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절
장-자크 피슈테르 지음, 최경란 옮김 / 책세상 / 199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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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관심이 옆으로 새는 경우가 종종 있다. 쥐스킨트의 '향수'를 읽다가는 향수 제조법에 흠뻑 빠져 그에 관한 책들을 찾아 다니고, 폴코의 '사형 집행관'에서는 유럽의 형벌사를 섭렵하기도 했다. 피슈테르의 '책'에서는 고서의 제본에 관한 방법이 나의 흥미를 끌었다. 지금처럼 기계가 모든 것을 대신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 하나 장인의 흔적이 남겨진 책을 만들던 시대의 방식이 나를 다른 시대로 끌고가는 느낌이었다. 학생시절 청계천가에 늘어선 헌책방을 순례하면서 느꼈던 매케한 책곰팡이 냄새, 그리고 순례가 끝난 뒤에 책 먼지로 시꺼매진 손가락을 가방에 닦으며 왠지모른 포만감으로 뿌듯했던 그때가 생각난다. 그때 헌책방의 뒤켠에 무더기로 쌓여있던 잡지더미에서 우연히 보았던 내셔널지오그래픽... 친구들과 몰래보던 야한 잡지에서나 볼 수 있는 대담한 사진이 실린 고급스런 잡지를 봤을 때의 그 혼란스러움은 무엇이었을까?


피슈테르의 책을 읽으며 나는 30년대의 책방을 순례하는 느낌을 받았다면 너무 과장된 표현일까? 이런 것은 작가들이 독자들에게 선사하는 하나의 보너스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보너스의 가치는 어떻게 느끼느냐의 차이일뿐이지만. 이 책에 대한 평을 한 줄로 표현하자면,


 " ....  사랑이 깊으면,  외로움도 깊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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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들누드 1
양영순 지음 / 팀매니아 / 199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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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 태어난 아르헨티나의 만화가인 프란치스코 솔라노 로페즈Francisco Solano Lopez의 작품을 보면 그 성의 대담함과 솔직함은 우리의 눈을 벙벙하게 만든다. 그의 작품은 그림의 정교함은 둘째치고 대사가 하나도 없이 그림만으로 자신이 하고자 하는 性談論을 유려하게 펼쳐나간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그리고 한가지 더 놀라운 사실은 이 그림을 그린 작가가 70이 넘은 작가라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성담론은 미지의 세계, 호기심의 세계로 표현되는 젊은 작가의 관점과는 약간 다른 시점에서 성을 즐겁게 바라보고 있다. 솔라노 로페즈의 작품은 워낙 적나라해서 한국에서 출간되려면 좀더 시간이 필요한 작품이라고 할 수있다.


