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이화 선생이 '호남'이란 명칭에 대해 쓴소리를 한다.
다음은 책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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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환은 또 각도의 인심을 이렇게 품평했다.
“평안도의 인심이 순박하기가 첫째이다. 다음은 경상도로서 풍속이 진실하다. 함경도는 지역이 오랑캐 땅과 잇닿았으므로 백성의 성질이 굳세고 사납다. 황해도는 산수가 험한 까닭에 백성이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 백성이어서 많이 어리석다. 전라도는 오로지 간사함을 숭상하여 나쁜 데에 쉽게 움직인다. 경기는 도성 밖의 평야 고을은 백성의 재물이 보잘것 없다.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만을 좇는다.”
이중환은 생활환경과 인문지리를 중심으로 유교 가치관에 따라 평가를 내렸으나 인상 비평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리고 폐단은 헤아리지 않고 단순한 관념으로 자신의 의견을 늘어놓았다.
안정복은 『임관정요』(臨官政要)에서 각도의 인심과 교화 방법을 제시하였다.
“경기의 풍속은 인색하고 이익만을 따르므로 마땅히 돈후와 성실로써 교화해야 한다. 호서의 풍속은 방탕하고 체모를 거짓으로 지으므로 마땅히 진중하고 근실함으로 교화해야 한다. 호남의 풍속은 기교를 부리고 거짓 성실한 체하므로 마땅히 엄격과 성신으로써 교화해야 한다.”
서북 지방과 강원도에 대한 견해는 이중환과 비슷하다.
각 지방에 대한 이상의 평들은 오늘날의 지리학에서 말하는 환경과 인문에 근거하지 않고 주로 풍수설에 토대를 둔 것으로, 유교 문화를 기준으로 재단하여 비록 생산, 문화 등을 언급하였지만 다양성보다는 결정론의 관점에서 평가를 내렸다.
각 지역의 행정구역 명칭이 아닌 다른 이름을 알아보자. 서북은 함경도, 평안도, 황해도를 통틀어 말하는 것이다. 함경도는 동북면으로, 평안도는 서북면으로, 황해도는 해서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강원도를 관동, 평안도를 관서라 부르기도 한다. 경기는 임금이 있는 도성 주변이라는 뜻으로 기전(畿甸)이라고 하였다. 전라도를 호남, 충청도를 호서, 경상도를 영남이라 한다. 강원도 북쪽을 영북, 동쪽을 영동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용어들은 조선조 모화주의자들이 중국의 지역 호칭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다. 중국에서는 만리장성 끝자락에 있는 산해관의 동쪽인 만주 일대를 관동, 그 서쪽의 만리장성 아래 일대를 관서라 한다. 동정호의 남쪽을 호수의 남쪽이라 하여 호남, 그 북쪽을 호수의 북쪽이라 하여 호북이라 한다. 강원도를 관동이나 영동이라 부르는데, 영동은 대관령의 동쪽이라는 뜻을 담았다고 할 수 있으나 관동은 그 중간에 관문이 없으니 억지로 붙여진 것이다. 호남, 호서는 경기 아래에 큰 호수가 없으니 전혀 자연지리에 맞지 않는다. 김제의 벽골제를 중심으로 삼아 호(湖)자를 붙였다는 말은 억지이다. 다만 동북이나 서북 따위, 위치와 방향에 따라 붙인 호칭과 추풍령과 조령에 막혀있는 영남의 호칭은 그런 대로 사리에 맞는다. (154-155)
'호남'에 대한 이야기가 5권에도 나온다.
왕건은 신라의 진골귀족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관료적 신분사회를 열었으나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역사적인 과오를 범하였다. 유훈을 통해 지역 차별의 꼬투리를 만들었던 것이다. 왕건은 ‘훈요십조’의 여덟 번째 항목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車峴의 남쪽과 공주강(금강)의 바깥은 산지의 형세가 거슬리게 뻗어 있어 인심도 그와 같다. 그곳 아래의 고을 사람들에게는 벼슬을 주지 말고 왕실 인척과의 혼인도 금하라. 일찍이 官寺의 노비와 나루와 驛의 雜尺에 속하였던 무리들 가운데는 더러 권세에 의탁하여 권력을 부리고 정사를 어지럽혀 재앙을 불러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비록 양민들일지라도 벼슬을 맡기지 말라.
학자들은 ‘차현’은 태백산 줄기에서 서쪽으로 가로 누운 차령산맥, ‘공주강’은 금강의 물줄기가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지세를 가리킨다고 보아왔다. 다시 말해 풍수지리가 좋지 않다고 핑계대고 있으나 사실은 후백제의 지배세력과 그 주민들에게 오래 시달림을 받은 감정을 씻지 못해 이런 교훈을 내렸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또 이곳 주민들이 고려에 대항하여 끈질기게 버티자 禾尺, 揚水尺과 같은 천민으로 만들어 도살업을 맡기고 버들고리를 만들어 팔게 하였으며, 집단마을인 部曲에 살게 하였다고 주장한다. 또한 여진의 포로 따위 북방계 민족을 천민으로 만들어 부곡에 살게 하였다고도 한다. 이들을 새로운 지배집단에 끼지 못하도록 막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일본인 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는 그뒤에도 호남 인물들이 적잖이 등용되었음을 지적하고, 거란의 침입이 있을 때 나주로 피란하였던 顯宗이 이 지방에서 우대를 받고 이곳 사람들을 많이 등용하려 하자 신라계 사람들이 미연에 방지하려고 이를 조작하였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왕건이 두 번째 왕후로 목포 출신인 장화 오씨를 맞이하였고, 오씨의 아들인 혜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 정황으로 보아 이 지역 차별론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고 보기도 한다. 근래에 이재범(李在範)은 새로운 주장을 내놓았다. ‘차현의 남쪽과 공주의 바깥’ (車峴以南 公州江外)을 좁은 범위로 보아 차현은 차령산맥이 아니라 공주 북쪽에 있는 고개를 지칭한 것이고, 공주강 바깥은 넓은 남쪽 지대를 포괄한 표현이 아니라 공산성 북쪽을 중심으로 한 주변 일대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웅주(공주의 옛 이름) 주변 고을 30여 성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차현 남쪽과 공주강 바깥’을 좁은 범위로 볼 때 이 주장은 설득력을 지닌다.
뒷날의 풍수학자들은 별로 의심 없이 이를 호남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풍수설에 따라 재해석하였다. 어쨌든 뒷날 이 유훈이 철저하게 지켜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토의 3분의 1이나 되는 지역을 차별해서는 제대로 통치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68-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