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 행위성의 예술
C. 티 응우옌 지음, 이동휘 옮김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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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디오게임은 게임의 일부일 뿐 전부가 아니다. 이 책을 미리 읽은 사람으로서 아직 읽지 않은 사람에게 이 말을 먼저 하고 싶다. 모니터로 하는 게임을 다루겠구나, 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보드게임을 가장 많이 다룬다. 비디오게임뿐만 아니라 바둑이나 체스, 클라이밍이나 농구 같은 스포츠도 다룬다.


  이 모든 게 게임인 이유는 무엇일까? 게임에는 지켜야하는 선(규칙)이 있다. 그 선을 넘지 않고 행동해야한다. 게임 참여자는 게임이 가리키는 특정한 '행위'를 탐험한다. 여러 가지 게임들은 그 게임만의 독특한 규칙으로 게임 참여자에게 여러가지 행위성을 체험해보도록 한다. 이러한 점에서 게임은 '행위성의 라이브러리(저장소)'이다. 저자는 각 게임의 독특한 행위성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인 게임 예시로 설명한다. ('행위성의 라이브러리'는 '사회성의 라이브러리'라는 개념과 함께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책에 나온 게임 중 관심이 갔던 보드게임:


  수화(Sign) by Kathryn Hymes, Hakan Seyalioglu // p.10

  모던아트(1992) by Reiner Knizia // p.182

  루트(Root: A Game  of Woodland Might and Right) // p.277


  관심이 갔던 게임들을 직접 해보고 어떤 행위성을 경험할 수 있는지 적어보았다면 더 좋은 독후감이 됐겠다. 각 게임 옆에 적어놓은 페이지를 읽어보면 저자가 직접 게임을 해보고 어떤 행위성이 경험했는지 알려준다. '수화'라는 게임은 책 전반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언급되어서 꼭 해보고 싶다. 저자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게임이 아닌가 싶다.


  여러가지 게임으로 여러가지 행위성에 참여해보려면 한 가지 게임에 중독적으로 빠져드는 게 좋지 않을 수 있다. 물론 바둑이나 체스 같이 끝없이 수준이 올라가는 게임에 길게 빠지는 것과는 다른 문제다. 게임을 '긍정적'으로 다루는 이 책에서도 중독성 게임에 대한 비판적 언급이 중간에 짧게 한번, 그리고 맨 마지막 장 즈음에서 길게 다루어진다.


  중독성 게임은 주로 온라인 게임에서 나타난다. 저자는 이러한 게임 디자인에 반대한다. 중독성 온라인 게임은 '디자인 트랩'(책 제목. 이 책에서 언급되는 개념은 아니지만 비슷한 생각이 나온다)을 게임 속에 적용한다. 게임 디자인으로 유저에게 덫을 놓는다. 이건 심리적 덫이기도 하다. 


  한국 온라인 게임이 세계에서 가장 잘 구현하는 특징이다. '유희적 루프(ludic loop)'(p.147)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출석 보상 시스템(매일 게임에 접속하면 보상을 준다. 매일 게임 속에서 어떤 퀘스트를 깨거나 몇마리의 몬스터를 잡으면 보상을 준다), 확률형 도박 시스템(유저는 과금을 해서 도박을 하는데, 작은 확률로 아이템이 업그레이드 된다)은 주로 온라인 RPG 게임에 적용된다. 

  

  RPG 게임이 아니더라도, 가령 온라인 FPS 게임이더라도 대부분의 온라인 게임은 '랭크 시스템'이 적용된다. 유저는 그 게임 자체가 중독적이지 않고 심지어 미적인 플레이가 가능하더라도 '점수' 올리기라는 '가치 명료성'이 뚜렷한 세계에 중독될 수 있다. 책의 중요 개념으로 표현하면, '분투형 플레이'가 가능한 게임이더라도 랭크 시스템은 '성취형 플레이'를 강제한다. 결말이 없는 온라인 게임에서는 과금 유도를 위한 디자인 트랩이 있다. 중독성 게임은 유저의 '행위성'을 파괴한다고도 볼 수 있다.


