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여행하는 법 땅콩문고
임윤희 지음 / 유유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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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작가는 도서관과 사서가 없었다면 자신의 작업이 불가능했을 거라며 감사를 표한다. 저자는 공부와 연구의 공간을 내어주는 도서관의 매력에 끌려서 미국, 캐나다, 일본 등 세계 각지의 도서관을 찾아다녔다. 독자는 이 책에서 아름답게 지어진 도서관의 사진을 볼 수 있고, 적극적으로 정보를 찾아주는 사서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있다. 도서관의 ‘기능’이 본질적으로 정해져 있는 건 아니라지만 세계의 도서관이 이용자에게 전하는 다양한 ‘선물’을 보면서 독자는 한국 도서관이 어떻게 변해야 좋을지도 생각하게 된다. 한 ‘대상’에 대한 사랑과 탐구가 이렇게 성심성의껏 이뤄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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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과 회사의 본질 -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
김종철 지음 / 개마고원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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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 사건이나 세월호 사태처럼 유한책임 주식회사가 일으켰지만 제대로 책임지지 않은 비극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금융과 주식회사에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많은 사람이 은행의 서비스를 이용하거나 주식회사에서 일하고 회사의 제품을 구매한다. 온실가스 배출에 따른 지구 온난화 문제나 양극화 문제도 은행과 회사가 설립된 17~8세기 유럽에서 시작됐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법과 제도가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 추적한다. ‘신탁법은 영국 지주계급이 영지를 왕에게 빌리지 않고 직접 소유하려고 13세기부터 투쟁을 이어오다 17세기 말 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둬 제정되었다. 이 책의 핵심 개념인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는 신탁법에서 처음 나타난다. 영국의 귀족은 왕에게 토지를 빌려 영주 역할을 하다 사망하면 왕에게 토지를 되돌려 줘야 했다. 영국 귀족들은 자식에게 자신의 권리를 물려주기 위해 제3자에게 땅을 양도하면서도 땅에 대한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계약을 맺는다. 왕은 귀족이 죽어도 제3자에게 양도된 땅을 찾아올 수 없게 된다.  (고대 로마와 서구 근대의 공통점=배타적 재산권->제국주의->노예제. 차이점=서구 근대가 재산권과 계약권을 이종 교배한 점.)


저자는 17세기 영국 금세공업자들이 시작한 은행업’(2현대 금융의 기원’), 1855~1862년에 도입된 회사법의 유한책임제도’(1주식회사의 본질’), 2008년 금융위기를 초래한 월스트리트의 금융기법 레포(환매조건부채권)’머니마켓펀드’(4‘21세기 국제금융위기의 본질’)에서도 재산권과 계약권의 이종교배라는 아이디어를 발견한다. 저자는 또한 17세기 영국 명예혁명으로 도입된 대의제에서도 정치가들이 국민에게서 주권을 빌린 채무자이면서 주권을 독점하는 재산권자이기도 하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1684차일드사에서 발행한 은행권[아직 남아 있다니 책에 사진을 실었으면 어땠을까. 표지 디자인에 일러스트 형태로 활용했어도 좋았을 것 같다]이나 1837블라이 대 브렌트소송사건의 판결문, 1855년부터 도입된 회사법에 대한 당시 학술지 편집자의 의견, 2008년 금융위기를 일으킨 월스트리트 부외 금융 시스템의 모형 등을 분석하면서 현대 금융업의 본질을 추적한다. 그중에서도 2003내국세 세무청 대 레이어드 그룹 공공유한회사소송의 판결문은 주식회사의 본질을 정확히 정의한다. “[주식은] 계약권들의 다발 그 이상이다. () 이 권리들은 순수한 계약권이 아니다. 그것들은 회사의 자산에 대한 재산권은 아니지만, 회사에 대한 재산권이다.” 주식회사의 대주주는 1855~1862년에 도입된 회사법과 일련의 법원 판결(1837블라이 대 브렌트소송사건 등)로 의결권과 인사권 등 회사의 재산권을 누리면서도 문제가 생길 때는 채권형태의 주식보유자로서 책임을 면제받는다. 저자는 대주주가 책임이 적은 만큼 의결권이나 인사권 등의 권한도 내려놔야 한다고 말한다.


