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지올로구스
피지올로구스 지음, 노성두 옮김 / 미술문화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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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중세시대를 공부하는 사람이나 이 시대의 종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꼭 한번 읽어봐야만 하는 책이다.  세익스피어의 햄릿에 오필리어를 매장하는 장면 가운데 오필리어의 오빠인 레어티즈가 <자기의 피로 새끼를 키우는 펠리칸 처럼...>하는 대사가 나온다. 왜 고통의 와중에 펠리칸이란 새가 갑자기 튀어나오는가? 펠리칸은 십자가 상에서 고통을 받는 그리스도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잘 이해될 것이다. 레어티즈는 여동생의 죽음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비유하면서 자신의 아픈 감정을 표현했던 것이다. 


유럽의 중세를 이해하는데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은 그 시대의 종교인 가톨릭이며 그 다음은 가톨릭에서 사용된 상징의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종교와 종교의 상징성을 이해하는데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 책은 이런 과정의 한 단계에서 무척이나 소중하게 사용될 수 있는 책이다.


자연을 사랑하는 자라는 뜻의 피지올로구스란 이름으로 쓰여진 이 책에는 55개의 상징물들이 들어있다. 이 상징물에는 우리가 익숙한 동물의 이름에서부터 상상의 세계에 사는 동물과 광물, 식물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 이름들은 결코 우리에게 낮설지 않다. 우리 주위에 항상 존재하는 존재들이 이런 상징성을 띠고 있다는 자체가 놀라울 뿐이다. 그러면서 우리 주변의 익숙한 대상들을 상징성으로 승화시킨 성서의 저자들의 혜안이 놀랍게 느껴진다.  이렇게 평범한 사물 속에 종교의 깊은 뜻이 담겨 있다는 것은 메테를링크의 파랑새처럼 진리는 먼 데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 주변에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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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기 쉬운 조각감상의 길잡이
데이비드 핀 지음, 김숙.이지현 옮김, 김영나 감수 / 시공사 / 199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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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구입한 것은 우연의 결과였다. <반체제 예술>이란 책을 보면서 거기에 나온 독일 농민전쟁 시대의 조각가 틸만 니멘슈나이더를 좀 더 알아보기 위해 관련된 서적을 찾으려 서점을 뒤적이다 발견했기 때문이다. IMF전에 150쪽도 안되는 책이 9천원 가까이 한다면 비싼 책에 속하였다. 이런 경우 출판사가 안팔려도 좋다는 배짱으로 출판했던가 아니면 엄청나게 좋은 책이니 독자들이 알아서 판단하라는 배심 가운데 하나였다. 물론 책을 읽어보니 후자였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서점에서 앞표지만 바뀐 책을 다시 보게 되었다.


조각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분야라 할 것이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주변에서 화강암으로 된 수많은 조각작품을 보며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조각은 우리에게 생소하게 다가온다. 우리와 유럽의 조각이 다른 점이 있다면 유럽의 작품은 유백색의 대리석이란 점이 다를 뿐이었다. 여기서는 박물관의 작품을 중심으로 조각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게 차근 차근 설명해 나가고 있다. 


