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군국주의를 벗긴다
와카쓰키 야스오 / 화산문화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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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군국주의는 무모함과 하다보면 어찌되겠지 하는 막연성의 결합이 가져온 산물이었다. 일본이 근대적인 전쟁을 하면서 화력과 무기의 성능과 보유량에서 적과 대등하게 싸운 전쟁은 러-일 전쟁뿐이었다. 일본은 이 전쟁에서 기관총으로 대표되는 근대전을 처음으로 경험하였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일본 군대의 현대화를 지연시켰다. 그 이유는 산업화의 부진과 지도부의 낡은 사고방식 때문이었다. 이 결과 일본의 군사력은 아시아에서는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할지는 몰라도 유럽 열강과의 격차는 엄청났다. 일본의 군국주의는 일차대전에 참전하지 못함으로서 현대전을 경험하지 못하였다. 일본이 현대전 다운 전쟁을 경험한 것은 '노몬한 사건'이었다. 여기서 일본은 한수 아래로 평가하던 소련의 적군에게 완패를 당함으로서 총검돌격과 참호전으로 무장한 일본의 군사력이 얼마나 과대평가되었는지를 절감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미국과 태평양 전쟁을 시작할 때까지 현대전의 필수인 보급의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개선을 이루지 않았다. 일본 군부의 생각은 보급이란 공격해서 탈취하는 중세시대의 사고방식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결과 현대전이 전방과 후방의 구분이 없는 총력전이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한채 전쟁을 시작한 일본 군부의 무모성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일본 군국주의자들 가운데 그나마 현대전을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던 집단은 해군이었다. 이들은 항모를 이용한 기동작전의 유효성을 확신하고 실제로 이를 이용하여 미국을 공격하였다. 그리고 거함 거포주의의 망상에서 벗어나 항모에서 출격하는 비행기로 상대의 배를 격침시키는 작전을 입안하여 세계 최초로 영국의 전함을 비행기로 격침시키는 쾌거를 이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부족한 물자와 빈약한 공업력은 해군의 이러한 전략을 지원해 줄 수없다는 약점이 있었다.


일본 군부의 현대전에 대한 몰이해와 빈약한 공업력은 전쟁이 일어나 물자가 비축된 초기에는 결점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서서히 취약점이 드러나게 된다. 이런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본군의 특징이라고 이해되는 '정신력의 군대'가 강조되기 시작한다. 이런 강요는 옥쇄와 가미카제라는 비인간적인 전술로 비약된다. 그리고 이런 비인간적인 행위가 영웅적인 행위로 칭송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항복한 적에 대한 어떤 연민감도 느낄 수 없게 된다. 이런 환경이 일본군이 포로를 학대하는 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일본 군국주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무적의 군대가 아니었다. 일본군이 동남아시아에서 초반에 영국으로부터 승리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영국이 본토 방위를 최우선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은 독일과 피말리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로인해 동남아시아의 식민지에는 최소의 병력만을 주둔시켜놓은 상태였다. 영국은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인도를 아시아 식민지 방어의 핵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또한 독일에 일찌감치 항복하여 인도차이나반도에 대한 통제권을  겨우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연유로 일본군은 초기에 엄청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당시 태평양에서 일본군에게 저항할 유일한 군대는 미국이었지만 미국 역시 몬로주의의 영향으로 전쟁 준비에 충실한 상태가 아니었다. 일본은 초기의 승리를 과신한 나머지 자신들이 그동안 느껴왔던 취약점에 애써 눈을 감을 수 있었다. 하지만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거대한 공업력으로 압도해 오자 일본은 즉각 수세로 전환하게된다. 미국의 공업력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동시에 전쟁을 치를 정도로 막강했다는 사실은 일본군의 초반 불패신화에 가려져 별로 주목을 받지 못하는 대목이다.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일본인들의 태도는 잘되어 나가고 있는데 굳이 뭐라고 할 필요가 있겠는가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부 반대자들은 이에 저항했지만 그것은 거대한 물줄기를 돌리기에는 너무 미약했다. 그리고 패전하자 자신들이 어떤 체제에 살았는가에 대해 애써 침묵하고 있다. 이런 침묵은 천황의 전쟁 책임론에까지 확대되어 있다. 일본인들은 군국주의가 아시아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고통을 주었는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대신, 군국주의가 아시아를 서양의 제국주의자들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아전인수식의 주장을 한다. 이는 일본 자신이 서구 제국주의자들 대신 새로운 지배자였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은 아시아의 지배자가 되기 위해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구호를 앞에 내세웠다. 이를 위해 중국의 왕조명, 인도의 찬드라 보스, 인도네시아의 하타와 같은 사람들을 이용했다. 이런 역사적 친일은 일본이 항시 아시아에도 그 당시 일본을 이해하는 인간들이 있었다는 괴변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인으로서는 태평양전쟁을 격은 마지막 세대가 기술한 역사의 보고서이다. 전쟁을 격은 세대답게 전쟁의 무모함과 비참함을 잘 알고 있기에 전쟁의 당사자인 일본의 책임을 더욱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전쟁의 책임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일본은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탈아입구-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에 들어간다-라는 구호대로 아시아인으로부터 경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렇다고 일본은 서구로 편입될 수 없다는 점 또한 분명한 것이다. 과거의 사실로부터 오늘의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시아인도 유럽인도 될 수 없는 일본의 모습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신이 자초한 고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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