주식회사와 금융업이 초래하는 문제점을 해결하려면 근대적 인격 개념순환적 자아 관념으로 대체해야 한다(7로크의 인격-재산의 존재론’). 철학사에서 니체나 화이트헤드에 의해 극복된 근대적 인격 개념은 은행업이나 회사법에 그대로 남아 있다. 영국 금세공업자들은 고객들이 맡긴 예금보다 더 많은 돈을 더 높은 이자로 빌려줘서 수익을 얻지만 '뱅크런'으로 파산할 위험 또한 얻는다. 영국 금세공업자들은  뱅크런으로 은행이 망하는 걸 막으려고 영원히 죽지 않는 안정적 채무자 국가에 돈을 빌려준다(국채 발행). 국가가 은행에 돈을 빌릴 만큼 자금이 필요했던 이유는 근대의 팽창 정책으로 전쟁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국가가 은행에 빌린 돈과 그 이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갚아야 한다. 저자는 왕이 죽거나 한 세대가 지나면 기존의 채무가 사라졌던 근대 이전처럼,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근대적 채무의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6장에서 소개되는 기본자산제에서는 기본소득제사회적 지분제도와 다르게 개인이 채권자에게 빚을 지고 있어도 자산을 약탈당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자유를 지키고 불공정한 계약을 맺어 노동하지 않으려면 일정 정도의 자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회사법에 따르면 회사의 주인은 직원이나 경영자가 아니라 회사의 주식을 보유한 사람들이다. 기본자산제를 활용하면 개인이 협동조합에 자산을 출자해 회사의 주인으로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다. 회사의 직원들이 주인이 되어 회사의 대표를 뽑고 직접 책임진다면 무고한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고도 책임지지 않는 기업은 사라질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에게 줄 기본자산은 사회적 상속(자식 한 명 당 4억 이상 상속 금지)으로 마련된다. 저자는 플라톤의 법률이나 신라 시대의 정전제에서 기본자산제의 원형을 찾되 오늘날의 실정에 맡도록 제도를 보완해 설득력을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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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의 왈츠>에서 의사 슈크레타는 친구 야쿠프가 저지른 예기치 못한 살인을 눈 감아주며 우정은 정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슈크레타가 정의를 따르자면 친구의 살인을 고발해야 한다. "정의란 인간적이지 않아요"(슈크레타) 세상을 살다보니 "정의 밖에서 사는 느낌"이라고. 야쿠프의 살인은 야쿠프 본인도 모르게 일어나는 농담에 가까운 살인, 쿤데라의 '농담'이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의 뒷표지에 나오는 시인의 말을 보면, 시인 진은영에게는 우정의 의미가 슈크레타의 그것과는 상반된다. 진은영은 모차르트가 다른 사람들이 넘을 수 없었던 경계를 넘은 것처럼 친구가 탁월성을 발휘해서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가주기를 염원한다. 자신은 살리에르가 되도 괜찮으니 함께 경계를 넘어보자고. <우리는 매일매일>에 실린 '나의 친구'라는 시에는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그것을 믿자, 숱한 의심의 순간에도
내가 나의 곁에 선 너의 존재를 유일하게 확신하듯
친구, 이것이 나의 선물

새로 발명된 데카르트 철학의 제 1원리다.

  


문학의 정치성을 연구한 <문학의 아토포스>나 문학 상담과 시 쓰기에 관한 책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에서, 그리고 시인이 최근 번역한 실비아 플라스의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에서도 친구와 "단어와 단어로 맺은 우정"(심보선, <훔쳐가는 노래> 뒷표지)에 대한 강조를 읽을 수 있다. 내 마음을 읽고 친구와 시를 쓰며 '어둠'을 뚫고 나가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여기서 글을 끝 맺는다면 참 아름다울 텐데 조금 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정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고, 어느 쪽 얼굴이 더 많이 나타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연봉 9천만원을 받는 사람들의 시위(인천국제공항 사태), 행복 주택 반대 시위를 보면, 여기가 바로 아귀다툼이 펼쳐지는 지옥이다. 슈크레타식 우정 때문에, 산업 재해나 공장식 축산, 지구 온난화 등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별의 왈츠>의 끝 부분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면, 우정이 뭔지 잘 생각해보자고, 슈크레타 당신이 말하는 그게 진짜 우정이냐고 추궁할지도 모른다. 추악한 세상에서 추악한 채로 남는다면 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아니기 때문에 추악한 세상을 견뎌내기 위해 잘못된 우정을 소환한다. 


