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자세와 방법은 학교에서 스승님들께도 배웠지만 책에서도 배웠다.
연구나 공부에 임하는 자세를 알려준 책 가운데 『다산선생 지식경영법』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예전에 적어두었던 정약용 선생의 몇몇 구절들(그리고 정민 선생의 해설)을 옮겨 본다.
단호하고 굳세게 잘못을 지적하라
절시마탁법(切偲磨濯法)
글로써 벗과 만나는 것은 옛사람이 즐거워한 일이다. 다만 근세에 학자들은 서로 모여 강학할 때, 매번 알맹이 없이 칭찬하고 거짓으로 겸손해하며 하루해를 마친다. 갑이 온통 치켜세워 찬양하면, 을은 몸을 받들어 물러선다. 다시 을이 두 배나 더 칭송하면 갑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겸양한다. 하지만 몸과 마음의 실지에는 절시마탁하는 보탬이 없다.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 9-44)
비판할 뿐 칭찬 말라
절시마탁(切偲磨濯)은 잘못을 바로잡고 책선(責善)해서 역량을 갈고닦는 것이다.
공부하는 사람은 서로에게 칭찬하는 법이 없다.
날카롭게 비판하고 냉정하게 평가해서 상대의 부족한 점을 지적하고,
그가 잘못한 것을 드러내서 더 향상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비판에 대해서도 마음을 비워,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내세울 것은 더 확고히 내세워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늘 반대로 한다.
남의 부족한 점은 그저 듣기 좋은 말로 칭찬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넘어간다.
남의 비판에 대해서는 얼굴이 벌게져서 불쾌하게 생각한다.
남이 입에 발린 말로 칭찬해주면 그제야 흡족해서 '그러면 그렇지' 한다.
앞의 인용은 다산이 정리한 <서암강학기>에서, 이삼환이 토론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자세를 환기하며 한 말이다.
다산은 이 말이 인상적이었던지 다른 글에서도 그대로 인용했다.
보내신 글 가운데 칭찬이 너무 많아 실정보다 지나칩니다.
앞쪽의 백여 마디는 글자마다 실지(實地)를 잃어, 읽고 나서는 몹시 실망했습니다.
옛날 10년 전에 서울의 여러 벗과 강학하며 도에 대해 논할 때 일입니다.
갑이 말끝마다 칭찬하면 을은 몸을 받들어 사양합니다.
이번엔 을이 배나 더 칭송합니다. 그러면 갑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겸양하지요.
마침내 몇 년 뒤에는 둘 다 벼슬길로 나아가 우뚝하게 수립한 자가 없었습니다.
이는 깊이 경계로 삼아야 할 바입니다.
지난번 산사에 있을 때 목옹(木翁) 이삼환 선생께서 누누이 당부하시기를,
이 같은 습속을 없애기에 힘쓰라고 하셨는데, 형께서 선생이 크게 경계하신 일을 그릇 범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대저 벗을 귀하게 여기는 것은 절시마탁하는 유익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마치 돌침으로 뼈에 침놓듯이 어리석고 게으름을 경계하고, 쇠칼로 눈동자의 백태를 깎아내듯 허물과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상대방이 설령 큰 재주와 높은 덕이 있다 해도 내가 무엇 때문에 그를 향에 이를 말하겠습니까?
하물며 속되고 비루한 무리에게 과도하게 칭찬을 더하는 것은 장차 남에게 웃음거리가 되는 것이니,
주는 자나 받는 자나 그 잘못이 똑같을 뿐입니다.
<이문달에게 답함[答李文達]>
냉정한 비판을 원했는데 잔뜩 칭찬만 들으니 몹시 불만스럽고 실망스럽다는 내용이다.
서로 덕담이나 주고받자는 태도로는 발전이 있을 수 없다.
남을 칭찬하는 것이야 나쁠 게 없지만, 공부의 자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겸손이 미덕이긴 해도 토론의 자리에서는 안 된다.
학문의 문제로 토론하는 자리에서는 돌바늘로 뼈를 찌르고, 쇠칼로 각막의 백태를 긁어내는 촌철살인의 날카로운 비판이 있을 뿐이다.
결코 물러설 수 없다는 불퇴전(不退轉)의 기상이 있을 따름이다.
