가?  모두가 염원하는 ‘세계시민’의 꿈 말이다. 그것이 과연 이상일지, 허상일지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많은 이들이 허울뿐인 세계화를 부르짖는 오늘의 현실에서 이 말은 참으로 요원한 말로 들린다. 

구분은 헌팅턴의 주장처럼 어떤 문명간의 그 문화의 이질성에서 경계지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어차피 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그들이 왼손으로 밥을 먹어도 ‘적’인 것이고, 그들이 오른손으로 밥을 먹어도 ‘적’인 것이다. 친구와 적을 구분하는 것은 유치원에서 배워야 할 일인데도, 친구를 적이라 계속 우겨대고 제손에 움켜쥔 것이 아직도 작다고 투정하는 그 철없는 이들에게 왜 우리가 친구인지를 가르쳐주는 것. 손을 한번 내밀기만 하면 금방 알수 있는 그 쉬운 일을, ‘자본’의 홀림에 빠져 언제나 총을 내밀며 다가왔던 그들에게, 그들이 철없이 저지른 그 무수한 만행들을 일깨워주는 것. 서양이 동양을 자신들의 잣대로 제멋대로 제단하여 ‘오리엔탈리즘’을 상정한 것이라면 그 허황된 망령의 틀을 깨부수는 것이 우리가 천착해야 할 ‘오리엔탈리즘’이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제2의 십자군’이 되어버린 어리석은 서구에 보내야 할 일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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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
이윤기 외 대담 / 민음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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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내가 알고 싶은 건,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며 사는 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펼쳐든 책인데, 너무 어마어마한 사람들만 잔뜩 들어있는 이책이 그래도 반가웠다. 소위 초고농축 먹물들의 이야기. 이성의 과포화가 빚어내는 그 쉴틈없는 지성의 향연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새 나도 내가 누리는 사유의 틀이 무너지고 겁도 없이 나를 그들과 함께 두는 요상한 버릇이 생겨났다. 적절히 가공이 된 대화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그들의 그 무지막지한 지적 소산들은 부럽기 그지 없는 것이었다.

대담... 그 말그대로 큰 이야기들이었다. 인문, 사회, 경제, 문학, 역사, 종교의 영역을 마구 넘나들며 펼쳐대는 그들의 이야기는 시종 나의 눈과 귀를 깨어나게 했으며, 일상에 쫓겨 잊어가던 커다란 담론들을 다시 일깨우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속에서도 쉽게 인정할 수 없거나 반박하고 싶은 내용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최창조의 풍수에 대한 접근들은 무척이나 새로웠고, 김화영의 작가와 글에 대한 생각들은 깊은 공감을 주었다. 사람들이 직접 나눈 이야기이다 보니, 특별히 관심이 가는 사람이 생겨나게 마련인데, 나에겐 특히 김화영과 김주환이 그랬다. 탁월한 그들의 사유의 폭으로 이문열과 정재서는 시종 그들에게 끌려다니는 인상을 줄 정도였다. 후에 그들의 저작을 꼭 읽어보고 싶다.

<세계의 문학> 100호 기념으로 출간된 이 단행본으로 인해 근래들어 비슷한 편집의도를 가진 책들이 속출하고 있다.(꼭 대담형식이 아니더라도) 이러한 시도들이 무너져가는 이나라 인문학의 위기를 돌파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쓰였으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며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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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2004-05-20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읽으며 참 소중하게 받아들였답니다..
 
소박한 삶
레기네 슈나이더 지음, 조원규 옮김 / 여성신문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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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삶'은 '오래된 미래'나 스콧니어링, 헬렌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등에서 보이는 것과 같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폐단을 적절히 짚어내면서 소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제시한다. 독일사람들의 인터뷰나 수기를 엮어 만든 이책은 그래서 더욱 생생한 삶의 단편들을 제시하고, 그것을 통해 소유라는 것이 얼마나 상대적이고 공허한 개념인지를 풍성하게 증명해내고 있다.