소설가의 진실을 믿을 것인가, 시인의 믿음을 믿을 것인가. 몇 주간 생각만 해오다 글로 써보았는데, 결론이 안 나고 고민은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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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향 집에 내려 갔다가 도서관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아무튼 시리즈의 비건, 외국어, 술을 빌려 읽었다.

  <아무튼, 비건>은 <채식의 철학>에 이어서 채식주의에 관심을 이어가려고 손에 집었다(<채식의 철학>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DFW)의 에세이집에 실린 '랍스터를 생각해봐'와 봉준호 감독의 <옥자>가 있다). 나는 현재 기준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그런데 왜 채식주의자의 글에 관심이 갈까. 우선 DFW의 '랍스터를 생각해봐' 각주에 적힌 주소를 쳐서 들어간 동물권 단체의 웹사이트에서 본 동물 가죽을 벗기는 동영상이 떠오른다. 또한, 고향 집이 시골이고 집에 여러 동물들이 있어서 김한민 작가가 말하는 '동물의 얼굴'을 기억하라는 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겠어서 고민이 된다.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개와 관련한 기억처럼, 형태는 다르지만 개가 죽임을 당하는 기억이 나에게도 있다.

  채식주의자들이 쓴 책에는 '언행일치'하려는 노력이 담겨 있다. 누군가는 독특한 취향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언행일치하려고 노력하는 작가의 모습을 지켜보는 게 흥미롭다(언행일치가 어렵고 드물기 때문에). 채식을 하려고 고군분투하며 열심히 애쓰는 모습은 <채식의 철학>보단 <아무튼, 비건>에 더 많이 담겨 있다. <채식의 철학>은 논리를 따라가는 철학서인 반면, <아무튼, 비건>에서 김한민 작가는 한국 사회에서 채식주의자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그 가운데서 어떻게 채식을 할지 구체적인 방법을 알려준다.

  김한민 작가가 '유럽파'라는 점은 생각해볼만한 문제다. 또한,<채식의 철학>과 <아무튼, 비건>의 목소리의 열정도 비교해볼만 하다. <채식의 철학>의 토니 밀리건이 육식주의자의 의견도 다루며 육식주의를 온건한 논리로 격파하는 반면, <아무튼, 비건>에서 김한민 작가는 육식주의자의 잘못된 편견을 환경 운동가의 열정적인 어조로 비판한다. 나는 그 열정이 좋았지만, 토니 밀리건은 열정적인 어조를 경계한다. 김한민 작가의 입장에서 한 문장 더 쓰자면, 한국 사회에서 채식주의자가 아주 적은 소수 집단이어서 열정적인 어조가 필요할 수도 있다.















  <아무튼, 외국어>는 조지영 작가가 배웠던 언어 중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공부하고 있어서 손에 들었다. <아무튼, 외국어>를 읽으면서 흥미롭다고 느낀 점은 작가가 외국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그런지 한국어 문장도 독특하다는 점이었다. 쉼표를 많이 쓰고, 문장 구조도 독특하다. 조재룡 교수는 <번역하는 문장들>에서 김승옥이나 배수아 작가의 번역투 문장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내 착각일 수도 있지만, 조지영 작가가 쓴 <아무튼, 외국어>에서도 외국어를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문장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책에서 조지영 작가가 좋아했던 한국 작가들의 목록도 읽을 수 있었다. 독서와 외국어 공부가 작가의 문장에 어떤 영향을 줬을까.