서로 칭찬이나 하고 덕담이나 주고받으려면 토론은 무엇때문에 하는가?
상대의 과도한 칭찬이 멋쩍어 보낸 글로 읽기에는 언사가 다소 과격하다.
다산은 이 편지의 끝을 "우리는 우의가 동문과 한가지니, 무릇 허물이나 잘못이 있게 되면 서로 바로잡고 경계해주어야 마땅합니다. 말을 꾸며서 높이고 숭상하고 한때의 기쁨을 취하는 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는 말로 맺고 있다.
다산은 그의 칭찬을 찬찬히 살피고 따진 데서 나온 것이 아니라, 듣기 좋은 말로 그저 상대방 기분 좋으라고 한 의례적인 치레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225-227)
아래는 다산 정약용이 어느 여름날 친구들과 함께 세검정에서 노닌 뒤에 쓴 글이라 한다.
정약용이 맨날 각박하게 남들 비판만 하면서 산 것은 아니다.
삶 속에 정취를 깃들이라고 했던가.
세검정에서 노닌 기 遊洗劍亭記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오직 소낙비에 폭포를 볼 때뿐이다. 그러나 막 비가 내릴 때는 사람들이 옷을 적셔가며 말에 안장을 얹고 성문 밖으로 나서기를 내켜하지 않고, 비가 개고 나면 산골물도 금세 수그러들고 만다. 이 때문에 정자가 저편 푸른 숲 사이에 있어도 성중(城中)의 사대부 중에 능히 이 정자의 빼어난 풍광을 다 맛본 자가 드물다.
신해년(1791) 여름의 일이다. 나는 한혜보 등 여러 사람과 함께 명례방 집에서 조그만 모임을 가졌다. 술이 몇 순배 돌자 무더위가 찌는 듯하였다. 먹장구름이 갑자기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마른 우레소리가 은은히 울리는 것이었다. 내가 술병을 걷어치우고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이건 폭우가 쏟아질 조짐일세. 자네들 세검정에 가보지 않으려나? 만약 내켜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벌주 열 병을 한 차례 갖추어 내는 걸세."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여부가 있겠나!"
마침내 말을 재촉하여 창의문을 나섰다. 비가 벌써 몇 방울 떨어지는데 주먹만큼 컸다. 서둘러 내달려 정자 아래 수문에 이르렀다. 양편 산골짝 사이에서는 이미 고래가 물을 뿜어내는 듯하였다. 옷자락이 얼룩덜룩했다. 정자에 올라 자리를 벌여놓고 앉았다. 난간 앞의 나무는 이미 뒤집힐 듯 미친 듯이 흔들렸다. 상쾌한 기운이 뼈에 스미는 것만 같았다.
이때 비바람이 크게 일어나 산골물이 사납게 들이닥치더니 순식간에 골짜기를 메워버렸다. 물결은 사납게 출렁이며 세차게 흘러갔다. 모래가 일어나고 돌멩이가 구르면서 콸콸 쏟아져내렸다. 물줄기가 정자의 주춧돌을 할퀴는데 기세가 웅장하고 소리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난간이 온통 진동하니 겁이 나서 안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말했다. "자! 어떤가?" 모두들 말했다. "여부가 있나!"
술과 안주를 내오라 명하여 돌아가며 웃고 떠들었다. 잠시 후 비는 그치고 구름이 걷혔다. 산골물도 잦아들었다. 석양이 나무 사이에 비치자 물상들이 온통 자줏빛과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서로 더불어 베개 베고 기대 시를 읊조리며 누웠다.
조금 있으려니까 심화오가 이 소식을 듣고 뒤쫓아 정자에 이르렀는데 물은 이미 잔잔해져버렸다. 처음에 화오는 청했는데도 오지 않았던 터였다. 여러 사람이 함께 골리며 조롱하다가 더불어 한 순배 더 마시고 돌아왔다. 같이 갔던 친구들은 홍약여와 이휘조, 윤무구 등이다.
내가 다산의 글 가운데 가장 좋아하는 <세검정에서 노닌 기>의 전문이다.
절정의 순간은 언제나 미리 깨어 준비한 자의 몫이다.
멍청한 인간들은 기차가 떠난 다음에야 그것이 기회였던 줄을 깨닫는다.
