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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계기를 잊었고, 사연을 잊었다.
사춘기 소년의 펄덕이는 심장으로 나는 그저 홀린 듯 빠져들었을 뿐이다. 그렇게 박삼중 스님이란 분을 만났다. 그 분의 책을 읽으며, 참 무던히도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사형수라는 낙인을 달고, 제 생을 갈아먹으며 그들이 쏟아붓던 그 무수한 참회의 풍경들, 그리고 그들이 갖는 질곡의 하루하루보다 더 가슴 절절했던 그 어머님들의 이야기들이 내 심장을 쉴사이 없이 할퀴었고, 그 후에도 그 스님이 지어낸 책을 두어권 더 읽으며, 헤어나올 수 없는 슬픔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열일곱 그 언저리의 나는 비로서 생명이란 것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가져보았던 것 같다. 사람하나를 죽이고 살리는 일은 하늘의 일이라 사람들은 믿는다. 허나 그 하늘의 일도 때로 인간에 의해 자행되어야 한다고 또 한편의 사람들은 믿는다. 나는 후자였다. 아무 생각없이 후자였다. 그러나 열일곱 이후의 나는 사람을 죽이는 모든 행위는 결국 살인임을 믿는다.
태어나면서부터 생이 자신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 이들, 한번도 원하지 않았지만, 자신앞에 이미 만들어져 구체화된 고난의 틀을 허물기에 너무나 약했던 이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한번만 내말에 귀를 기울이라는 절규가 허무한 메아리로만 되돌아온 이들, 잘잘못의 주체가 어이없이 바뀌어도 억울함을 호소할 곳이 없고, 가장 믿었던 이들이 가장 무서운 가해자로 다가오는 현실을 속수무책으로 감내해야 했던 이들, 이것은 과연 누구의 잘못인가?
유정의 상처를 헤아리며 우리는, 인간의 외적인 그 어떤 상처보다 더 깊고, 치명적인 인간의 내적인 상처들에 대한 심각성을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그 고통에 대한 이 사회의 무지가 그들에게 짐지웠을 더 큰 상처들, 악몽후에도 스스로를 내보이지 않고 안으로만 여미었을 그 큰 상처들을 그들은 체념과 분노속에 삭였을 것이다. 이 사회가 폭력을 다루는 방식, 범죄자를 다루는 방식이 또한 다르지 않다. 이 사회가 도처에서 가하는 모든 폭력들, 더욱더 억울한건 그 폭력에 대한 최소한의 저항조차 결국은 다시 범죄가 된다. 폭력에 저항조차 않고 당하기만 하면 결국은 바보가 되고, 심지어는 생명의 위협을 받는다. 무엇을 선택하란 말인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저 제 자신이 움츠러들 수 밖에 없는 이 어처구니 없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 도처에 널렸지만 한번도 이해하려 하지 않았던 아니 그 존재를 애써 부정하려 했던 이야기들이 너무도 생경히 다가온다.
지독히도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으면서도 지독히도 닮아있던 이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오늘을 평범하고 느긋하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커다란 일격을 날린다. 그 평범한 일상이 그들에게 안겼을 배신과 원망의 상처들을 나는 언뜻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몰랐다’는 말은 참 쉽다. 그 말은 이 세상 모든 잘못의 변명이 되지만, 또한 이 세상 모든 잘못의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아니 알려하지 않았던 사이, 제 심장에 열두번도 더 못을 박고 또 박았던 이들을 우리는 과연 어찌 어루만져야 할까?
용서. 그 큰 이름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사람들은 가끔 말한다. 어쩔수 없는 그래도 자꾸만 화가 나는 현실의 모습속에서, 그 큰 용서를 하겠다는 이들은 또한 언제나 다친 이들이었다. 여기 용서를 하겠다는 한 할머니를 보라. 용서를 하겠다는 사람이, 정녕 제 스스로도 다친 사람이었으면서도, 제발 용서하게 해달라고 애원하며 매달리던 그 모습을 보라. 그 할머니가 하려던 것은 어쩌면 용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살인마의 쓰레기 같은 삶속에서 분노만이 아닌 연민을 끌어내는 그 할머니의 눈물, 그것은 그대로 사랑이었다. 제 딸을 죽인 범인의 앞에서 떡 싸가지고 다시 오겠다는 할머니의 그 한마디가 쏟아져 나온 순간 이미 용서하는 자도 용서받는 자도 없고, 다만 인간들이 서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을 모두 덮어버릴 사랑으로 말이다.
용서보다 더 어려운 일은, 용서받는 것이라는 것을 소설은 윤수와 유정의 어머니를 통해 말하고 있다. 용서할 수 없는 일을 용서할 때의 받은 이의 가슴, 용서하는데 끝내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 아니 용서의 이유조차 깨닫지 못하는 이의 가슴, 이 두 가슴사이의 그 허망한 괴리속에서 하늘 같은 사랑과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허약함을 동시에 지닌 ‘인간’이란 존재의 크고작음을 통렬히 가늠해본다.
책속에서 우리는 참 많은 삶의 격언들을 얻는다. 사람은 70%를 신이 만들고, 30%를 부모가 만든다는 말, 위선보다 위악이 더 나쁘다는 말, 생명이라는 말의 뜻이 살아 있으라는 명령이라는 말, 돌이 빵이 되고 물고기가 사람이 되는 건 마술이고 사람이 변하는 건 기적이라는 말, 깨달음이 바탕이 되는 진정한 삶은 연민없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 사람이 삶을 배우는 데는 일생이 걸리고, 사람이 죽음을 배우는 데 또 일생이 걸린다는 말. 나에게 이 말들은 모두 하나로 들린다. 그것이 연민이든, 위선이든, 부모의 심정이든, 그 무엇으로라도 사랑하라는 말. 기적을 일으켜서라도, 일생이라는 긴 시간의 가르침으로라도 결국은 사랑으로 감싸안으라는 말로 들린다.
우리는 이책을 통해 정체가 불분명한 그 어떤 대상에 대한 무한한 분노와 스스로 눈감았던 이 땅 한켠의 이야기들에 대한 참회의 눈물을 얻는다. 분노를 폭발시키고 눈물을 쏟아보지만 해답은 쉽게 찾아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어줍잖은 위로와 훈계보다 이 소설은 더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한다. 책장을 한장한장 넘기며 자신도 모르게 쏟아져 나오는 한바탕 눈물의 씻김굿. 어둡다고만 생각했던 그 곳에 어떤 빛이 있을지, 거짓이라고 생각했던 그 말에 어떤 진실이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뒤늦은 각성은 그후에야 비로서 찾아온다. 이제 ‘몰랐다’는 말은 안될 것 같다. 더 많은 것을 ‘알기’위해 살아갈 내일이 비로소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들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