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소설에 관심이 조금 있어서 오다가다 눈에 띄면 읽어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최근에는 <담징>, <솔거>, <소년이 온다>, <지워지지 않는 나라>를 읽었는데, 혼자 매긴 별점에 편차가 좀 있었다.
읽고 나서 리뷰를 쓴 것도 있지만 임시저장만 하고 마지막 전송 버튼까지 누르지는 못했다.
소설로 역사를 말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 보았다. 역사적 사실이나 해석을 서술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소설 형식을 빌릴 필요가 없지 않을까. 나는 소설에서 중요한 건 표현이고 양식이라고 본다. 역사의 상황 속으로 독자들을 몰입하게 만들 수 없다면 차라리 치밀한 논증을 갖춘 논픽션이나 논문을 쓰는 것이 낫다. 상황에 공감되지 않거나 대사에 집중할 수 없는 소설은 읽어내기가 매우 힘들다.
이번에 읽었던 소설 중 한 권이 그랬다. 역사적 사실이나 해석과 같은 '내용'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책을 몇 장 읽자마자 드는 느낌은 '뭐지 이건?'이었다. 등장인물의 대사들은 학회 발표문 같았으며, 플롯은 엉성하였고, 상황 묘사가 거의 없이 사건만 나열되었다. 등장인물들의 성격은 불분명하며, 행동과 대사가 어설펐다. 그리고 문장에는 스타일이 없었다.
서사 구조는 마치 소설로 된 <디워>를 보는 듯했다. 맥락 없이 전개되는 사건과 사건들……. 미모의 여성과 주인공이 술 마시면서 내내 학술적인 얘기만 나누다가 난데없이 동침하는 전개라니……. 정신이 혼미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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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하면 한강의 <소년이 온다>에는 인물들의 슬픔에 공감하고, 눈물짓게 만드는 문장이 있었다. 이런 것을 읽으려고 소설책을 찾는 게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렇다.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192쪽)
참 아름답고 상징적인 문장이다. 그러고 보니 한강은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고 썼던 시인 아닌가. 돌아간 그들의 영혼을 이만큼 성실하게 만져질 듯이 되살리려 했던 글이 또 어디 있었는지 나는 모른다.
사실이었다. 너의 일은 힘들지 않았다. 선주 누나와 은숙 누나는 베니어합판이나 스티로폼 판에 미리 비닐을 깔아놓고 그 위에 죽은 몸들을 눕혔다. 얼굴과 목을 물수건으로 씻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가는 빗으로 정돈한 뒤, 냄새를 막기 위해 몸에 비닐을 둘렀다. 그사이 너는 그들의 성별과 어림잡은 나이, 입은 옷과 신발의 종류를 장부에 기록하고 번호를 매겼다. 갱지 쪽지에다 같은 번호를 적어서 가슴께에 핀으로 꽂아놓은 뒤, 얼굴 아래로 흰 무명 천을 덮고는 누나들과 힘을 합해 벽 쪽으로 밀어놓았다. 도청에서 가장 바쁜 사람처럼 보이는 진수 형은 하루에도 몇번씩 다급한 걸음걸이로 너를 찾아왔는데, 네가 장부에 기록한 인적사항들을 벽보에 써서 도청 정문에 붙이기 위해서였다. 그걸 직접 보거나 전해듣고 나타난 가족들에게 너는 흰 천을 열어 죽은 몸들을 보여주었다. 신원이 확인되면 멀찍이 물러서서 오열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너무 험하지 않게만 대충 수습해놓은 시신을, 유족들은 목화솜으로 코와 귀를 막아주고 깨끗하고 좋은 옷으로 갈아입혔다. 그렇게 간단한 염과 입관을 마친 사람들이 상무관으로 옮겨지는 걸 장부에 기록하는 것까지가 너의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네가 이해할 수 없었던 한가지 일은, 입관을 마친 뒤 약식으로 치르는 짧은 추도식에서 유족들이 애국가를 부른다는 것이었다. 관 위에 태극기를 반듯이 펴고 친친 끈으로 묶어놓는 것도 이상했다. 군인들이 죽인 사람들에게 왜 애국가를 불러주는 걸까. 왜 태극기로 관을 감싸는 걸까. 마치 나라가 그들을 죽인 게 아니라는 듯이.
조심스럽게 네가 물었을 때, 은숙 누나는 동그란 눈을 더 크게 뜨며 대답했다.
군인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잖아. 권력을 잡으려고. 너도 봤을 거 아냐. 한낮에 사람들을 때리고 찌르고, 그래도 안되니까 총을 쐈잖아. 그렇게 하라고 그들이 명령한 거야. 그 사람들을 어떻게 나라라고 부를 수 있어.
