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소설 읽기
발원 2 - 요석 그리고 원효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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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소설을 가끔 챙겨보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거기에서 사실과 정보를 기대하는 건 아니다. 사실과 정보를 얻으려면 역사책이나 논문을 보면 되니까. 하지만 소설은 인물 사이의 갈등이나 구체적 상황들을 재현해내어 특정한 장소와 시간 속으로 독자들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과 정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흡입력 있는 줄거리와 현실성 있는 인물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개연성 있는 사건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야만 생겨나는 것 같다. 따라서 나는 일반 소설처럼 역사 소설에서도 줄거리와 그 구성(플롯)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잘 갖춰지면 소설의 흡입력은 저절로 생기고, 재미도 뒤따르게 될 것이다.

 

김선우 소설 <발원>을 읽으면서 나는 저자가 그저 줄거리만 나열한 게 아니라 사건의 구성을 매우 치밀하고 적절하게 설계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원효가 화랑이 되기를 포기하고 출가하게 되는 계기라든지,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다가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유명한 이야기를 (김춘추의 요청으로 원효를 신라에서 내보내려는) 의상을 떼어내기 위한 원효의 술책으로 서술한 부분이 그랬다. 

 

또 혜공이 죽는 장면에서는 매우 격한 감정을 느끼면서 살짝 눈물까지 나더라. 이 사건은 원효가 백제 병사를 구한 행동이 기화가 되어 발생한 것이어서 더욱 비극적이었다. 이런 설정은 역사적 사실의 반영이 아니라 작가가 의도한 장치였고 그런 서사 속에서 독자는 안타깝고 북받치는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으로서 통제할 수 없는 우연, 그리고 훌륭한 인물의 숭고한 죽음을 통해 공포와 연민을 불러온다는 비극의 조건을 완전히 갖춘 드라마였다. 바로 이런 게 내가 역사 소설에서 기대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책을 읽으면서 인간과 역사, 종교와 사회에 관한 저자 나름의 철학과 소신들을 읽어낼 수 있었던 점도 좋았다. 사상과 철학이 없이 줄거리만 있는 소설은 다 읽고 나면 맹탕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원효라는 대사상가의 촌철 대사를 읽는 즐거움이 컸다.  

 

(황룡사 백고좌법회의 원효 연설 중)

부처님께서는 단 한 명의 구제받지 못한 중생이 있으면 그를 위해 세상 한가운데 머문다 하셨습니다.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황룡사 불제자들의 상구보리는 귀족과 황금입니까? 이곳의 하화중생은 게으름과 배척입니까? 여래가 세상에 온 것은 가난하고 소외되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라 하더군요. 저기 장경각에 가득 쌓인 숱한 경전들에 말입니다! (1권,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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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시인으로 먼저 알려졌다. 시인이라면 문장 하나 낱말 하나 허투루 쓰지 않을 터. 이 책에서도 저자는 문장과 어휘에 공을 많이 들인 게 역력했다. 어설픈 문장으로는 서사가 아무리 교묘해도 독자의 감정이입을 유도하지 못한다. 감정이입이란 건 결국 몰입에서 오는 것일 텐데, 잘은 모르지만 이 몰입은 사건과 동태 묘사의 리얼리티가 만들어내는 것 같다. 결국 이 리얼리티를 제대로 수행하는 것은 좋은 문장일 것이다. <발원>은 문장을 읽는 즐거움도 큰 소설이다.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말고는 저자의 시를 읽어본 적이 없지만 읽는 내내 김선우라는 시인을 문장 속에서 만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요즘 페미니즘에 관한 책들이 많이 출간되던데, 이 소설도 아주 좋은 페미니즘 관련 텍스트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요석이 원효라는 남성을 자극하고, 각성하게 하며, 자신의 신념을 적극적으로 지켜내면서 험난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은 구중궁궐 안에서 원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만 서술됐던 <삼국유사> 속 요석의 수동적 이미지와 전혀 다른 점이었다. 나는 <유사>의 저 얼척없는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요석(瑤石)'이라는 이름만 겨우 알고 있었을 뿐, 그녀의 이념과 감정을 짐작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요석을 아름다운 정신과 감정을 지닌 신라 여인 '요석(曜夕)' 으로 재해석하였다. 소설 속에서 그녀는 '빛나는 저녁'으로서 '가장 어두운 새벽'인 원효(元曉)를 이끌어내는 존재로 탄생한 것이다.