  세상의 '게임화' 또한 저자가 경계하는 부분이다. 이 내용은 책 마지막에 나오는데 지적으로 굉장히 흥미롭고 세상을 살아가면서 도움이 되는 말들이다. 가령 운동 어플리케이션이 게임적 요소를 도입했다고 해보자. 어플에서 달력이 나오고 '만보' 이상 걷거나 어떤 운동 세트를 완료하면 보상을 얻는다. 이게 운동을 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시스템에 과도하게 몰입하면 운동을 하면서 얻을 수 있는 인간적 요소들을 놓칠 지도 모른다. 회사의 성과 시스템, 학교의 학점 시스템, 수능 제도 등에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이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시스템의 참여자이기에 당연하게도) 학점이나 수능 점수를 높이느라 점수 받기 쉬운 과목을 듣고 교육적 가치를 놓친다.


  이러한 게임의 부정적 요소들이 책에서 길게 다루어 지지는 않는다. 책에서는 다양한 게임을 예시로 들면서 해당 게임이 어떤 행위성을 드러내는지 주목한다.


 저자는 모더니즘 예술이 해당 예술의 형식적 가치에 주목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게임을 옹호한다. 가령 게임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비평하거나 게임이 세계를 얼마나 잘 '재현'(예술 비평에서 리얼리즘이 떠오르는) 하는지에 주목하는 게임 비평의 흐름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게 게임 자체의 형식적 특징은 아니라고, 다양한 게임들이 제시하는 행위성에 주목해야 한다고, 저자는 주장하고 그게 아주 설득력이 있다. 이야기나 세계의 재현은 다른 예술 형식들이 더 잘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살펴본 가장 행복해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하나는 한겨레에 연재되는 음식 만화에서 작가가 가족들과 다양한 음식점을 찾는 모습. 다른 하나는 이 책에서 저자가 배우자와 다양한 게임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이 게임의 경험은 굉장하다. 강렬하고 흡인력 있으며 좌절을 맛보게 하지만 또 놀랍도록 감동적이다. 하지만 이런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플레이어가 내면의 특별한 비밀을 공유하겠다는 목표에 일시적으로 몰입해야 한다. 바로 이 몰입이 게임의 특정 규칙들과 결합되면 아주 진한 실천적 경험에 도달한다. 「수화」를 플레이하는 것은 곧 언어를 발명하고 의미를 수립하는 구체적인 실천에 완전히 빠져보는 것이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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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 1월 1일부터 시내버스 요금이 300원 오르면서 대중교통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인상률은 21퍼센트이다. 말이 안되는 인상률이다. 버스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자가용을 타고 다니는 사람들만큼 힘이 있었다면 더 많은 말이 나왔을 것이다. 수도권에도 똑같이 오른다는데 사람들이 얼마나 저항할지, 그대로 관철될지 궁금하다.


  전기요금이 21퍼센트 오른다고 생각해보자. 그러면 사람들이 더 자원을 아껴써서 사회 전체적으로 자원을 더 적게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대중교통은 다르다. 대중 교통요금이 21퍼센트 오르면 사람들이 자가용을 더 많이 몰고 다닐 것이다. 사람들이 더 많이 자가용을 몰수록 더 많은 자원을 소모하고 대기오염도 심해진다. 대중교통은 요금과 상관 없이 같은 양의 자원을 소모한다. 사회적으로 더 적은 자원을 쓰고 대기오염도 줄이려면 대중교통 요금이 오르면 안된다. 대중요통 요금은 더 낮아져야 한다. 


  이러한 고민을 하던 중에 독일에서 9유로 티켓(한달 정기권)이 도입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꼭 9유로 티켓 같은 것이 도입되었으면 한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거나 부자증세를 하면 자금을 마련할 수 있다. 세금을 줄이고 시민의 부담을 늘리는 이번 정부에서는 힘들다.


