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크로드의 악마들 - 중앙아시아 탐험의 역사
피터 홉커크 지음, 김영종 옮김 / 사계절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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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지금은 철거된 중앙청에 자리잡았던 중앙 박물관에서 서역 문물전을 개최한 적이 있었다. 호기심을 가지고 들어갔지만 벽화를 뜯어낸 유물들만이 전시되고 있었다. 그 가운데 하체는 뱀이고 상체는 여인인 벽화가 눈을 끌었는데 그 그림의 주인공은 중국 신화에 나오는 인류의 어머니라는 <女왜>였다.


이때 전시된 소장품은 <오타니大谷콜렉션>이라 불리는 서역의 약탈품이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은 오타니콜렉션의 1/3이 한국에 있다는 사실이었다. 서역은 결코 우리에게 혜초나 고선지의 여정처럼 멀리 있는 곳이 아니었다.


대영박물관의 문화재를 원주인에게 돌려준다면 남는 것은 건물뿐이란 웃기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서구 유럽이 제국주의를 확장하면서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유물을 약탈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쉴리만의 트로이 유적 발굴인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도굴이며, 약탈행위였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의 도적행위를 트로이 유적을 발굴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면죄부를 주고 있다.


솔직히 서구 열강이 중앙 아시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러시아의 남진 정책 때문이었다. 특히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식민지였던 인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을 연결하는 남진 저지선을 구축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왜 중앙 아시아 탐험의 원조인 스웨덴 사람 스벤 헤딘이 영국에서 기사작위를 받고 옥스브리지-옥스포드와 캠임브리지를 합쳐서 영국인들은 이렇게 부른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는지 유념해야할 것이다. 오엘 스타인 역시 헝가리출신 유대인이었지만 영국의 식민지 인도의 라호르에서 행정교육을 담당한 사람이었다.


이들 덕택에 중앙 아시아 지역이 샅샅이 탐험되고 더 이상 지도상에 Terra incognita-미지의 땅-로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그 댓가는 너무나 참혹했다. 중앙 아시아에는 더 이상 그 지역의 역사적 사실을 증명할 유물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직 남아있는 것은 폐허와 바람과 모래언덕 뿐이다. 자신의 역사적 실체를 갖지 못한 민족은 그 땅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것이다. 그 지역은 지금의 신장성新疆省지역이다. 그곳은 먼 옛적 서하가 건국되었던 지역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중국에 흡수되어 자신들의 역사를 망각하고 존재마저 위태로운 지경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들이 그곳에 존재했었다는 또는 자신들의 위대한 조상이 이곳에 있었다는 존재감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서구 제국주의자들은 유물의 발굴이라고 항변할지 모른다. 하지만 철저하게 약탈당한 민족은 그 존재마져 위태로운 것이다. 서역의 모래바람은 이제 한 민족의 정체성마저 황량한 타림분지의 고비사막 속으로 뭍어버리려하고 있다. 그 시발점에 약탈의 역사가 존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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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rdandy 2004-09-12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 탐험대(?)가 19세기말 20세기초 중앙아시아에서 가지고나온 유물의 역할에 대해 득실 평형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베제크릭 천불동 벽화 같은 경우는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청조 말기의 혼란 외에도 현지 이슬람교도들에 의한 우상파괴가 꾸준히 진행되어오던 터라 유럽인들의 반출이 없었다면 지금 남아 있는 정도라도 과연 보존이 가능했을까 싶습니다.

그러나 물론 '인류문명의 보존자'로서 찬양 일변도였던 그들에 대한 평가는 오리엔탈리즘의 전형이라고 보아야겠지요. 이런 책은 균형잡힌 시각을 위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서하의 위치는 신장이 아니라 오늘날의 닝샤(寧夏) 회족자치구를 중심으로 하고 깐수(甘肅)성 동부지역과 내몽고자치구 오르도스지역을 포함하는 판도 정도로 알고 있습니다.
 