  참고로, <아무튼, 외국어>에서 영어 이야기는 마지막에 잠깐 나오고, 프랑스어(작가의 대학 때 전공), 독일어, 스페인어, 일본어, 중국어 이야기가 각 챕터를 차지한다. 그래서인지, 아무튼 시리즈의 근간 목록에 <아무튼, 영어>가 있다. 한국인 독자에게 영어는 책 한 권 정도의 분량을 확보할 만한 주제일 수도 있다. <아무튼, 외국어>는 여러 외국어를 '적당히' 배우는 작가의 취미를 다룬다. 조지영 작가는 아니지만 한국인들이 왜 영어에는 적당히 만족하지 못하는 지도 생각해볼만한 문제다. 영어가 그저 여러 외국어 중 하나였으면 좋겠다.




 











  <아무튼, 술>은 도서관에서 빌릴까 말까 고민한 책이었다. 김혼비 작가의 전작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를 먼저 읽고 싶었지만, 도서관에 없어서 빌리지 못했다. 비건과 외국어에 비해 술에 관심이 적다고 '의식적으로' 생각했지만, 나는 맥주를 한 캔씩 자주 마신다.

  웃음 취향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아무튼, 술>을 읽으면서 정말 많이 웃었다. <아무튼, 술>에는 웃음보다는 웃김이라 표현하고 싶은 진솔한 글이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웃김 속에 슬픔과 애환도 담겨 있다. 웃김과 슬픔, 그게 술의 특징 같기도 하다. 애주가이지만 주량이 많지는 않다는 점도 나와 비슷해서 공감이 갔다. 감히 말하자면, 이 책을 읽으며 풍류가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독일 아마존 베스트 셀러로 소개된 <어느 애주가의 고백>을 읽고 아빠에게 선물한 적이 있는데, <아무튼, 술>이 훨씬 좋았다. <어느 애주가의 고백>과 달리 <아무튼, 술>은 술을 권하는 책이어서 아빠에게는 전해 줄 수 없다.














  <아무튼, 비건>과 짧은 시차 속에 읽다 보니 <아무튼, 술>에 나오는 안주들이 눈에 밟히긴 했다(나도 고기를 먹으면서도). 또한, <채식의 철학>에서 토니 밀리건은 술 속에 담긴 동물 성분을 지적하며 완전 채식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 동물 성분이 담겼다는 술의 종류는 책을 들춰보고 확인해야 적을 수 있는데 책을 도서관에 반납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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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복 시인의 시론집 세 권을 읽었을 때 반복해서 나온 말이 글을 거창하게 쓰지 말라는 거였

는데, 그 글을 읽고 얼마 후 글을 쓰다가 초반부에 거창한 문장을 적어버렸다. 어제인가 그 표현을 지웠지만 꽤 많은 사람이 읽은 후였다. 내가 쓴 거창한 문장의 일부에는 '글로벌 자본주의 시스템'(너무 거창하다)이란 말이 들어갔다. 실수하지 않았다면 이성복 시인의 조언을 잊어버렸을 테니 좋게 생각하려 하지만, 부끄러운 마음도 적지 않다.

 







 


 

 

 

 

 

 

