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시록의 사기사
E 펜체프 / 평민사 / 198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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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의 기록에 따르면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는 징표로 말을 탄 네 기사가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 기사들이 상징하는 것은 정복, 전쟁, 굶주림, 죽음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묵시록의 기사는 공해, 가난, 기아, 폭력이라고 본 저자는 제시된 문제에 대한 지식의 폭을 넓히고 자극하기 위해 이 책을 기술했다고 서문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 책은 한사람의 저술이 아니라 각 분야에 정통한 학자들의 논문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책의 전후에 상관없이 자신이 흥미를 갖는 분야부터 읽어도 별 문제가 없다.


인간의 4대 문제인 공해, 가난, 기아, 폭력의 문제는 한 지역, 한 국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지구라는 단 하나의 터전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기에 전 인류의 관심사가 되어야만 한다.


공해문제만 해도 그렇다. 우리의 이웃에는 세계의 공장으로 변해가는 중국이 자리잡고 있다. 중국에서 한국으로 부는 이동성 고기압은 중국의 공해물질을 우리쪽으로 이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우리만 아무리 공해대책을 세운다해도 중국과 공조가 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60-70년대의 공해의 주범은 대기 오염이었다. 대기오염은 공장의 굴뚝이나 자동차에서 나오는 것으로 선진국의 책임이 컸었다. 하지만 현재는 개발도상국까지 여기에 합세함으로서 대기오염을 규제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게다가 개발도상국이나 후진국은 70년대 이후 농업생산량을 증대하기 위해 과도한 화학비료를 사용함으로서 토지오염이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후진국형 공해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공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전지역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한 해결책은 어떤 것일까?  한 예로 선진국들은 브라질과 인도네시아의 과도한 벌채를 비난하고 있다. 이들은 이 벌채로 인하여 지구의 대기 오염이 가속화되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브라질과 인도네시아는 자신들의 행위가 바로 선진국들이 현재의 위치에 오르기까지 했던 과정임을 항변하고 있다. 어느쪽이 옳을까?


가난의 문제는 부의 분배와 직결되는 예민한 문제이다. 분배는 잘못 이해될 때 산을 깍아 골짜기를 메워 평지로 만드는 것으로 오해될 수 있다. 이것은 분배가 아니라 약탈인 것이다.  분배란 그 분배를 통해서 사회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고점으로 끌어올리는 하나의 자극제와 같은 것이다. 발전의 잠재력을 극대화 시키는 분배라는 자극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가난의 모습은 변할 수 있다. 가난이란 벗어날 수 없는 질곡이 아니라 노력에 의해 언제든지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여야만 진정한 분배의 사회가 되는 것이다. 가난과 함께 찾아오는 것이 굶주림이다. 굶주림과 가난은 위정자들의 실책으로 유발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예로 동남아 최대의 쌀 생산국이던 미얀마가 네윈의 사회주의정책으로 말미암아 한때 쌀 수입국으로 변모했던 사실은 정책의 중요성을 다시한번 일깨우게 한다. 굶주림과 가난이 만연하는 사회는 결코 안정될 수 없다. 왜 농업국인 제3세계의 국가들이 항시 식량부족으로 고통을 당하는가는 위정자들이 깊이 숙고해보아야 한다.  그것은 자연재해보다는 인재의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지를 가장 확실하게 관철시키는 방법은 폭력이다. 그만큼 폭력의 유혹은 달콤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폭력이 국가를 중심으로 조직적으로 행해질 때 그것은 인간성에 대한 억압이 되고 압제가 되는 것이다. 폭력은 항상 수단이 목적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생각할 때 자행되는 것이다. 폭력이란 육체적인 것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모든 것에 해당되는 것이다. 폭력이 조직화되면 그 폭력의 희생자는 언제나 무고한 민간인일 수밖에 없다.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시절 '추악한 전쟁'의 희생자들은 모두 민간인들이었다. 즉 폭력의 희생자는 외부의 적이 아니라 내부의 적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을 향하는  것이다. 구금, 고문, 사형은 국가가 개인에게 저지르는 가장 추악한 범죄인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4가지의 해악이 우리를 어떻게 옭죄고 있는가를 알려주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널리 알림으로서 그 해결책을 찾고자 한다. 이 책에서 제시하고 있는 문제는 과거형이 아니라 지금도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아쉬운 점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논문들이 70년대 이전의 것이기에 지난 30여년간 축적된 이 분야의 업적을 고려하며 읽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은 지금이나 그때나 변함이 없다는 사실 또한 놀라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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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치-22 -상
조셉 헬러 지음 / 실천문학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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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70년대까지만 해도 미국 대학생들이 꼭 읽어야할 3대 소설이 있었다고 한다. 그 첫째는 J.D. 셀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두번째는 켄 케이시의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세번째가 죠셉 헬러의 '캐치-22'다.