 

이 소설에서 페미니즘을 가장 확연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원효와 요석의 로맨스이다. 특히 두 사람이 만들어 내는 상황들은 매우 여성적인 시선으로 묘사된다. 원효의 성격과 행동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그는 민감하고 치밀한 성격이지만 소설에서 묘사되듯 예민하거나 지나치게 신중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또 여인에게 순정적일 것 같지도 않다. 나로서는 원효가 로맨스 소설에 나오는 남주인공들의 전형적인 성격으로 설정된 것이 살짝 아쉬운 감이 없지 않다. 살짝 나쁜 남자, 호방한 성격의 남자로 묘사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저자 특유의 여성주의적 시각 때문에 오히려 서사 속에 전개되는 로맨스가 어색하지 않은 면도 있는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로 만들면 괜찮겠다는 생각도 든다. 다만 문학을 영상으로 바꾸는 것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원효와 요석의 동침 장면은 화면으로 전환되는 순간 그 가치를 완전히 잃을 게 뻔하다. 그들의 섹스는 언어만이 보여줄 수 있는 은유와 상징으로 표현되었지만 이것이 만약 화면으로 변환된다면 그야말로 감각적이고 말초적 이미지로 바뀔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우열의 문제가 아니라 성격과 범주가 다른 표현이라는 말이다.

 

강신주는 해제에서 원효가 요석과 자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했지만, 나는 원효가 자고 안자고 그런 것에 구애받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는 이미 사랑과 성욕으로부터 무애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그래서 김선우는 두 사람이 나눈 섹스를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묘사하였다고 본다. 요석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그녀를 아버지인 김춘추의 손아귀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원효는 자신의 존엄과 권위마저도 포기한 것이고, 이 결정적 시간을 저자는 두 사람의 절정의 장면으로 승화하였다.

나 역시 원효가 요석의 아픈 사랑을 흔쾌히, 어쩌면 아주 대범하게(어차피!!) 받아들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은밀한 비유와 개념적으로 수식된 문장에 적응하기 어려웠지만(남자가 여자를 안을 때는 훨씬 직접적이고 말초적이다), 그 문장들은 역사 소설에서 보기 드문 매우 아름다운 문장이라는 것은 인정한다. 이를테면, 이런 장면을 보자.

 

단애를 흠뻑 적신 불붙은 물의 시간, 서로의 몸속에서 목숨으로 태동하던 완벽한 합일이 수차례 거듭되며 벼랑이 무너지고 온몸의 뼈와 살이 공기처럼 흩어졌다. … 원효가 지나온 시간과 요석이 지나온 시간이 서로에게 스며들었고, 원효의 몸속에서 요석은 처음으로 자신의 나신을 보았다. 뭉클한 노을빛 구름들이 몸 구석구석에서 일어나고 스러졌다. 저녁노을과 새벽노을이 한 몸에서 피어올랐다. 아, 님이여. 나는 이대로 죽어도 좋겠습니다. 이런 말이 요석의 입속을 맴돌 때, 요석은 깨달았다. 나는 이제 살 수 있겠구나. 요석의 입술이 벌어지며 하아, 가쁜 숨이 흘러나왔다. 요석을 꽉 끌어안은 채 아끼고 아끼며 쓰다듬던 원효가 그 탄성을 들으며 안도했다. 원효의 가슴 위로 요석이 몸을 포갰다. (2권, 252)

 

이 문장들은 내게 요석의 벅찬 심정과 감각으로 느껴진다. 그리고 이 결합의 시적 표현들은 저자가 작심하고 써냈다고 밝힌 바도 있다. 아무래도 이 소설에서 가장 압도적인 장면이며 모든 갈등과 슬픔이 해소되는 순간이었다. 이만큼 원효와 요석의 동침을 도발적으로 묘사한 글이 또 있을까 싶다. 읽은 지는 너무나 오래 됐지만 이광수가 쓴 <원효대사>에는 이 같은 ‘적나라한 베드신’까지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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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는 사랑하는 것은 고통의 하나임을 설파했다. 생로병사를 포함한 '팔고(八苦)' 가운데 하나가 애별리고(愛別離苦), 즉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고통이다. 사랑은 곧 고통이다. 그것이 고통인줄 알면서도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어떨까? 사랑조차도 고통의 시작이요 원인임을 머리로는 알고 있어도 그것을 몸소 깨닫지는 못했을 것이다. 원효는 김춘추와 그의 정치판에서 요석을 구해내기 위해 흔쾌히 자신을 고통 속으로 내던졌다. 그리고 그 고통조차 감내하고자 했을 거다.

석가모니를 유혹하던 마라의 딸들은 석가모니에 의해 ‘똥오줌으로 가득찬 가죽주머니’로 비하되었지만 요석은 다르다. 그녀는 깨달은 자를 유혹하려는 마녀가 아니라 중생을 구제하려는 보살이 아닌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 가슴이 아플 만큼 사랑해줄 수 있는 여인이 바로 요석이다. 빛나는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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