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 2005년,흑백TV가 추천하는 올해의 책.
<시>
박진성의 ‘목숨’은 참으로 사람을 짠하게 했던 진정성이 담겨져 있는 시집이었다.타인과의 병적 동일시를 통한 정신분열 가능성,이란 진단을 받고 ‘알프라졸람’과 ‘바리움’이라는 항우울제에 기대어 살아가는 시인의 삶.그가 쓰는 시는,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자의 어떤 절박한 몸짓 같았다.윤재철의 어느 시구절처럼 ‘생은 아름다울지라도,피 흘리는 꽃일거라고 생각했다’는,그 말이 어울리는..참으로 처절하게 아픈,그래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시집이었다.
김민정의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는 기존의 시 문법으론 읽히지 않는,매우 독특한 시 범주에 들어가는 시집이다.극단적인 학대와 폭력,의미없는 말의 지껄임의 연속 등을 통해,새로운 형식적 시도를 하고 있다.그래서 실은,쉽게 읽히지 않으나 기존의 관습과 틀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창적인 시도가 의미있었다 평가하고 싶다.
문지시선 300호 기념시집인 ‘쨍한 사랑 노래’는,일단 역사적인 하나의 기록으로서 의미가 있다.시의 위기,시가 읽히지 않는 사회로 접어든 요즘이지만 순수문학을 대변하는 시선이 300호를 넘어섰다는 것은 정말 의미가 있다.시집자체로서도 손색이 없는데,사랑을 테마로 각 시집에서 발췌한 시들은 언제 읽어도 참 좋다.그리고 덤으로 주었던 기념노트는,기억에 남는 나만의 시들로 한편씩 채워나가고 있다.
<소설>
윤대녕의 ‘호랑이는 어디로 갔나’ 는 윤대녕 소설의 터닝포인트가 될,의미있는 소설이었다.그동안 자의반,타의반 침묵으로 일관했던 사회에 대한 시선을 의미있게 드러낸 것이,작가 본인으로서나 팬의 입장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었다.주인공들이 머문 풍경들을 바로 눈앞에 펼쳐놓은 듯한 생생한 묘사,그리고 각종 물고기들에 대한 상식과 요리법,덤으로 제주에서 생활했을 작가의 내밀한 사생활에 대한 기록을 상상해 보는 것도 소설을 읽는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김숨의 '투견'은 무채색이다.하나같이 어둡고 음습하고 무섭기까지 한,잔혹함이 스며있다.근데 이상하게도 그 불편함이 불편함으로 다가오지 않고,어떤 짠한 감동으로 다가온다면,독특한 매력이지 않겠는가? 그녀의 소설은 진지하고 또한 정교하다.몽환적 현실을 더욱 몽환적으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현실의 실상을 더욱 확연히 보여주고 있는 독특함은,아마도 김숨만의 독특한 느낌,으로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아,그리고 김숨은 소설가 김도언과 한 방을 쓴다고 한다.
일본의 젊은 청년 히라노 게이치로의 ‘장송’은 가벼움이 판치는 요즘 소설 경향에서 참으로 이채로운 의식을 견지하고 있는 진지한 작가의 새 소설이다.역시나 진지한 한국작가 김연수와의 대담속에 숨어있는,그의 생각이 참 좋다.
“근대문학이 죽었다는 것과 소설이 죽었다는 것은 다르다.후자는 소설 장르 자체의 무효를 선언하는 것이고, 앞의 말은 근대는 끝났을지 몰라도 그 이후에 무언가 있을 수도 있다는 뉘앙스를 품고 있다. ‘소설이 죽었다’는 말은 앞으로도 있을 수 없다. 가령 종이를 열 번 떨어뜨릴 때 그 모습은 매번 서로 다르다. 그것이 현대 사회 내의 미묘한 차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인간 내의 흔들림과 잡음 등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고 그것이 바로 현실이다. 그것을 제대로 다루는 것은 소설로써만 가능하다는 믿음으로 글을 쓰고 있다.”
만만치 않은 가격과 분량이지만,일독할 가치가 충분히 있다.요즘 소설은 읽을게 없다,라고 말하는 분들에게 강력히 권해드리고 싶다.
