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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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6년 체르노빌 원전사고를 겪은 사람들에게 체르노빌은 ‘의식의 재난’이었다. 현실을 붙잡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참고할 과거가 없었다. 사람들은 ‘새로운 문장’을 말했다.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사고를 직접 겪은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비극 이후에도 체르노빌 ‘안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기존에 느끼던 감정과 알고 있던 지식은 쓸모없어졌다. 소방대원의 아내는 사랑하는 남편에게 다가가지 말라는 경고를 받는다. “가까이 다가가면 안 됩니다! 입 맞추면 안 됩니다! 만지면 안 됩니다! 이제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방사선 오염 덩어리입니다.” 사랑과 죽음이 동일시된다. 경고를 무릅 쓰고 남편을 간호하던 아내는 출산 후 네 시간 만에 아이를 잃는다. 아름다움과 두려움이 합쳐진다. 방사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체르노빌의 자연은 아름답다. 하지만 그곳의 곡식과 가축은 방사선 덩어리이다. 앞으로 몇 만 년은 그럴 것이다. 체르노빌을 떠나지 않거나 소개(疏開)된 이후에 되돌아온 사람들은 그 곡식과 가축을 먹는다.


“그냥 불이에요, 불. 걱정할 거 없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고르바초프의 말이다. 최악의 재난 앞에서 정부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속인다. 방사능 측정기가 측량 한계를 넘어섰는데도, 농장 사무실에는 모든 곡식과 채소를 먹어도 된다는 광고가 지역 방사선 전문가의 서명과 함께 걸려 있다. 설비 설치를 위해 방문한 독일인들은 안전장비를 제공받지 못하자 떠난다. 별다른 조치 없이 체르노빌에서 살아온 주민들은 그들을 흉본다. “우리가 소비에트 영웅을 직접 선보이겠습니다.”, “우리가 소비에트를 보여주겠습니다.” ‘나’가 아닌 ‘우리’로 표현되는 정신이 소련의 정신이라고 한 인터뷰이가 말한다. 정부에 항상 속고 있다고 생각하며, 과학자도 의사도 믿지 않지만 스스로 무엇을 하지도 않는 체념의 정신. 많은 인터뷰이가 이러한 운명론을 러시아 민족의 특성으로 간주한다. 관료제의 사슬 속에서 개인은 ‘관료가 이 정도는 할 수 있지’라는 생각으로 일을 처리한다. 그렇게 구호물자들이 체르노빌 밖으로 팔려나간다.


체르노빌은 죽어가는 시스템의 종말을 앞당겼다. 폭발 이후 더 살기 좋아졌다고 몇몇 주민들은 말한다. 버려진 땅 체르노빌에선 정부와 관료제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없지만 자연은 훨씬 풍요로워졌다…. 한 군인은 군대 상사가 죽도록 싫어 체르노빌 원자로 옆에 토굴을 파 1년을 살다 붙잡힌다. 벨라루스의 첫 번째 시민단체 <체르노빌 아이들에게> 재단 대표이자 국회의원인 한 인터뷰이는 ‘지금 생각해보면 체르노빌이 우리를 해방시켰다. 덕분에 자유를 배웠다.’라고 말한다. 러시아적 운명론에서 벗어난 것이다. 스스로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정치를 만든다.


이 책의 부제는 ‘미래의 연대기’이다. 작가는 체르노빌을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본다. 우리가 체르노빌로부터 배워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텅 빈 집과 도로, 죽은 전깃줄로만 남은 체르노빌이 정말로 인류의 미래가 될까?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언급한다. 체르노빌은 소련의 전체주의(의 비효율성)가 초래한 문제가 아니다. 작가가 만난 훗카이도의 토마리 원전 직원들은 체르노빌과 같은 사고가 “우리가 일하는 원전에서는 절대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토마리 원전 직원은 일본의 원전이 규모 8.0의 강진도 견뎌낼 수 있다고 자신했지만,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인 9.0 지진에 훗쿠시마 원전들은 무너졌다. 작가는 인류가 의심 없이 믿고 있는 ‘기술’, ‘진보’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세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 회의(懷疑)를 일으키는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기록한 이유다.

 

(2017년 여름 서평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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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17-10-24 12: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무서워서 한 번에 다 못 읽고 나눠 읽은 책이네요. 리뷰 감사합니다. 기회가 닿는다면 다시 읽고 싶은 책이에요

hanasi 2017-11-12 03:32   좋아요 0 | URL
저도 시간이 되면 나중에 작가의 다른 책들을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