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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 ㅣ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6
존 르 카레 지음, 강호걸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스파이 소설의 세계는 톰 클랜시가 해박한 군사전문지식을 가지고 등장하기 전까지는 <존 르 카레>와 <프레드릭 포사이스>가 양분하고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작풍은 판이하게 다르다. <프레드릭 포사이스>가 이언 플래밍의 계보를 답습하면서도 해박한 국제정세와 각국 첩보기관의 모습을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면 <존 르 카레>는 화려함 대신 소박함을 선택함으로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스파이 소설의 원조인 <이언 플래밍>의 007은 스파이 세계의 밝은쪽을 다루고 있다. 밝은면의 스파이 세계는 심각한 갈등이 존재하기 보다는 개인의 화려한 무용담만이 존재한다. 포사이스의 데뷰작인 <쟈칼의 날>은 007과 비슷한 암살자 쟈칼과 상대적으로 왜소하게 보이는 조직의 대리인인 르베르 경감의 싸움을 그리고 있다. 여기에는 어떤 심리적인 유예상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과 동지의 구분이 확실하고 자신의 적은 가차없이 제거되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존 르 카레의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이러한 등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여기에는 조직이란 거대한 힘 앞에 무력하게 무너지는 개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은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나온 작품이다. 63년은 11월 22일 텍사스의 달라스에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고 그 후임 존슨의 결정으로 미국은 월남전의 진흙속으로 빨려들어가기를 결정하였고, 공산주의는 악의 대명사였다. 그 시절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색을 선택해야만 했다. 회색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지도상에 표시된 것처럼 공산주의의 빨강이냐 민주주의의 녹색이냐를 선택해야만 하던 시절이다. 이런 시절에 존 르 카레는 회색의 스파이를 창조해냈던 것이다. 007처럼 결단을 내리기 보다는 끊임없이 회의하고 의심하는 햄릿형 스파이의 앞날은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둘러싼 거대한 힘 앞에서 절망하는 리머스는 인형극의 꼭두각시처럼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휘둘리는 힘없고 나약한 존재인 것이다. 르 카레의 작품은 스파이 세계의 이런 문제를 극대화한다. 한 예로 저자의 다른 작품 "리틀 드러머 걸"은 영국의 여자 연극배우가 아랍의 테러리스트 두목을 잡기 위한 영국.미국.이스라엘의 정보기관에 포섭되어 역공작 프로그램에 투입되면서 겪는 이야기이다(이 소설은 80년대 다이앤 키튼 주연으로 영화화 되었다). 여기서도 개인은 조직이 제거해야할 대상을 찾기 위해 던져지는 미끼에 불과하다. 여주인공의 감정은 톱니바퀴처럼 아귀가 맞아들어가는 작전에서 예측할 수 없는 장애물 이지만 이것마져도 조직은 이용한다. 르 카레가 추운나라에서 온 스파이에서 보여주었던 기계의 부품으로 움직이는 공작원의 세계는 여기서 한층 더 성숙하게 변모한다. 이제 지구상에는 소련으로 상징되던 추운나라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냉정한 조직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