  시골일수록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이동하기 힘들다. 내가 사는 곳에서는 하루 12대의 버스만 지난다. 한 시간에 한 대 꼴인데, 적어도 30분에 한 대는 지나야 한다. 시골 지역의 버스 이용과 관련해서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는 사례를 몇 가지 들어보고 싶다.


  이 글을 쓰는 오늘 시립교향악단의 공연이 있는데 공연이 9시 이후 끝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사는 곳의 막차는 공연장 근처에서 8시 40분쯤 지난다. 공연 티켓은 5천원으로 매우 저렴하지만, 공연을 보려면 차를 타거나 버스가 가는 곳까지 중간 지점까지 이동해서 택시를 이용해야 한다. 택시비는 최근에 올라서 정확하지 않지만 만 오천원 이상이다. 이러한 상황이 너무 화가 나서 글을 쓰게 되었다.


  시내버스 이용 관련해서 지엽적으로 보이지만 너무도 중요한 상황이 하나 더 있다. 지선-간선 문제이다. 나는 최근에는 가끔만 겪는 상황이지만 과거에 매일 멀리 이동해야 했을 때는 매일 겪는 일이었다. 지금 상황은 버스 하나로 줄기와 가지 모두 이동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림을 그리면 더 잘 설명할 수 있을텐데, 자동차 이용자들은 줄기로만 이동하지만, 버스 이용자는 가지까지 거쳐서 돌아가야 한다. 원래는 비용을 투입해서 가지로 이동할 버스를 따로 마련해야 하지만, 예산이 부족하단 이유로 시민들의 시간을 잡아먹는다. 그 가지에는 사람이 적게 살아서 아무도 타지도 내리지도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 가지를 없애자는 게 아니다(가지에 사는 사람들도 이동권이 있다). 그 가지를 거쳐서 수백명의 사람들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상황이 너무 화가 난다. 속 터지는 상황이다.


* * * * *


  <기후위기와 자본주의>에 대중교통을 급진적으로 편리하게 만들자는 제안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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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모임에서 읽을 책으로 선정되어서 <이민자들>을 다시 읽다가 나비 잡는 남자, 나보코프에 대해 정리해보았다.


p.25-6. 나보코프 사진?


p. 58. 파울 베라이터는 공원에서 나보코프의 자서전을 읽는 란다우 부인에게 말을 건다. 

나보코프의 자서전 <말하라, 기억이여> Speak, Memory



제발트는 나보코프의 자서전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걸로 보인다.


<이민자들> p.210~214를 읽어 보면 막스 페르버가 스위스 몽트뢰로 여행간 시기를 추정할 수 있다. 막스 페르버는 1943년에 맨체스터에 왔고, 여기 온 지 이십이년이 흘렀다고 말한 시점에서 2년 전에 여행을 떠났다.

이민자 나보코프는 1961년에 몽트뢰로 이주했고 이것이 너무나 정확한 일치여서 좀 더 찾아보았고, 이 문제를 다룬 논문을 찾을 수 있었다.



이타카, 몽트뢰, 키싱엔은 모두 이민자 나보코프가 머물던 장소.


나보코프는 이타카, 몽트뢰, 키싱엔에 <이민자들>의 인물들과 비슷한 시기에 머물렀다.


소설 속에선 나보코프라고 언급되진 않고 나비 잡는 남자로 나온다. 시기 상으로는 막스 페르버의 어머니가 키싱엔에서 마주친 나비 잡는 남자가 가장 먼저이다. 두 번째는 암브로스 아델바이트가 머무는 이타카의 정신병원, 나보코프는 1940년대에 50년대에 미국에 머문다. 그 후 마지막 장소가 막스 페르버가 방문한 몽트뢰이다.