이 세 소설은 모두 집단과 개인간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가운데 죠셉 헬러의 소설은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그것은 이 소설이 아주 유쾌한 '반전소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반전적인 것을 생각하면 항시 'M.A.S.H.'가 떠오르지만 이 소설은 매쉬보다 훨씬 훌륭한 소설이다.


이 소설은 지중해 엘바섬 남쪽 8마일 상에 위치한  섬인 '삐아노사'가 무대이다. 이 섬에 주둔한 폭격기 부대가 소설의 주무대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은 상식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한참 소설에 열중해 그 희극성에 웃다보면 그 밑바닥에서부터 스멀 스멀 올라오는 그로테스크한 엽기적인 상황은 이 소설이 단순한 반전 소설이 아님을 보여준다. 군인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물들은 명령의 수령과는 거리가 멀다. 군대라는 한정된 공간이 오히려 자유스러움의 공간으로 변질된다는 그 설정 자체가 우리를 당혹스럽게 한다.


요싸리안은 자신이 정신 이상이기 때문에 폭격을 나갈 수 없다고 버티며, 7센트에 사온 달걀을 5센트에 팔아 전 세계 달걀시장을 장악하려는 밀로는 독일군과 계약하여 자신의 부대를 폭격한다. 창녀만을 사랑하는 네이틀리나 창녀만 보면 죽이려 드는 알피의 행태는 전쟁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한번쯤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은 1961년에 출판되었지만 이 소설이 대중들에게 강하게 인식된 계기는 영화때문이었다. 1970년 졸업의 마이크 니콜스 감독이 알란 아킨, 아트 가펑클, 존 보이트, 안소니 퍼킨스, 오손 웰스등을 기용하여 영화를 만들었다. 이 영화의 인기로 소설은 엄청난 반향을 불러 일으키게 되었다.