누들 누드가 나올 당시 20대 후반이던 양영순의 작품은 솔라노 로페즈보다는 확실히 직설적이면서 성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실험정신이 돋보인다.  그러면서도 젊음의 혈기가 그려내는 상상의 기발함은 정말로 훌륭하다. 양영순이 나이가 들어 장년이 되고, 이순이 되면 솔라노 로페즈와 같은 원숙함의 세계가 펼쳐질 수 있을까. 그것을 기다리는 것 역시  즐거운 상상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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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문명사
버나드 루이스 / 이론과실천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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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그라의 세계에 한번 접해본 사람들은 이슬람 문명의 끝이 어디일까하는 궁금증을 느끼게 된다. 투그라는 이슬람의 문자를 기묘하게 변형시킨 예술이다. 그러면서도 그 속에는 모든 것이 들어있다. 이슬람이란 세계는 마치 투그라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투그라는 그림이나 낙서로 보인다. 하지만 그 세계가 익숙하고 일상적인 사람들에게는 투그라는 하나의 의미로 다가온다. 의미와 그림이 합쳐질 때 그 뜻은 배가되어 나타난다. 우리는 동양의 역사에서 중국 역사의 방대함에 놀라지만 그와 쌍벽을 이루는 이슬람 문명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이슬람 문명이라고 할 때 우리는 사막과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묘사된 병 속의 지니처럼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형체없는 문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오해는 이슬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이슬람을 볼 때 우리는 서구라는 프리즘을 통해 간접적으로 볼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왜곡된 이슬람 상은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한 '문화 제국주의'의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서구의 이런 왜곡상은 이슬람이 그리스도교 세계의 파괴자란 인식으로 고착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왜곡상은 이슬람 세계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서만 교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이슬람 세계를 바르게 이해하는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무슬림 지배하의 스페인(9장)이나 무슬림 음악의 세계(6장), 신비주의(4장)같은 부분은 그 자체로도 훌륭한 이슬람 종교사이며 예술사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슬람 세계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이 확대되는 이슬람 세계는 서구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켜 '문명의 충돌'이라는 거창한 담론까지 나오게 하였다. 이런 담론이 나오게 된 이유는 바로 이슬람 세계에 대한 무지와 두려움에서 기인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책 역시 서구인들의 관점에서 본 이슬람 문명사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서구의 세례를 받은 우리들에게 이 책의 논점과 기술은 매우 익숙하고 친숙한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이슬람 문명을 이해하는데 또 다른 걸림돌이 되지 않을지.... 진정한 아랍인이 쓴 아랍의 문명사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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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열전
김영수.김경원 지음 / 선녀와나무꾼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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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에 보면 신하가 저지르는 여덟가지 간사한 행동八姦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여기에는동상同床, 재방在旁, 부형父兄, 양앙養殃, 민맹民萌, 유행流行, 위강威强, 사방四方이 있는데 이것이 신하가 임금에게 행하는 대표적인 간사한 행동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동상은 임금이 총애하는 여자를 이용하는 것이고, 재방은 군주를 곁에서 모시는 자들을 이용하여 임금의 환심을 사는 법이다. 부형은 군주의 적자나 사랑하는 자식을 이용하는 법이고, 양앙은 군주의 취미를 이용하는 법이다. 그리고 민맹은 군주가 해야할 상벌을 신하가 대신하는 것이고, 유행은 군주가 궁궐밖 세계와 접촉할 기회가 적은 것을 이용해 군주의 환심을 사는 법이다. 위강이란 군주의 신임을 빌미로 자신이 호가호위하는 것을 말하고, 사방이란 군주에게 자신들보다 큰 나라의 위험을 강조하여 군주를 자신에게 의지하게 하는 법이다.

간신들은 이런 방법을 통해 군주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어 결국은 망국의 지경으로 나라를 몰고간다. 그럼에도 왜 군주들은 간신들을 물리치지 못하는 것일까? 그것은 간신이 군주의 입맛에 맛는 것만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왜 알 수 없는가?  그것은 군주와 세속세계와의 단절이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간신은 그 필연적인 간극을 자신의 간사함으로 채우는 것이다. 간신이 좋아하는 토양은 병균이 발아하는 조건과 유사하다. 간신은 이런 토양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것을 양분삼아  자라기 시작한다.

간신은 전체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전체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도 이를 외면하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신의 개인 영달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세계는 언제나 자신과 비슷한 무리들로 채워져 있다. 이 무리들을 묶어놓는 것은 마음으로 우러나오는 단결이 아니라 잇속으로 얽혀진 결탁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잇속이 사라지면 그 묶임도 해체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의 흥망이라도 상관없다. 그들에게는 자신에게 이익을 주는 집단이나 개인이 섬기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멀리 이완용이나 송병준을 바라볼 필요도 없다. 현대사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권력자의 눈치를 보며 국민들을 고통속으로 몰아넣었는가? 그들은 당대에는 이것이 국민을 위하는 길이라고 강변하였지만 그 결과는 고통이었던 것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 고통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바로 이 무책임 역시 간신들의 한 특징인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이렇게 말한다. 나는 윗분의 말을 그대로 실행했을 뿐 아무런 책임이 없습니다. 우리는 5년마다 정권이 교체되는 민주정체속에서 살고있다. 하지만 5년을 주기로 우리는 감옥의 행진을 감상한다. 전 정권의 실세들이 새로운 정권의 한탕 쇼에 걸려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감옥에 가는 것이 정례화되어 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 정치의 상황은 간신들이 아주 좋아하는 분위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아무도 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혹한 형리가 동지가 다가오는 것을 보며 아쉬워하는 것처럼 법이 정치하는 자신들을 너무 얽맨다고 불평만 뱉어낼 뿐이다. 한 예로 정치자금법도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것을 지지했던 인간들로부터 고쳐야한다는 말이 나오고 있다. 이것은 그들이 진정으로 고통을 나누며 국민의 편에서 일을 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은근슬쩍 보여주는 작태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관용이 간신배들이 자라나는 토양이 된다는 점은 명확하다.