<인문.사회>
흰 것의 어긋난 욕망! ‘일상의 파시즘’부터 ‘대중 독재’ 논쟁에 이르기까지 ‘파시즘’이란 말은 아직도 우리사회에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파시즘의 고목아래 아직도 살아남은 파시즘의 잔뿌리들이 남아 있음을 우리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그럼에도 우리는 ‘파시즘’에 대한 외피만을 더듬고 있었을 뿐,감추어진 속내는 사실 알 수 없었다.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파시즘의 정확한 속내를 알게 해주는 전문적이면서도 쉬운,잘 쓰여진 책이다.파시즘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파시즘이 취하는 겉모습에는 한계가 없다,곧,파시즘의 변신(형태상으론)은 무죄!
한 비판적인,그리고 실천적인 지식인의 삶을 뒤돌아보며,일그러진 우리 현대사의 단면단면들과 해후하는 것은,그 시대를 몸소 겪지 않은 사람으로서 일종의 예의이다.강준만의 말을 빌리자면 ‘리영희가 원한 세상이 이루어진다 해도 그의 책들은 계속 읽혀져야 한다.그런 세상이 누구의 피와 땀 덕분에 오게 됐는지 그것도 알아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1980년 광주 대량 학살 이후 리영희 교수가 구속됐을 때,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는 그를 '메트르 드 팡세'(사상의 큰 스승)이라고 묘사했다 한다.큰 스승과의 조우,분명 의미있는 것이리라.젊은 분들이 더 많이 읽게 되기를 바래본다.
<사진.산문>
“내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자신의 운명과 대결해 싸우고 있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이다.사진속의 슬픔을 간직하고 있는 그들이 내게 걸어와 눈물 흘린다.나는 허리를 굽혀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서러운 인생 얘기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비록 단 한 장의 사진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
마음으로 사진을 찍는 작가.그의 사진과 사람에 대한 이야기.한 그릇의 국밥같은 책.
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이라면,아주 반길만한 이 책.김화영 선생께서 진행하시고 엮으셔서 그런지 일단,신뢰가 간다.면면들도 다 관심이 가는 작가였고,그들의 솔직담백한 문학과 그들의 일상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했다.곶감 빼먹듯 내가 특히 관심가는 작가쌍을 중심으로,그들의 일기장을 훔쳐보듯,조금은 관음증적이게 몰래 천천히 읽어냈던 기억이 슬금슬금 떠오른다.
<스포츠.생태>
올 한해 박지성과 이영표의 경기를 볼 수 있어 행복했다.박터지는 스코어에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축구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 가장 큰 수확.그리고 프리미어리그를 조금 더 즐겁게,재미있게 볼 수 있는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이 책,상당히 실용적이면서도 재미있는 이 책.축구매니아라면 놓쳐서는 안될 책.피자 한 판 값으로 유럽축구를,알고 즐기며 볼 수 있다.
편하게 편하게만..에 길들여지면,우리가 진정 추구해야 할..인간의 근원적 가치는 묻혀버리고 방법론적인 기술진화에만 관심이 쏠리게 마련이다.정작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말처럼 이 책은,뜨거운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보내는 따끔한 경고장,상황을 더 비관적으로 보자면 최후통첩에 다름 아니다.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나와 그것(I-it) 이 아니라 나와 너(I-thou)의 범주로 끌어와야만 하는,평범하지만 중요한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소중한 책이다.
<교양>
올 한해 강준만 교수의 컨셉은,아마도 ‘교양의 대중화’ 가 아니었을까.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사전 시리즈와 한국논쟁 100,이 책들만 읽어낸다 하더라도 올 한해 독서를 갈무리 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분야의,폭넓은 지식들을 한곳에서 아우를 수 있게 해주었다.물론 조금 더 깊게 관심을 가지고픈 분야는 노력을 덧붙여야 한다.볼테르가 말했듯이 “나는 당신을 반대한다.그러나 목숨을 걸고 당신이 말할 권리를 방어하겠다”는 열린 사고를 가능하게 해주는 힘,교양과 논쟁의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