빗방울에 옷을 적실 각오 없이는 세검정의 빼어난 풍광은 볼 수가 없다.
비가 그친 뒤에 출발하면 늦는다.
비가 오기 전에, 혹은 비를 맞으면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최고의 세검정을 만끽할 수 있다.
나에게 다산의 이 글은 그저 벗들과 작당하여 세검정으로 나들이를 다녀온 이야기로만 들리지 않는다.
행간 깊게 들린다.
"깨어 있어라. 맥락을 넘겨짚는 안목을 길러라. 떠난 기차는 붙들 수가 없고, 가버린 기회는 돌아오지 않는다. 뒤늦게 헐레벌떡 달려오면 좋은 구경도 못하고 웃음거리만 된다." (497-499)
인터넷에서 찾은 다산 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游洗劍亭記
洗劍亭之勝, 唯急雨觀瀑布是已. 然方雨也, 人莫肯沾濕鞴馬 而出郊關之外. 旣霽也, 山水亦衰少. 是故亭在莽蒼之間, 而城中士大夫之能盡亭之勝者鮮矣.
辛亥之夏, 余與韓徯甫諸人, 小集于明禮坊. 酒旣行, 酷熱蒸鬱, 墨雲突然四起, 空雷隱隱作聲. 余蹶然擊壺而起曰, 此暴雨之象也, 諸君豈欲往洗劍亭乎. 有不肯者罰酒十壺, 以供具一番也. 僉曰可勝言哉. 遂趣騎從以出. 出彰義門, 雨數三點已落, 落如拳大. 疾馳到亭下, 水門左右山谷之間, 已如鯨鯢噴矣, 而衣袖亦斑斑然. 登亭列席而坐, 檻前樹木, 已拂拂如顚狂, 而酒浙徹骨.
於是風雨大作, 山水暴至, 呼吸之頃, 塡谿咽谷, 澎湃砰訇, 淘沙轉石, 潑潏奔放. 水掠亭礎, 勢雄聲猛, 榱檻震動. 凜乎其不能安也. 余曰何如. 僉曰可勝言哉. 命酒進饌 諧謔迭作. 少焉雨歇雲收, 山水漸平. 夕陽在樹, 紫綠萬狀. 相與枕藉吟弄而臥. 有頃沈華五得聞此事, 追至亭. 水已平矣. 始華五邀而不至, 諸人共嘲罵之. 與之飮一巡而還. 時洪約汝, 李輝祖, 尹无咎亦偕焉.
(http://blog.daum.net/chosunsachoyduhway/7812256 에서 퍼옴)
큰 소낙비가 내린 뒤에 해가 넘어가면 온 세상이 울긋불긋해진다.
벌써 십 수년 전 일이다. 고등학교 때 친구 두 놈과 안면도 꽃지에 갔다가 도착하자마자 큰 비가 와서 허겁지겁 수로를 파고, 어설프게 텐트를 치던 생각이 난다.
찌개를 끓여 요기를 하고 나니, 비구름이 걷히기 시작했는데 검은 구름 밑으로 붉은 해가 지고 있었고, 바다는 온통 남색과 군청색, 구름과 바다 사이의 하늘은 빛나는 황금색, 물결에 이리저리 깨지듯 반사되던 하얀 햇빛, 그리고 붉은 모래사장, 길게 뒤로 뻗은 우리들의 그림자... 이루 다 기억할 수 없을만큼 아름다운 색상의 스펙트럼이 서쪽 하늘에 가득히 펼쳐졌고, 한 동안 우리들은 그곳에서 넋을 잃고 서있었다.
그 때 아버지께 물려받은 수동식 펜탁스 카메라로 남기려 했던 이 광경은 어이없게도 노출조정 바늘 고장으로(아마도 수은 건전지가 다 되었던 것같다) 대충 직감으로 조리개와 노출시간을 맞추어 찍느라 사진에 제대로 담지 못했지만 그 이미지는 내 가슴 속에 참 선명하게 인화되어 있다.
자연 앞에 감동을 받은 정약용은 이처럼 실감나게 기록을 남겨두었는데, 비슷하다면 비슷한 경험을 했던 나는 손가락 몇 번 눌러서 사진에 담을 수 없자 그저 기억에만 남겨두려 했으니... 위인과 범부는 이다지도 차이가 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