간신이 발을 붙이지 못하는 사회는 개방된 사회이다. 모든 것이 철저하게 드러난 투명한 사회는 음습한 곳에 비추는 햇볕과 같은 것이다. 이솝우화에서 보듯 투명한 사회를 만드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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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행군
장 클로드 갈, 장 피에르 디오네 외 글 그림 / 문학동네 / 199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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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이 주장에 찬성표를 던진다. 아주 오래전 10원에 24권의 만화를 볼 수 있던 시절, 만화는 어떤 상상력을 자극하는 매체였다. 그리고 60년대 후반 일본의 학습만화가 홍수처럼 번역되어 출판되었을 때 만화로 이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80년대 대만작가 채지충의 고전만화를 보았을 때 이제 만화가 표현할 수 없는 분야가 없구나란 생각을 했다. 90년대, 몇몇 출판사들이 일본에 치우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하며 유럽의 만화를 소개하기 시작하였다.

우리도 이전에 죽음의 행군과 같은 만화가 있었다. 이른바 '만화 소설'이라는 장르였다.  그 대가는 '박기당'선생이었다. 그러나 만화와 장문의 글이 조합된 만화는 그리 인기를 끌지 못했다.  이 만화는 예전에 보았던 박기당 선생의 작품과는 반대로 그림이 많이 있고 글이 적은 만화였다. 그림 속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은 어찌보면 피곤한 일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윌리를 찾아라'에서 얼마나 많은 윌리를 찾을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이 만화 속에서 상징적인 그림을 찾는다는 것은 극히 어렵고 생소한 작업일 수 있다. 이 만화에서 문제는 질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인 것이다. 읽는 독자는 이런 것을 좋아하고 저런 것을 싫어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의 취향이기 때문이다. 

대성당의 비밀에서 대주교가 완성된 성당의 제단에서 성작을 들어올리는 장면이 있다. 가톨릭의 미사에서 성작을 거양한다는 것은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피로 성변화하는 신비의 순간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대주교는 그 신비를 자신의 영광으로 대치하고 있다. 그 오만의 결과는 성당의 무너짐이다.  신이 우리에게 위에서 밑으로 내려주는 것은 은총뿐만이 아니라 중력도 있다. 중력, 그것은 신의 징벌이 아닐까. 하나 더, 정복자의 군대에서 대장의 천막에 걸려있는 휘장은 마치 알렉산더 대왕의 태양깃발과 유사하지 않은가?  이 만화의 작가는 알렉산더의 정복이라는 과업보다는 그가 그 정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안겨준 고통의 심판을 그리려 했는지 모른다.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주어진 만화의 세계는 아주 적은 부분이다. 그 적은 부분을 통해 여러가지를 맛보려한다는 자체가 욕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기회를 제공한 출판사의 노력은 보답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우리는 여러가지 음식을 맛볼 수 있으니까....

끝으로 아론의 복수 마지막 장면에서 라스켈이 군중 사이에서 죽은 아론의 모습을 보는 장면은 브레이브 하트의 마지막 장면에서 윌리엄 윌레스가 죽음의 순간에 애인의 모습이 군중 속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이 만화는 언뜻 영화를 찰영하기 위해 먼저 그려본 그림같은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다른 면에서는 그림속의 퍼즐을 찾는 게임과 같다. 그 게임에 참여하느냐 마느냐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이 만화를 선택하는 것은 취향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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