자산어보 - 흑산도의 물고기들
정약전 지음, 정문기 옮김 / 지식산업사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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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흑산도에 가본 적이 있다. 목포에서 배를 타고 한없이 흘러가다 섬이 보이니 黑山이었다. 그러나 큰 배는 들어가지 못해 작은 배가 마중나와 우리들을 실어 날랐다.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에서 앞 뒤로 흔들리는 작은배의 요동이 무서워 배 가운데서 웅크리고 있던 생각이 난다. 여기서 보름 남짓 보내면서 아주 귀중한 경험을 했다. 80년대 초반의 흑산도는 아직 문화의 해택을 받기에는 먼 섬이었다.  저녁 8시 이후면 다방마다 돌아가던 자가발전기의 소리. 수출 100억불 달성을 일군 시대의 한켠에서는 아직도 제한송전이 실시되고 있었다. 하물며 정약전이 유배를 왔던 시기야 더 말해 무엇을 할 것인가? 섬도 아주 작아 반나절이면 섬을 한바퀴 일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산 정상으로 올라가다 바다쪽으로 난 곳을 가리키며 누군가가 저기가 흑산도 무장간첩사건의 장소라고 하였다. 호기심으로 현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산으로 올라갔다. 정상에서 본 흑산도의 모습은 외로움과 고독에 함몰된 섬과 같았다. 하루 24시간 자신이 원하면 절대고독의 상태에 침잠할 수 있는 섬이 바로 흑산이었다.


80년대 대만에서 최인호 선생의 <별들의 고향>이란 책이 번역되었을 때 제목을 <星星之鄕>이라고 표기한 것을 보았다. 그들의  절묘한 번역에 무릎을 쳤다. 정말로 오묘한 한자의 묘미가 여기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을 두번 반복함으로서 복수의 뜻을 완벽하게 표현했을 뿐더러 반복으로 인한 어감도 살아있지 않은가.  정문기 선생이 번역한 이 책의 <玆> 역시 형태상으로 검을 玄의 복수형 글자처럼 보인다. 검은 것이 두번 겹치니 이는 칠흑과 같은 Œ裏絹풔?것이다. 그러니 이 글자를 현으로 읽든 자로 읽든 뜻은 아주 검다는 의미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책은 내가 <교과서에서 보고 들었던 책>을 찾아 떠나던 순례의 여정에서 만난 책이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부피가 의외로 작은 책이라서 무척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다. 230쪽의 책에 번역문과 원문이 모두 들어있을 정도로 작은 책이었다. 그러나 한자의 포용성을 생각한다면 이것도 아주 많은 분량이 될 수 있으리라.


정약전 선생이 조사 분류한 어류는 인류(비늘이 있는 물고기), 무인류(비늘이 없는 물고기),게류(갑각류), 잡류로 린네의 동물 분류법과는 아주 상이하다.  그럼에도 그 당시 유배지에서 나름대로의 분류체계를 정하고 그 차림대로 물고기를 조사한 선생의 노력은 지극하기만 하다. 책 속의 물고기를 보다보면 우리 흑산도 주변에 이렇게 많은 물고기들이 살고 있었는가하는 놀라움 뿐이다. 정약전선생은 책의 自序에서 <....어보를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마다 그 말이 다르므로 어느 말을 믿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섬 안에 昌大라는 사람이 있었다....성격이 조용하고 정밀하여, 대체로 초목과 어류 가운데 들리는 것과 보이는 것을 모두 세밀하게 관찰하고 깊이 생각하여 그 성질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말은 믿을 만했다. 나는 드디어 이 분을 맞아 함께 물고기의 연구를 계속했다>고 적고 있다.