소유라는 개념, 혹은 소비라는 개념은 자본주의의 태동과 함께 가장 권장되는 미덕일 수 밖에 없었다. 소비가 있어야 생산이 있고 이를 통해 발전의 역사를 일궈내어 온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근래들어 이러한 소비에 대한 여러 새로운 인식들이 불궈져 나오고 -실지로 이러한 변화들은 '소유의 종말'등을 통해 계속해서 제기되고 있다- 그것은 새롭게 소박함의 미덕을 사람들에게 내세워가게 된다.

소유는 또 다른 소유를 불러들인다. 소유가 필요에 의한 최소한의 욕구가 아니라, 소유라는 행위자체가 즐거움이 되고, 유희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끌려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끊임없는 순환고리속에서 헤어나오는 방법은 근본적으로 소유가 주는 즐거움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더이상 소유 자체가 기쁨이 될 수 없음을 간파해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은 누구나가 인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당연한 사실 앞에서도 쉽게 뿌리칠 수 없는 것이 소유에의 유혹이다. 책에서도 말하고 있듯이, 현대사회에서 돈이란 곧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극복한다는 것은 언제나 삶의 중심을 소유에 대한 끝없는 욕구에 의해서가 아니라,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아이디어와 열정에 의해 이끌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높은 삶의 질은 오히려 내적인 평온과 여유로움, 그리고 사람들과의 시간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다. '리나'나 '바바라'의 수기는 그런 점에서 가슴에 와 닿는다.

그런데 이책은 여기서 한 걸음 더나아가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여기서 빛을 발한다. 단순히 소비의 절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져가야 할 삶의 자세나 도덕적인 태도에 대한 너무나도 현실적인 증언말이다. 과연 소박하다는 것은 단지 소비를 줄이고 궁색해지는 걸까? 소박함이란 더이상 돈을 적게 쓰는 것이 아니다. 부자들에게 있어 소박함이란 조금도 어려온 일이 아니다. 그 소박함으로 오히려 지갑이 두툼해질 뿐이다. 이미 100억을 소유한 사람이 하루에 1000원씩만 쓴다고 100억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소박함'이란 우선 가진 것을 내놓고 남과 나누는 행위를 이른다. 진정으로 소박하다는 것은 돈을 많이 쓰고 적게 쓰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필요한 것만 갖고, 나머지 것들을 혹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주변과 나누는 행위가 덧붙여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저자는 '새로운 소박함'이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온전한 자기 것이 어디있을까? '제가 만약 가나에서 전축 한 대를 샀다면, 그것은 결코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다른 모든 사람과 나누어 써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여기 독일에서 전축을 사면 그건 오직 저만의 물건입니다. 제가 기뻐하게 될 지 그렇지 않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군요.' 레기말드의 이 말은 과연 진정한 소박함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도 그러지 않았는가? '진정한 부는 소유 그 자체가 아니라 이로움이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주어지는 행복은 없다! 행복은 언제나 자신의 두 손과 땀과 열정과 정성들로 만들어가는 것이고, 그 몫은 언제나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만큼이면 충분한 것이다. 오늘의 그 행복과 그 행복의 나눔을 이책은 말해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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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상스러움 - 진중권의 엑스 리브리스
진중권 지음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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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진중권이란 이름 석자가 내눈에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이 사람은 참 내게 각별한 의미가 된다. 그를 처음 만난 건 '미학오디세이'였지만, 그의 매력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건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나 '폭력과 상스러움' 같은 패러디 논평집(?)이다. 김규항과 더불어, 이른바 전투적 지식인이란 상징화된 부류(?)로 구별된 이들은 도통 점잔을 빼는 법이 없다. 그들의 그 시원시원한 독설과 카리스마가, 나를 이제껏 맛보지 못한 흥분으로 몰아넣는 것은 너무나도 황홀한 경험이다. 그래서 나는 이들이 좋다.

