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서재에다 문장 옮겨 적는 걸 귀찮아 했다. 아니, 무의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주옥같은 문장이라고 해도 맥락에서 벗어난 인용은 글을 읽었던 상황과 그 느낌을 제대로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뭐 혹시 모르지. 깨진 도편에서도 전체 기형을 읽어내는 사람들도 있으니.

 

모비딕을 읽으며 밑줄친 부분을 옮겨 적고 있다. 그 중에서 항해사에 대한 소개 몇 구절이 재미있었다. 마치 삶이나 일에 대한 인간들의 서로 다른 태도를 보는 것 같아서였다.

언젠가 받았던 무료 e-book으로 읽고 있기 때문에 쪽수는 생략한다.

 

일등항해사 스타벅

그는 앞뒤를 헤아리지 않는 무모하고 대담한 행동을 억제하는 잠재적 영향력을 훨씬 받기 쉬워지는 경향이 있다. 정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포경업 같은 위험한 직업에 종사하는 다른 사람들이 자주 보여주는 그런 저돌적인 행동을 자제한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고 스타벅은 말했다. 이 말은 가장 믿을 수 있고 쓸모 있는 용기는 위험에 맞닥뜨렸을 때 그 위험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데에서 나온다는 뜻일 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은 겁쟁이보다 훨씬 위험한 동료라는 뜻이기도 했다.

 

고래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는 내 보트에 절대로 태우지 않겠다는 말을 나는 여지껏 에이해브 선장이 한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확인도 안 하고 선장이 말한 거라고 한 적도 있었는데... 무식을 티낸 셈이다.

 

이등항해사 스터브

그는 낙천적이었고, 겁쟁이도 아니지만 용감하지도 않았다. 위험이 닥쳐오면 무심한 태도로 받아들이고, 고래를 추적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1년 계약한 품팔이 소목장이처럼 조용히 그리고 침착하게 일했다. 명랑하고 느긋하고 태평스러운 그가 보트를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아무리 치명적인 위험도 만찬회에 불과하고, 자신의 보트에 탄 선원들은 모두 초대된 손님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나이 든 역마차 마부가 자신의 좌석을 편안하게 꾸미는 데 까다롭듯이, 그는 보트의 자리 자리를 쾌적하게 정비하는 데 까다로웠다. 고래에 접근하여 사투를 벌일 때에는 땜장이가 휘파람을 불면서 망치를 휘두르듯 무자비한 작살을 냉정하고 거침없이 다루었다. 분노에 날뛰는 괴물과 옆구리를 맞대고 있을 때에도 그는 좋아하는 옛 노래를 흥얼거리곤 했다. 오랫동안 익숙해졌기 때문에, 스터브에게는 죽음의 아가리마저도 편안한 의자로 바뀌어 있었다. 그가 죽음 자체를 어떻게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니, 죽음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하지만 즐거운 저녁식사가 끝난 뒤 그 문제에 마음을 돌릴 기회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는 훌륭한 선원답게 죽음을 빨리 돛대 위로 올라가라고 부르는 당직의 외침소리 정도로밖에는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이고, 돛대 위에서 무엇을 할지는 당직의 명령에 따르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될 거라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삼등항해사는 플래스크였는데, 고래에 대해 매우 호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는

커다란 고래야말로 자신의 원수, 조상 대대의 원수라고 생각하여, 고래를 만날 때마다 죽이는 것은 그에게 명예가 걸려 있는 일종의 체면 문제였다. 그래서 고래의 거대한 덩치와 신비로운 행동이 자아내는 여러 가지 경이에 대해 그는 어떤 의미의 존경심도 느끼지 않았고, 고래와 마주쳤을 때의 위험에 대해 불안 같은 감정도 전혀 느끼지 않았다. 따라서 그 놀라운 고래는 크게 확대된 생쥐이거나 기껏해야 물쥐일 뿐이고, 선수를 쳐서 포위한 뒤 약간의 시간과 노력만 들이면 얼마든지 죽여서 삶아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플래스크의 생각이었다. 이 무지하고 무의식적인 대담성 때문에 플래스크는 고래 문제에서 좀 익살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고래를 쫓는 일은 그에게 일종의 장난이었고, 그래서 혼 곶을 돌아 3년 동안 항해하는 것도 그 기간만큼 지속되는 즐거운 장난에 지나지 않았다.

 

너무나 잘 알려져서 줄거리를 다 알고 있는 (그래서 여지껏 읽기를 미뤄왔던) 책이어서 감흥이 별로 없을 거라고 짐작했었는데, 생각보다 재미있다. 장황하고 비장한 문체도 꽤 마음에 든다. 고전이란 결국 그 스타일 때문에 읽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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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10-14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알라딘 서재를 처음 시작할 때, 글쓰기가 무척 서툴러서 마음에 드는 문장을 꼭 두 개 이상은 인용했습니다. 인용 문장이 채워지면 글의 분량이 제법 많아져 보이니까요. 그리고 저자의 생각을 내 방식으로 풀어 쓰는 것이 귀찮으면 문장을 인용했어요. 글을 자주 쓰다보니까 문장 인용 방식에 회의적인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인용 문장이 글 전체 맥락을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SNS 글에 익숙한 사람들은 긴 글보다는 짧은 글을 보는 걸 선호합니다. 그래서 문장을 많이 인용한 글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인용문이죠.

돌궐 2015-10-15 17:03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저도 문장을 인용하지 않고 저자의 생각을 잘 풀어쓰는 게 진짜 고수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어떤 문장은 또 풀어쓰면 그 맥락을 잃게 되는 경우도 있어서 참 어렵습니다.ㅎㅎ

양철나무꾼 2015-10-15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언제던가 순대 오천원어치는 소주 반병에 혼자 드시기 많다며 삼천원어치만 사 드셨다던 님의 글을 기억합니다. 어느게 옳다는 정석은 없을듯 합니다. 님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지켜가시면 그걸로 된것이 아닐까요?^^

돌궐 2015-10-16 18:38   좋아요 0 | URL
말씀 감사합니다. 사실 귀찮고 무의미하다고 한 이유가 그간 다른 일들을 하면서 책을 많이 못 읽었고 그래서 여기다 옮겨 적을 것도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책은 늘 읽어갈 테니까 그때마다 서재에 와서 글을 올릴 수 있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