  이성복 시인은 글을 쓰는 기술보다는 '태도'를 강조했다. 좋은 태도는 한 권의 책만으로 기를 수 있는 것이 아니어서, 태도에 대해서는 잊지 않고 계속 생각해야겠다. "글쓰기에서 기본이란 '대상'과 '독자'에 대한 배려예요."(<극지의 시> p.135) 좋은 내용이 많지만 이 문장을 자주 생각한다(책 내용은 항상 금방 잊힌다. 그리고 곧 어리석어진다.) 이 문장이 특히 기억에 남은 이유는 내가 타인을 '깔보는' 굉장히 안 좋은 습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 이 문제에 대해 자주 생각하고 있다. 왜냐하면 타인을 깔보는 태도를 가진 글쓴이에게야말로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예전에 읽었던 '타자의 탁월성을 인정하라'는 말을 잊지 않으려고는 하는데, 타인을 깔보는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직 성찰이 아주 부족하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는 어려울 것 같지만 반드시 공부하고 싶다. 그리고 최근에 지인이 (고맙게도) 지적해줘서 내가 대화할 때 공격적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대화할 때 어리석은 태도를 보인 건 분명 공격성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해서 생긴 일이다. 소극적인 사람의 공격성은 냉소, 비웃음, 깔보는 태도 등을 통해 드러난다. 이게 좀 더 나아가면 우울증과 자살로 이어지는 것과 같다. 건강하지 못한 이 태도를 성찰하고, 공격성을 긍정적으로 풀어내야 한다.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대중에게 큰 희망이 없다고 보았다(반면,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극복하려 하는 랑시에르는 대중의 역량을 인정한다). 회사원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회사에 묶여 지내기 때문이다. 말그대로 '임금 노예'다. 짧은 여가 시간에 시간을 떼울 수 있는 건 휴대폰과 영상매체 등이다. 주된 관심사는 재산 축적으로 흐른다. 회사원 또한 여러 계층으로 나뉘는데, 정규직 중에는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달가워 하지 않는 이들이 많다(<현대성과 홀로코스트>에 따르면, 독일 나치는 유태인을 여러 역할로 나누고 차별 대우해서 유태인 지배를 좀 더 손 쉽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원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사회가 그렇게 생겨 먹었는데, 각자 도생하는 사회에서 개인들은 적응하려 노력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비난조의 글을 쓴다면 '독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것 아닐까? (무엇보다 회사원들은 고통받고 있고, 정말로 문제되는 구조와 회사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최근에는 퇴사 관련 책이 많이 나오고 읽히고도 있다.) 이성복 시인은 내가 아니라 타인을 아프게 하는 글은 쓸모 없다고 했다. 타인이 아니라 내가 아파야 한다고. 다른 얘기지만,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관점에서) 극단적으로 보면 알라딘 페이퍼를 쓰는 행위 또한 알라딘 마케팅을 돕는 자발적인 복종에 가깝다. 하지만 마케팅이든 뭐든 글쓰기 실력을 늘리려면 실수를 반복하면서 써야한다. 이러한 고민 하에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삶과 죽음>을 읽어보고 싶다.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나를 좋아하고 사랑한다." 좋아하는 책인 <이 작은 책은 언제나 나보다 크다>에 나오는 문장이다. 괴테 또한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곧 나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 문장이 떠오른 이유는 각종 인터넷 커뮤니티 보는 걸 그만 두고 TV 시청도 웬만하면 줄이자고 최근에 (다시) 다짐했기 때문이다. 위 문장은 '아름다운 걸 보면 의식의 균형을 얻을 수 있다'는 <아름다움과 정의로움에 대하여>의 내용과도 통한다. '인스타그램 감옥(insta jail)'이란 표현도 있지만, 나는 지금 TV 감옥에 갇혀 있다. 가족들이 항상 TV를 켜놓고 나는 그 곁을 지나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독립해야 한다. 또한 이 글을 밤 11시 넘어서까지 쓰고 있지만, 낮에 활동하는 사람이라면 10시 이후에는 전자기기에 열중하지 않는 게 '의식의 균형'에 도달하는 데 도움된다(너무 꼰대 같은 말인가).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이 내가 된다고 해서 좋은 것만 보고 살수는 없다. 딴 얘기 같지만 좋은 것만 보면 어리석은 정신승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철이 없어서 잘 모르지만, 인간은 죽고 병들고 타인의 고통 또한 외면할 수 없다. 아름다움이란 말에 긍정적인 것만 포함되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삶에 성숙하게 다가가는 것도 아름다움의 일부 아닐까. 이 문제와 관련해서 며칠 전 신문에서 읽은 글에서 배우고 싶은 사람을 만났는데, 그런 태도를 가지려면 얼마나 성찰해야하는 건지 모르겠다(임종진의 <떠났지만 '떠나지 않은' 친구>라는 글에 소개된 '안양숙' 님). 어쩌면 타인과 사물을 우선으로 두고 행동해야만 배울 수 있을지 모른다. 얼마 전 '서울국제도서전'에서 사서 읽은 나쓰메 소세키의 <춘분 지나고까지>에 나오는 내용이다. 내적으로만 성찰하지 말고, 실수할지라도 새로운 사람과 사물을 만나야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아무튼 나도 '스나가 이치조'처럼 고민만 하다가 얼마 후 여행을 떠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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