이책에는 '진중권의 엑스리브리스'라는 부제가 달려있다. 엑스리브리스란 우리말로 하면 '...라는 책에서'라는 뜻이란다. 즉 이책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인용'과 거기에 붙인 코멘트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는 잿빛 인문학의 문장들을 뽀얗게 먼지 앉은 낡은 책 밖으로, 상아탑이라는 도서관 밖으로 끄집어내 생동하는 삶과 맞물리려는 시도라고 지은이는 밟히고 있고, 이는 상당부분 성공했지 싶다. 그의 거침없는 독설과 함께 말이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상반되는 이들의 논리속에서 그들을 질타하는데 추호의 망설임이 없다. 시원시원하다 못해, 읽는 사람이 도리어 민망할 정도다. 이는 책의 서문에서부터 극명히 드러난다.

'.... 내글에 비난을 퍼부은 그 잡지의 독자들에게는 이 사건으로 인한 내 불쾌감이 해소될 때까지 하는 일마다 재수가 없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 ㅋㅋ 멋지지 않은가? 김규항이 참 대단하다 싶었는데... 김규항 저리가라다. 그의 독설은 통렬하다 못해 쩌릿쩌릿한 카타르시스를 내뿜는다.

진중권을 빛나게 하는 건 시인 노혜경씨의 말처럼 그가 참 윤리적인 인간이라는 점이다. 언제나 아닌 건 아니라고 과감하게 말할 줄 알고, 그가 내뱉는 말한마디에 책임을 질 줄 알고, 이리저리 재거나 계산하지 않고 그는 일단 부딪힌다... 그가 소유한 사유의 영역은 언제나 이땅의 가장 보편적인 담론들을 '상식'적으로 풀어내려 하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땅에서 그는 언제나 '미친놈'이어야 했다. 정말 너무나 당연한 것들이 이해받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당하는 어쩌면 질려버릴 것 같은, 포기하고 싶어질 것 같은 현실에서 허나 그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너무나도 당연한 그의 생각의 고리들이 눈물겹도록 반갑다. - 특히, 그의 동성애에 대한 입장('성' 편), 조선일보에 대한 입장('민족' 편), 이문열에 대한 입장('프랙털' 편)은 정말정말 속이 다 시원했다.

그는 계속해서 가고 있다. 끊임없이 민주노동당 당비 2만원의 책임을 다하며, 오마이뉴스 기자로 활약하며, 온갖 지성과 감성의 해부학적 구조가 영 해괴한 분들의 정신개조작업을 위해 열심히 열심히 그들을 씹어댄다. 그가 이책을 통해 씹어댄 사람들을 헤아리자면, 두손이 분주해진다. 그들이 한 말같지도 않은 말들을 묶어내면 바보사전이 될테다. 우리나라 지식인 중에 이다지도 한심한 인간들이 많다는 게 허탈해질 뿐이다. 이땅의 수구세력, 보수언론들은 어쩌면 그렇게 명확하게 바보같은 소리들만 그토록 뻔뻔스럽게 말할 수 있는 건지 정말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 답답하다 못해 이건 코메디가 되어간다.(p.216 참조) 미공화당 부시 후보의 연설을 담은 테이프를 부록으로 끼워파는 잡지(월간조선)가 이땅의 정론지로 대변되는 이 사회에서 하긴 제대로 된 상식을 지닌 이를 찾아낸다는 것 자체가 너무 소원한 일이긴 한 것 같다.

그는 말한다. '가끔 글을 쓰면서 이성의 스위치를 내리고 머리를 스치는 헛소리들을 떠오르는 대로 받아적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미친것이 정상적인 곳에서 정상적이려면 미치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 당신이 이책을 읽고 그의 논리를 상당부분 인정한다면 나도 기꺼이 당신을 '미친놈'으로 인정해 드리겠다. 그래 우리는 다들 미쳐가고 있다. 다만 방향이 틀릴 뿐, 그들은 저쪽으로, 우리는 이쪽으로. 택일하라.. 그대는 어느쪽으로 빌붙을 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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