전혀 다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들은 것처럼 너는 혼란스러웠다. 그날 오후엔 유난히 신원 확인이 많이 돼, 복도 여기저기서 동시에 입관이 치러졌다.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애국가가 불려지는 동안,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낼 수 있을 것처럼. (16-18)
계속해서 내 몸은 썩어갔어. 벌어진 상처 속에 점점 더 많은 날파리들이 엉겼어. 눈꺼풀과 입술에 내려앉은 쉬파리들이 검고 가느다란 발을 비비며 천천히 움직였어. 참나무 숲 우듬지 사이로 오렌지색 광선을 내쏘며 해가 저물어갈 무렵, 누나가 어디 있는지 생/각하는 데 지친 나는 이제 그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어. 나를 죽인 사람과 누나를 죽인 사람은 지금 어디 있을까. 아직 죽지 않았다 해도 그들에게도 혼이 있을 테니, 생각하고 생각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았어. 내 몸을 버리고 싶었어. 죽은 그 몸뚱이로부터 얇고 팽팽한 거미줄같이 뻗어나와 끌어당기는 힘을 잘라내고 싶었어. 그들을 향해 날아가고 싶었어.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 (51-52)
군인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는 걸 모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상한 건, 그들의 힘만큼이나 강렬한 무엇인가가 나를 압도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양심.
그래요, 양심.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게 그겁니다.
군인들이 쏘아 죽인 사람들의 시신을 리어카에 실어 앞세우고 수십만의 사람들과 함께 총구 앞에 섰던 날, 느닷없이 발견한 내 안의 깨끗한 무엇에 나는 놀랐습니다. 더이상 두렵지 않다는 느낌, 지금 죽어도 좋다는 느낌, 수십만 사람들의 피가 모여 거대한 혈관을 이룬 것 같았던 생생한 느낌을 기억합니다. 그 혈관에 흐르며 고동치는, 세상에서 가장 거대하고 숭고한 심장의 맥박을 나는 느꼈습니다. 감히 내가 그것의 일부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114)
네가 여섯살, 일곱살 묵었을 적에, 한시도 가만히 안 있을 적에, 느이 형들이 다 학교 가버리먼 너는 심심해서 어쩔 줄을 몰랐제. 너하고 나하고 둘이서, 느이 아부지가 있는 가게까지 날마다 천변길로 걸어갔제. 나무 그늘이 햇빛을 가리는 것을 너는 싫어했제. 조그만 것이 힘도 시고 고집도 시어서, 힘껏 내 손목을 밝은 쪽으로 끌었제. 숱이 적고 가늘디가는 머리카락 속까장 땀이 나서 반짝반짝함스로. 아픈 것맨이로 쌕쌕 숨을 몰아쉼스로.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192)
그 사진집을 아버지가 집으로 가져온 것은 이년 뒤 여름이었다. 누군가를 조문하러 그 도시에 내려갔다가 터미널에서 구했다고 했다. 나의 어린 상상과 달리 이마에 총을 맞지도, 아직 결혼을 하지도 않은 희영이 고모가 잠깐 다니러 올라와 있었다. 어른들끼리 사진집을 돌려본 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그 책을 아이들이 보지 못하도록 안방의 책장 안쪽에, 책등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았다.
내가 몰래 그 책을 펼친 것은, 어른들이 언제나처럼 부엌에 모여 앉아 아홉시 뉴스를 보고 있던 밤이었다. 마지막 장까지 책장을 넘겨, 총검으로 깊게 내리그어 으깨어진 여자애의 얼굴을 마주한 순간을 기억한다. 거기 있는지도 미처 모르고 있었던 내 안의 연한 부분이 소리 없이 깨어졌다. (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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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에서 사실과 해석을 어느 정도 담아 낼 것인가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그럴듯한 이야기 속에 녹여내는가가 더 중요하다. 소설은 드라마지 뉴스가 아니기 때문이다. 흥미를 끌 수 있는 플롯과 (인물의) 성격이 있어야 하며, 등장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급전과 반전’이 이루어져야 독자들은 군침을 삼키며 책장을 넘길 수가 있을 것이다.
역사 인식이나 학설들을 개연성 없는 사건들 속에다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의 그 책은 학술적이고 이념적 대사들만 가득 나열되어 있어서 읽는 내내 아주 거북스러웠다. 학자들이라고 해서 술 마시면서 그렇게 '세미나'만 하는 게 아니지 않은가.
소설에 학술적인 대사가 나오면 안 된다는 말이 아니다.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에는 민중들의 천박하고 말초적인 대사뿐만 아니라 엘리트들의 이념적이고 현학적인 대사들도 많이 나온다. 하지만 그 대사들은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 속에서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나오기 때문에 오히려 이를 통해 새로운 역사적 관점을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었다.
나는 역사소설에서 그런 글을 보고 싶었다. 역사 지식과 서사가 따로 놀아 설익은 밥을 씹는 것 같은 글 말고 잡곡과 백미가 같이 찰지게 익어서 부드럽게 씹히고, 빛깔과 냄새도 좋은 그런 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