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의 왈츠>에서 의사 슈크레타는 친구 야쿠프가 저지른 예기치 못한 살인을 눈 감아주며 우정은 정의와는 상관이 없다고 말한다. 슈크레타가 정의를 따르자면 친구의 살인을 고발해야 한다. "정의란 인간적이지 않아요"(슈크레타) 세상을 살다보니 "정의 밖에서 사는 느낌"이라고. 야쿠프의 살인은 야쿠프 본인도 모르게 일어나는 농담에 가까운 살인, 쿤데라의 '농담'이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의 뒷표지에 나오는 시인의 말을 보면, 시인 진은영에게는 우정의 의미가 슈크레타의 그것과는 상반된다. 진은영은 모차르트가 다른 사람들이 넘을 수 없었던 경계를 넘은 것처럼 친구가 탁월성을 발휘해서 새로운 영역으로 넘어가주기를 염원한다. 자신은 살리에르가 되도 괜찮으니 함께 경계를 넘어보자고. <우리는 매일매일>에 실린 '나의 친구'라는 시에는 다음의 구절이 나온다.


"그것을 믿자, 숱한 의심의 순간에도
내가 나의 곁에 선 너의 존재를 유일하게 확신하듯
친구, 이것이 나의 선물

새로 발명된 데카르트 철학의 제 1원리다.

  


문학의 정치성을 연구한 <문학의 아토포스>나 문학 상담과 시 쓰기에 관한 책 <문학, 내 마음의 무늬 읽기>에서, 그리고 시인이 최근 번역한 실비아 플라스의 <메리 벤투라와 아홉  번째 왕국>에서도 친구와 "단어와 단어로 맺은 우정"(심보선, <훔쳐가는 노래> 뒷표지)에 대한 강조를 읽을 수 있다. 내 마음을 읽고 친구와 시를 쓰며 '어둠'을 뚫고 나가서 빛을 발견할 수 있을까.


여기서 글을 끝 맺는다면 참 아름다울 텐데 조금 더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정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고, 어느 쪽 얼굴이 더 많이 나타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연봉 9천만원을 받는 사람들의 시위(인천국제공항 사태), 행복 주택 반대 시위를 보면, 여기가 바로 아귀다툼이 펼쳐지는 지옥이다. 슈크레타식 우정 때문에, 산업 재해나 공장식 축산, 지구 온난화 등을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별의 왈츠>의 끝 부분에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면, 우정이 뭔지 잘 생각해보자고, 슈크레타 당신이 말하는 그게 진짜 우정이냐고 추궁할지도 모른다. 추악한 세상에서 추악한 채로 남는다면 우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아니기 때문에 추악한 세상을 견뎌내기 위해 잘못된 우정을 소환한다. 


소설가의 진실을 믿을 것인가, 시인의 믿음을 믿을 것인가. 몇 주간 생각만 해오다 글로 써보았는데, 결론이 안 나고 고민은 더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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