이 책을 읽어가며 그동안 도록에서 보아왔던 유명 박물관의 조각품의 모습에 이런 부분이 있었구나하는 감탄을 금하지 못하게 하였다. 한 예로 지안 로렌초 베르니니가 1622년에 완성한 <강탈당하는 페르세포네>란 조각은 사진을 통해서도 우리에게 익숙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작품은 언제나 우리에게 정면만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작자는 그 작품의 다른 면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는 촉각적인 실체감을 우리에게 보여주기 위해 약간 벌린 입 사이로 드러나는 치아, 구부린 팔뚝 밑에 간신히 보이는 가슴,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 풀루톤의 오른손이 페르세포네의 허벅지를 누르고, 왼손은 허리를 눌러 살이 움푹 들어가게 되어 있는 표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저자는 조각의 감상은 평면적이 아니라 360도 회전하는 입체적인 감상이 되어야 함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틸만 리멘슈나이더의 조각작품을 볼 수는 없었지만 조각의 다른 세계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무척 즐거웠다. 나는  과연 통일신라시대 미륵반가사유상의 오른손이 왼쪽 볼에 살짝 닿아있는데 과연 볼이 들어간 모습이 표현되어 있을까?  조각의 이런 섬세한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를 이 책은 선사하고 있다. 당신은 박물관을 순례하며 조각에 숨겨진 모습을 얼마나 발견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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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6
존 르 카레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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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소설의 세계는 톰 클랜시가 해박한 군사전문지식을 가지고 등장하기 전까지는 <존 르 카레>와 <프레드릭 포사이스>가 양분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작풍은 판이하게 다르다. <프레드릭 포사이스>가 이언 플래밍의 계보를 답습하면서도 해박한 국제정세와 각국 첩보기관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면 <존 르 카레>는 화려함 대신 소박함을 선택함으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스파이 소설의 원조인 <이언 플래밍>의 007은 스파이 세계의 밝은쪽을 다루고 있다. 밝은면의 스파이 세계는 심각한 갈등이 존재하기 보다는 개인의 화려한 무용담만이 존재한다.  포사이스의 데뷰작인 <쟈칼의 날>은 007과 비슷한 암살자 쟈칼과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이는 조직의 대리인인 르베르 경감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심리적인 유예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과 동지의 구분이 확실하고 자신의 적은 가차없이 제거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존 르 카레의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이러한 등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조직이란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개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나온 작품이다. 63년은 11월 22일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그 후임 존슨의 결정으로 미국은 월남전의 진흙속으로 빨려들어가기를 결정하였고, 공산주의는 악의 대명사였다. 그 시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색을 선택해야만 했다. 회색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지도상에 표시된 것처럼 공산주의의 빨강이냐 민주주의의 녹색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던 시절이다. 이런 시절에 존 르 카레는 회색의 스파이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007처럼 결단을 내리기 보다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의심하는 햄릿형 스파이의 앞날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힘 앞에서  절망하는 리머스는  인형극의 꼭두각시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휘둘리는 힘없고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르 카레의 작품은 스파이 세계의 이런 문제를 극대화한다. 한 예로 저자의 다른 작품 "리틀 드러머 걸"은 영국의 여자 연극배우가 아랍의 테러리스트 두목을 잡기 위한 영국.미국.이스라엘의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역공작 프로그램에 투입되면서 겪는 이야기이다(이 소설은 80년대 다이앤 키튼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여기서도 개인은 조직이 제거해야할 대상을 찾기 위해  던져지는 미끼에 불과하다.  여주인공의 감정은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맞아들어가는 작전에서 예측할 수 없는 장애물 이지만 이것마져도 조직은 이용한다. 르 카레가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에서 보여주었던 기계의 부품으로 움직이는 공작원의 세계는 여기서 한층 더 성숙하게 변모한다.  이제 지구상에는 소련으로 상징되던 추운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냉정한 조직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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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구원
자크 르 고프 지음 / 이학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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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 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습니다>. 루가복음 18장 25절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여러가지로 해석될 수 있지만 이 말의 본질은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왜 어려운가? 돈이 많기 때문에? 부자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또 다른 질문이 파생된다. 돈이 많다면 죄가 많은 것인가? 아니면 죄가 많아야 돈이 많은 것인가? 그렇다면 가난한 자는 죄가 없는가? 가난한 자는 하느님 나라에 쉽게 갈 수 있는가? 이 말의 해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좌파, 우파, 중도파, 극좌파, 극우파, 중도 우파, 중도 좌파로 갈라질 수 있다.  자크 르 코프는 중세의 고리 대금업이 근대적인 은행업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추적해가며 왜 연옥이 탄생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증명하고 있다.