이 책을 읽다보면 비슷한 시기에 일본에서는 蘭學-네덜란드의 학문을 연구하는 학문-을 연구하며 근대의 길로 들어가는 좌표를 설정했지만  우리는 실사구시. 이용후생이란 구호만으로 끝난 것이 무척 아쉬운 대목이라 하겠다. 일본은 그들이 원한 방향으로 국가를 이끌어 갈 수 있었지만 우리는 몇몇 선각자들의 외로운 외침으로 끝나고 말아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이들 실학자들의 생각과 사상을 담은 저서들은 말 그대로 기록이란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우리의 어류를 어보로 남기기 위해 노력한 정약전선생의 실학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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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 영화, 그 미학과 이데올로기 한나래 시네마 7
곽한주 / 한나래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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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cult란 숭배, 예찬, 열과, 일시적 유행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 속에 컬트의 모든것이 함축되어 있다. 90년대 우리의 영화는 컬트열풍에 휩싸였다. 컬트를 모르면 영화를 모르는 것처럼 이해되기도 했다. 하지만 솔직히 대다수의 사람들은 컬트를 <컬트 삼총사>이상 이해하지 못했다. 아니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하지만 영화적인 코드로 컬트가 반복되면서 사람들은 <브레이드 런너>를 보고 <이레이저 헤드>를 보았다. 하지만 컬트영화가 되기위해서는 한가지 특이한 조건이 첨부되어야만 한다. 대중의 열광적인 환호보다는 소수의 마니아에게 어필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나 <007 시리즈>는 컬트영화로 인정되지 않는다. 컬트 영화의 추종자들은 <프리메이슨>이나 <헤르메스 비밀결사>와 같은 자기들 만의 유대감으로 뭉쳐있다. 이 감정은 자신들이 선택된 자, 혹은 축복받은 자로 여기는 문화적 우월감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컬트의 문화적 코드는 획일적인 사회가 붕괴되면서 다원화될 때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사회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제2차세계대전은 사회의 변화에 큰 역할을 한 사건이었다. 남자를 대신하여 여성들이 전시경제를 이끌어갔고 이로 인해 전후 여성의 발언권이 강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흑인들이 전투병으로 참가하여 유럽에 갔을 때 그들은 유럽의 여성들이 미국보다 인종적 편협함이 적다는 사실에 놀랐다. 흑인들은 유럽에서 백인 여성들과 자유로운 성적 접촉을 갖게되고 이들이 귀국하면서 그동안 폐쇄적이었던 미국 흑인사회에 일대 경종을 울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이 60년대 흑인들의 <공민권 운동>과 백인들의 <월남전 반대운동>이 결합하면서 대변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기존의 가치관에 대한 격렬한 반항이 컬트의 싹을 자라게 하는 촉매가 되었다.


<레쎌웨픈1>에서 멜 깁슨과 대니 글로버가 경찰 지하 사격장에서 사격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멜 깁슨은 대니 글로버보다 훨씬 사격술이 뛰어난 경찰로 나온다. 하지만 군대에서 신물이 나게 총을 쏘아본 사람이라면 실제로는 대니 글로버가 멜 깁슨보다 사격을 더 잘할 것이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이유는 멜 깁슨은 방아쇠를 당기면서 자꾸 눈을 감는다. 눈을 감는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목표물을 놓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반면 대니 글로버는 시종일관 사격술이 굼뜬 역할을 하면서도 방아쇠가 격발되는 순간에도 눈을 똑바로 뜨고 있다. 컬트영화의 감각이란 이런것이 아닐까....


컬트 영화는 사회성과 정치성을 반영하기도 한다. 여기서 반영이란 말은 <찾아냄>이란 단어로 대치할 수도 있다. 컬트는 소수의 영화광들이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중이 열광할 필요는 없다. 그들을 이해하든 이해하지 못하든간에 그것은 부질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 숨겨진 암호문을 찾는 것은 소수의 몫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수의 노력으로 그 영화의 대부분을 이해하고 그 테두리 속에 갇혀 버린다. 이런 점에서 컬트는 무한자유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테두리 속에 갇혀 일정한 형식에 의해 해석되어지는 것은 더 이상 컬트가 아니다. 그것은 컬트를 빙자한 유사제품일 뿐이다. 컬트는 대중매체를 필요로 하지않는다. 컬트는 비밀 결사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컬트는 결코 대중의 입맛에 딱들어맞는 음식은 아니다. 그 음식은 심각하게 불균형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어찌보면 컬트는 퓨젼음식과 유사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전통 음식주의자들에게도 패스트푸드 중독자에게도 기피대상이 된다. 누구도 선뜻 그 생경함에 입맛을 맞추려 하지 않는다. 그 음식이 아니더라도 먹을 것은 많기 때문이다.