**미국의 월남전 패배는 어찌보면 컬러 텔레비전의 영향이 컸다고 볼 수 있다. 잔혹한 전쟁의 장면이 여과없이 선명한 색채를 띠며 안방으로 전송되었을 때 사람들은 당연히 전쟁 그 자체에 혐오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 영화 역시 미국이 월남전의 수렁에서 반전데모의 물결이 출렁이는 시기에 나왔다는 점 역시 의미심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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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군국주의를 벗긴다
와카쓰키 야스오 / 화산문화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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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국주의는 무모함과 하다보면 어찌되겠지 하는 막연성의 결합이 가져온 산물이었다. 일본이 근대적인 전쟁을 하면서 화력과 무기의 성능과 보유량에서 적과 대등하게 싸운 전쟁은 러-일 전쟁뿐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기관총으로 대표되는 근대전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본 군대의 현대화를 지연시켰다. 그 이유는 산업화의 부진과 지도부의 낡은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이 결과 일본의 군사력은 아시아에서는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할지는 몰라도 유럽 열강과의 격차는 엄청났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일차대전에 참전하지 못함으로서 현대전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일본이 현대전 다운 전쟁을 경험한 것은 '노몬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일본은 한수 아래로 평가하던 소련의 적군에게 완패를 당함으로서 총검돌격과 참호전으로 무장한 일본의 군사력이 얼마나 과대평가되었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시작할 때까지 현대전의 필수인 보급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개선을 이루지 않았다. 일본 군부의 생각은 보급이란 공격해서 탈취하는 중세시대의 사고방식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현대전이 전방과 후방의 구분이 없는 총력전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채 전쟁을 시작한 일본 군부의 무모성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 가운데 그나마 현대전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던 집단은 해군이었다. 이들은 항모를 이용한 기동작전의 유효성을 확신하고 실제로 이를 이용하여 미국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거함 거포주의의 망상에서 벗어나 항모에서 출격하는 비행기로 상대의 배를 격침시키는 작전을 입안하여 세계 최초로 영국의 전함을 비행기로 격침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족한 물자와 빈약한 공업력은 해군의 이러한 전략을 지원해 줄 수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일본 군부의 현대전에 대한 몰이해와 빈약한 공업력은 전쟁이 일어나 물자가 비축된 초기에는 결점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서서히 취약점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특징이라고 이해되는 '정신력의 군대'가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런 강요는 옥쇄와 가미카제라는 비인간적인 전술로 비약된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가 영웅적인 행위로 칭송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항복한 적에 대한 어떤 연민감도 느낄 수 없게 된다. 이런 환경이 일본군이 포로를 학대하는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적의 군대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에서 초반에 영국으로부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영국이 본토 방위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은 독일과 피말리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로인해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에는 최소의 병력만을 주둔시켜놓은 상태였다. 영국은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인도를 아시아 식민지 방어의 핵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또한 독일에 일찌감치 항복하여 인도차이나반도에 대한 통제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연유로 일본군은 초기에 엄청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당시 태평양에서 일본군에게 저항할 유일한 군대는 미국이었지만 미국 역시 몬로주의의 영향으로 전쟁 준비에 충실한 상태가 아니었다. 일본은 초기의 승리를 과신한 나머지 자신들이 그동안 느껴왔던 취약점에 애써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거대한 공업력으로 압도해 오자 일본은 즉각 수세로 전환하게된다. 미국의 공업력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를 정도로 막강했다는 사실은 일본군의 초반 불패신화에 가려져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대목이다.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는 잘되어 나가고 있는데 굳이 뭐라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부 반대자들은 이에 저항했지만 그것은 거대한 물줄기를 돌리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그리고 패전하자 자신들이 어떤 체제에 살았는가에 대해 애써 침묵하고 있다. 이런 침묵은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까지 확대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군국주의가 아시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대신, 군국주의가 아시아를 서양의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아전인수식의 주장을 한다. 이는 일본 자신이 서구 제국주의자들 대신 새로운 지배자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구호를 앞에 내세웠다. 이를 위해 중국의 왕조명, 인도의 찬드라 보스, 인도네시아의 하타와 같은 사람들을 이용했다. 이런 역사적 친일은 일본이 항시 아시아에도 그 당시 일본을 이해하는 인간들이 있었다는 괴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인으로서는 태평양전쟁을 격은 마지막 세대가 기술한 역사의 보고서이다. 전쟁을 격은 세대답게 전쟁의 무모함과 비참함을 잘 알고 있기에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전쟁의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에 들어간다-라는 구호대로 아시아인으로부터 경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은 서구로 편입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한 것이다. 과거의 사실로부터 오늘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시아인도 유럽인도 될 수 없는 일본의 모습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자초한 고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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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기행 - 서기 천년의 일상과 삶
로버트 레이시, 대니 단지거 지음 | 강주헌 옮김 / 청어람미디어 / 199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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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지형은 남쪽의 해안지대는 낮고 북으로 올라갈 수록 높아지는 지형이다. 그리고 영국 주변으로 멕시코 난류가 흘러들기 때문에 겨울에도 잉글랜드 남부, 웨일즈, 아일랜드는 연평균기온이 10도정도를 유지한다. 이러한 조건은 침입자들에게 브리튼이란 섬이 매우 매력적으로 보이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브리튼 섬의 원주민은 켈트족이었지만 이들은 곧 앵글족과 색슨족에게 밀려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로 쫓겨났다. 앵글족과 색슨족은 이후 잉글랜드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고, 실질적인 영국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이들은 1066년 노르망디의 공작인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앵글로-색슨족의 왕국은 앵글로-노르만 왕조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영국은 극심한 변화를 격게된다. 이 책은 바로 윌리암의 침략이 있기 전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역사학자들은 40년대까지만 해도 브리튼의 진정한 역사의 시작은 윌리엄의 정복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관례였다. 이 정복으로 대륙의 봉건제가 이식되어 잉글랜드 주도의 브리튼 통합작업이 진행되면서 봉건화가 진행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40년대부터 서서히 영국에도 침략 이전에 대륙과 유사한 봉건제도가 존속하며 독자적인 봉건제도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역사적 증거가 드러나 지금은 영국의 봉건제도는 대륙의 영향이 아니라 자체내에서 발전한 제도에 대륙의 제도가 들어와 혼합되면서 독특하게 발전하였다고 본다.