관련 논문

https://www1.cmc.edu/pages/faculty/LdelaDurantaye/nabokov_in_sebald.pdf


p.131/146. 이타카. This same Ithaca to which Ambros now retreats was where, a few years earlier, Nabokov, having recently emigrated to the US, revised the memoir that would become Speak, Memory.



p.220. 막스 페르버는 몽트뢰의 산에서 죽음 충동을 느끼는데, 나비 잡는 남자가 지금쯤은 산에서 내려가야 한다며 그를 구해준다. As noted in connection to the preceding tale in The Emigrants , in 1965, Montreux’s Palace Hotel housed Vladimir Nabokov and his wife (the couple had moved there in 1961 and were to remain there until Nabokov’s death in 1977). One of the reasons Nabokov chose the locale was for ease of access to fi ne butterfl y-hunting areas



p. 271-2. 키싱엔 장면에서 "러시아 초대 의회의 의장인 무롬체프"란 표현이 그대로 인용된 것이 인상적이다. In Speak, Memory , Nabokov relates: “Near a sign NACH BODENLAUBE, at Bad Kissingen, Bavaria, just as I was about to join for a long walk my father and majestic old Muromtsev (who, four years before, in 1906, had been President of the fi rst Russian Parliament), the latter turned his marble head toward me, a vulnerable boy of eleven, and said with his famous solemnity: ‘Come with us by all means, but do not chase butterfl ies, child. It spoils the rhythm of the walk.’ ” 



나비학자 나보코프의 책

https://blog.aladin.co.kr/mramor/1082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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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나오는 '제인'의 말을 작가의 관점으로 읽어도 좋을까? <오만과 편견>과 <에마>에 제인이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각각 어려움을 겪지만 인물의 됨됨이는 꽤나 긍정적으로 그려진다. <에마>의 제인은 주인공 에마와 가까운 사이는 아니어서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오만과 편견>의 제인은 주인공 엘리자베스의 언니이다. 가족 구성원 중 가장 가깝게 지내는 언니. 제인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한다. <오만과 편견>에서 가장 '나쁜 놈'으로 나오는 위컴에 대한 진실이 밝혀졌을 때에도, "그녀는 오해가 있을 가능성을 입증하려고 진지하게 애썼다."(p.287) "착하고 한결같이 순수한 심성을 지닌 그녀는 언제든 정상참작의 여지나 오류 가능성을 강조하는 편이었다."(p.184) 


  이러한 태도가 너무도 지속적으로 언급돼서 나중엔 희극적으로 느껴졌다. 아무리 나쁘고 어리석은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그 사람을 최대한 호의적으로 바라보려 노력하는 제인. <위대한 개츠비>의 첫 부분에서 화자의 아버지가 해준 조언에 부합하는 태도이다. 제인과 같은 태도를 갖기 힘든 이유는 어딘가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받은 상처가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에도 기억으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이러한 상처가 있어. 너를 처음 보지만 그래도 너를 못 믿겠어." 우리 앞에 나타난 새로운 사람이 억울할 수도 있겠다. "나는 네 기억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야." 제인의 태도는 다아시에게는 성공하고 위컴에게는 실패한다. 다아시는 처음에 평판이 안좋다가 좋은 사람으로 밝혀지고, 위컴은 괜찮은 사람으로 여겨지다가 최악의 '나쁜 놈'이란 진실이 드러난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기 전에 상상한 제인 오스틴 소설 속 주인공은 좀 더 지혜로운 모습이었다. <에마>를 읽고 <오만과 편견>을 다시 읽으면서, 제인 오스틴 소설의 주인공(엘리자베스와 에마)이 완전하게 지혜로운 인물들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엘리자베스가 완전하게 지혜롭고 신처럼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아무런 오해도 안했다면, 아무런 갈등도 없었을 것이고 장편 소설이 될 수도 없었다. 에마가 아무런 허영심 없이 자기가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았다면, 그 사람에게 바로 사랑한다고 말하고 소설이 한순간에 끝나버렸을지도. 