컬트는 이러한 특성 때문에 언제서 소수의 대변자 역할을 해왔다. 이 소수는 주류를 바꿀 힘은 없다. 하지만 언제나 주류의 목구멍에 박힌 가시가 되어 주류의 안일함과 고정관념에 일침을 가한다. 에드우드 감독이 패티시즘이나 동성애를 영화로 표현했을 때 그것은 당시 대중들에게 혐오스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성적 관념은 현재는 아주 대범하게 이해되기 시작했다. 이런 점만으로도 컬트는 문화적 고정관념의 산소호흡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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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 빛깔있는책들 - 고미술 30
김태정 지음 / 대원사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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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방 한치의 공간에 우주가 들어있다. 이 우주는 사방팔방으로 뚫려있는 통로이다. 여기에는 오묘함과 현묘함이 존재한다. 그 묘함은 기교가 아니라 자연스러움이다. 전각의 심박세후深薄細厚는 자연의 무쌍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 기교란 없다. 무기교가 기교이고 무위자연의 세계이다.


전각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입문서로서 읽어볼 수 있는 책이다. 전각이란 어떤 것인지 맛만을 보여주는 것이기에 여기서 전문적인 그 무엇을 기대할 수는 없다. 책 사이 사이에 있는 전각 작품과 印材만 보아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전각 작품은 전각에 흥미있는 사람이라면 모사를 해서 직접 작품을 해보아도 좋을만하다고 할 수 있다.


어린 시절 지우개 위에 연필깍기 칼로 자신의 이름을 새겨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새긴 다음 스템프의 파란 잉크를 듬뿍찍어 공책의 앞장에 찍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전각은 그리 낮선 단어가 아닐 것이다. 지우개가 돌로 칼이 조각도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연습뿐이다. 돌을 지우개처럼 능숙하게 다룰때까지... 왜 우리의 교육은 이러한 부분이 중도에 매말라버리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일까? 생각의 자유스러움을 느껴보고 싶다면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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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 빛깔있는책들 - 민속 15
이필영 지음, 송봉화 사진 / 대원사 / 199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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솟대가 위치한 곳은 세계의 중심이다. 즉 그 장소는 <세계의 축軸>이며 <우주의 배꼽Omphalos>이 되는 곳이다. 그곳은 신성한 장소이며 <거룩함과 속됨>이 분리되는 장소이다. 그리고 솟대의 꼭대기에 장식되는 새는 <우주의 새>인 것이다. 이 우주의 새는 고구려에서는 三足烏(새발달린 까마귀)로 표현되었는데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오리로 변형되었다(다만 제주도 지방에서는 까마귀라고 한다). 솟대 위에 우주의 새가 앉아있는 기본 발상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리로 변형된 것은 익히 아는 것이다.


지금도 길을 걷다 보면 점집이나 무당집에 긴 장대를 세우고 깃발을  달아놓은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옛날 신령한 제사장이 위치한 곳에 세웠던 솟대의 변형이 오늘날에도 히미하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솟대에서 하늘의 축이란 의미가 쇠퇴하면서 솟대는 액막이 정도로 의미가 축소되고 말았다. 이후 솟대는 동네 어귀에 세워지는 것이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동네 어귀에 세워짐으로서 악귀가 동네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의미가 되었다. 특히 충청. 경기지방에서는 장승과 함께 세워져 솟대 본래의 의미가 많이 쇠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솟대는 여전히 신성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솟대를 만드는 나무는 신령한 것으로 여겨 함부로 훼손할 수 없다고 여긴다.


솟대는 동북아시아 샤만니즘 문화권(몽고, 시베리아, 만주, 한반도, 일본)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다만 우리의 솟대는 몽고,만주,시베리아와 달리 농경문화에 걸맞는 모습으로 변형되어 있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우리 역사에서 솟대의 역사는 아주 오래 되었다. 단군이 아사달의 神檀樹 아래 도읍을 정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나타나듯 우리민족의 삶이 시작된 곳은 바로 정신적 우주의 중심인 신단수 아래였던 것이다. 이 신단수에서 神市를 열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나라를 다스렸음은 잘 알고 있는 바이다. 이 신단수는 그리스 민족의 정신적 중심인 올림포스와 똑같은 의미를 지닌 곳이다. 솟대는 이러한 정신이 살아 숨쉬는 우리의 탯줄이며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 주는 우주의 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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