여기서는 바로 앵글로-노르만시대가 아니라 이전인 앵글로-색슨 시대의 잉글랜드를 조명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의 저자도 이 점에 맞추어 책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상황임에도 앵글로-색슨족의 역사적 상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정복왕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이 앵글로-색슨의 모든 흔적을 지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유민이었던 앵글로-색슨의 원주민은 하루 아침에 지배자에서 피지배자의 신분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로빈 훗의 이야기는 윌리엄 정복왕의 시대로부터 100년이 조금 넘은 시점의 이야기이다. 이때 벌써 원주민인 앵글로-색슨족은 통치자인 노르만족에게 엄청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어떻게보면 노르만의 잉글랜드 정복은 진보란 면에서보면 후퇴의 사건일수도 있다. 실제로 이 책을 읽어보면 침입 이전의 앵글로-색슨족의 사회는 매우 공평하고 풍요로운 사회였음을 증명하고 있다. 오히려 정복자들이 이 제도의 혜택을 받아 발전할 수 있었다. 그 원동력은 앵글로-색슨시대의 전통을 들수가 있다. 앵글로-색슨족은 구성원이 법적으로 자유민이었다. 자유민이란 말 그대로 자신의 땅을 가지고 농사를 지으며 전시에는 병사로 변하는 병농일치제의 사회 구성원이었던 것이다. 윌리엄과 헤이스팅스에서 해롤드의 지휘를 받아 싸운 군대가 바로 이런 형태로 모집된 군대였다.

여기에는 1000년 경의 잉글랜드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그것은 영국인들이 영국적이라고 부르는 것 이전의 시대를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전통이 영국적인 것의 바탕이 되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정복왕의 자손들은 언제나 프랑스어를 궁정용어로 구사하고 있었고, 섬보다는 대륙에서 보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왕들이 잉글랜드의 토속어인 영어를 구사한 것은 헨리 4세때 부터이다. 왕실이 프랑스어에서 영어로 상용어가 바뀌는 과정이 바로 정복자들이 앵글로-색슨의 사회에 동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바로 이후부터 영국적인 것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원천을 바라보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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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 나랏말쌈 16
이제현 지음 / 솔출판사 / 199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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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옹패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앞 부분은 제왕의 일화나 그 시대의 세태를 기록하였다면, 뒷 부분은 중국의 시와 우리의 시를 감상하도록 되어있다. 솔직히 앞 부분은 잘 읽히지만 시를 기록한 뒷 부분은 재미있게 읽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漢詩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책이 재미있는 이유는 무인정권 시기와 원의 간섭을 받는 시기에 살아가던 한 지식인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익재益齋-이제헌의 호-가 살아가던 시기는 격동의 시기였다. 그 격동의 시기에 지식인으로 살아간 익재의 행동 하나 하나는 앞으로 대두될 유학자들의 삶을 미리 보여준 것인지도 모른다. 익재는 고려가 비록 원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그것은 무력에 의한 것일뿐 원은 결코 고려를 마음으로 심복시키지 못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익재의 마음만이 아니라 모든 고려사람들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려는 우리의 중세에 해당하는 시기임에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는 왕조이다. 고려시대 우리 민족은 역사상 가장 크게 중국을 압박했던 세 민족-거란, 여진, 몽골-과 차례로 격돌하며 동북아의 균형추 역할을 했던 왕조였다. 특히 몽골은 자신들의 배후에 위치한 고려를 30여년에 걸친 침공에서도 굴복시키지 못함으로서 몽골의 세계전략에 큰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쿠빌라이는 고려가 강화를 요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자 옥좌에서 뛰어 내려와 사신을 맞이할 정도로 기뻐했다하니 고려의 저항이 얼마나 끈질겼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고려의 지식인으로 세상을 보는 눈은 어떠하였을까? 익재는 결코 회색인으로 삶을 살아가지는 않았다. 그의 행적을 보면 그는 영원한 고려인이었다. 원이 고려의 국호를 없애려 했을 때 익재는 글과 말로 이를 저지했으니, 사직을 보존한 점에서는 서희보다 더 뛰어나다 하겠다.

역옹패설은 국어시간이라든가 국사시간에 배운 그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수필문학이다. 하지만 그 최초의 문장을 읽어서 자신의 뼈와 살과 피로 만들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구슬이 서말이라도 꾀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다. 책 곳곳에 은근히 스며들어있는 고려인의 우월성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특히 뒷 부분 시를 다루고 있는 곳에서는 중국의 시와 고려의 시를 비교하면서 우리의 실력도 결코 중국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자랑하고 있다. 여기에서 정지상의 그 유명한 <送人>이란 시를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부록으로 익재난고의 일부분이 번역되 있는 것은 역자의 보너스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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