  엘리자베스나 에마는 처음에 뭔가 오해하거나 누구를 사랑하는지 몰라서 안 좋은 길로 빠진다. 하지만 오해를 하더라도 <오이디푸스왕>처럼 파국을 맞으면서 깨달음을 얻진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해했던 사람을 다시 만나면서 "내가 저 사람을 잘못 봤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고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또는 내가 저 사람을 존경하고 사랑하는 줄 몰랐는데, 이러저러한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와중에 저 사람은 아직도 저 자리에 서있고 그 사람이 갑자기 멋있어 보이고 "내가 저 사람을 사랑하는 구나"라는 깨달음을 얻는다. <오만과 편견>의 리디아와 위컴처럼 아예 잘못된 길로 빠진 게 아니라면, 한 사람이 선의를 가지고 내가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지닌 채로 삶을 살아간다면, '시간'이 해결해 줄 수도 있다. 물론 시간 속의 '내'가 해결해야겠지만. (하지만 이런 질문도 남는다. 그런데 리디아와 위컴은 어떻게 되는 걸까? 내가 리디아나 위컴일 가능성은?) 


  조금의 지혜로움이라도 견지하기가 위태롭다. 리디아, 위컴, 베넷 부인, 콜린스 그래서 소설 속 많은 사람들과 내가 어리석은 채로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순식간에 잊어버릴지도 모르지만 어떤 태도를 지녀야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정도는 배울 수 있었다. 거기에서 더 나아가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져야 로맨스 소설의 제대로 된 독자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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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 채석장 반대 현수막을 보면서 문득 문지의 '채석장' 시리즈 생각이 났다. 물론 '억까'하고 싶지 않다. 채석장 시리즈를 읽을 의향도 있다. 하지만 저 비유적 표현이 쉽게 허용된 이유를 생각해보게 된다.


한겨레 기사에선 채석장 시리즈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문학과지성사가 새 인문사회 문고판 시리즈를 시작했다. 이 시리즈엔 ‘채석장’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마르크스의 <자본>을 영화화하려던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미완의 프로젝트에 훗날 알렉산더 클루게가 ‘상상의 채석장’이란 이름을 붙인 것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시리즈 이름이 암시하듯 수록하는 텍스트들은 잘 세공된 완성품보다는 투박하고 거친 원석 조각들에 가깝다. 정련된 에세이나 논문으로 거듭나기 전 사유의 파편을 모아놓은 창작 메모나 연구노트 정도라고 할까.>


소개글엔 도시에 건물 짓기 위해 돌을 캐가는 행위를 말하고 있진 않다. 작가들이 써놓은 메모 형식의 글을 보석을 만드는 원석에 비유한다. 독자는 채석장에서 작가가 써놓은 원석을 캐낸다.


출판사가 있는 도시에선 채석장도, 반대 현수막도 볼 일이 없다. 현실의 채석장은 산을 깎아서 만드는 장소다. 나무를 없애고 먼지를 일으키고 덤프트럭이 다니게 되면서 주변 주민들은 피해를 본다. 


이미 많은 집들을 다른 방식으로 재분배하지 않는 한, 지방 어딘가에서 밭에 있는 모래를 캐내고 산을 깎아서 돌도 얻어야 한다. 아파트를 영원히 짓기 위해서.


녹색평론에도 짧게 소개된 적이 있는데, 이번 정부에서 전국에 산업단지를 짓는다고 많은 산과 언덕들을 민둥산으로 만들었다(산업단지는 지역 균형발전을 위해 전국 모든 도 지역에서 선정되었다). 녹색평론에 언급된 산업단지는 충청도 쪽에 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우리 집 근처에도 산업단지 예정지가 있다. 길에서 매일 민둥산(몇 년 전에 깎였다)을 보게 되면서 저 산이 저렇게 쉽게 아무런 관심도 없이 파괴되는 이유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4대강 사업의 반대 여론과 비교해보면 허무할 정도로 아무런 관심이 없다. 지역 주민들은 땅값이 오르고 보상도 해주기 때문에 반기는 분위기이기도 하다.


채석장이나 산업단지로 예정된 산과 언덕에는 '이름'이 없다. 4대강 사업에 그렇게 많은 반대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영산강', '낙동강', '남한강'이라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생물에게 '이름'을 붙여주면서 우리는 '성원권'을 부여하고 그 대상을 소중히 여기게 된다(<사람, 장소, 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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