중세시대 고리대금업을 할 수 있는 자는 유대인들 뿐이었다.  유대인들이 고리대금업을 할 때는 교회가 구원의 문제에 신경쓸 필요가 없었다. 유대인은 교회의 밖에 있는 이방인이며 이교도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2세기 유럽의 경제력이 급속하게 팽창하면서 유대인들이 주도하는 고리대금업만으로는 자금의 수요를 충당할 수 없게되자 기독교인 고리대금업자들이 출현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교회는 기독교인이 지옥에 떨어지게 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되자 천국과 지옥의 사이에 연옥을 상정하고 그곳에 죄지은 기독교인들을 수용하였다. 연옥에 수용된 영혼들은 지상에 남아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생각하며 기도를 드리고 미사를 드리느냐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었다. 교회가 고리대금업을 금지한 실질적인 이유는 이자 때문이었다. 이자는 노동의 댓가가 아니라 착취의 개념으로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1492년 에스파냐에서 이슬람 세력이 마지막으로 축출된 뒤 유대인 추방이 뒤따르면서 유럽 각국도 유대인들을 대대적으로 추방하기 시작했다. 이때 서유럽에서 추방된 유대인들은 동유럽(폴란드와 러시아)으로 이동하여 그 지역을 활성화시키는데 일조하게 된다. 왜 유대인들이 추방되었을까? 이제 더 이상 기독교인들은 고리대금업이란 직업으로 인해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란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었다. 유대인은 더 이상 필요없는 존재였다. 그 대신 새로운 신흥 고리대금업자들이 교회와 왕들의 비호를 받아가며 등장하게 된다. 돈과 구원의 세계는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더 이상 의미없는 화두가 되고 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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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쾌락
장 베르동 지음, 이병욱 옮김 / 이학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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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성직자들에게 구약성서의 <雅歌書>는 골치거리였다. 내용으로 볼 때 너무 선정적이 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성서의 한 부분을 구성하고 있는 이 경전을 없앨 수도 없었다. 이러한 고민은 초세기 교회의 교부들도 어느 정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초세기 교부들은 중세의 성직자들 만큼 당혹스러워하지는 않았다. 선정적인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초세기 교부들은 아가서의 주석에 시간을 할애하여 육정적 사랑의 이야기를 신과 인간 사이의 아가페적 사랑으로 승화시켰다.

중세 전반동안 교회는 교부들의 이러한 해석을 바탕으로  남녀간의 성문제를 성서적으로 해석하고 규정하엿다.  이제 사랑은 육제적인 부분을 유예하고 정신적인 부분이 강조되었다. 그리고 결혼을 거룩한 聖事로 규정하므로서 이로인해 발생하는 부부간의 성행위는 사랑의 최종확인이 아니라 자손을 낳은 행위로 축소시켰버렸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부부간에도 아이를 낳기 위해 벌이는 성행위만이 정당하다는 뜻이었다.  이 창조행위의 수행 이외의 목적으로 성행위를 하는 것은 쾌락을 탐하는 죄악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서 교회의 성의 쾌락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교회의 생각을 조롱하며 여전히 성의 쾌락에 탐닉하였다.  

교회의 이러한 간섭은 사람들이 다른 것으로부터 쾌락을 찾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실제로 중세인들은 어떤 작은 계기만 있다면 이를 핑계로 삶을 즐겼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보제>로 알려진 축제였다. 이 축제를 통해 중세인들은 외형적으로 억압된 성의 분출구를 폭음과 폭식으로 풀었으며 여기에 성적인 방종함도 끼어 넣음으로서 교회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비웃기도 하였다.  일반인들이 교회가 인정한 합법적인 축제의 자리에서 노골적으로 억압된 욕구를 분출한 반면 지식인들은 좀더 은밀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즉 교회가 금지한 영역으로 슬쩍 발을 들여놓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들이 택한 방법은 정신적인 쾌락을 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금지된 서적을 읽거나 집 안을 필요 이상 화려하게 장식하고 사냥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특히 사냥은 기사들이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란 조건을 달아 교회가 금지령을 내렸음에도  교묘하게 피해나갔다.

그럼에도 중세는 본질적으로 신의 세계였다. 중세인들은 자신이 이승에서 저지른 죄악에 대해 저승에서 어떤 방식으로든간에 값을 치룬다고 보았다. 그래서 중세인들은 이승에서 저지른 죄에 대한 값을 이승에서 치루고 저승으로 가기를 원하였다. 이를 위해 고백성사는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죄의 고백에 따른 죄에 합당한 댓가를 치루는 보속을 수행하는 것은 자신의 정화를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중세인들은 이를 위해 스페인의 콩포스텔레나 이탈리아의 로마, 잉글랜드의 캔터베리로 순례의 여행을 떠났다. 그 여행의 목적은 이승의 죄로 더럽혀진 영혼의 세탁이었다. 정말로 중세인들은 생 쟈크의 길을 따라 순례여행을 떠나면서  육체적인 쾌락의 죄악이 정신적인 차원의 쾌락으로 대치되는 것을 느끼기는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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