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시대가 남긴 세계의 모든 문양
아리엘 골란 지음, 정석배 옮김 / 푸른역사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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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은 여기에 미쳤기 때문에 이런 책을 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할 때가 있다. 이 책의 압도적인 부피는 그런 생각을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다. 오래 전, 87년으로 생각되는데, 민음사에서 대우학술총서 23권으로 나온 황용훈 교수의 '동북 아시아의 암각화'란 책을 보고 선사시대의 문양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그리고 꽤 많은 시간이 흐른뒤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저자인 아리엘 골란은 선사시대의 문양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작업을 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보이는 서로 흡사한 상징적 무늬와 신화적 모티브는 다중심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공통의 연원을 가진 것으로, 그 연원은 바로 구석기시대에 생성된 신화속에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골란 교수의 주장이 100% 옳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이런 주장 또한 선사시대에 대한 우리 이해의 폭을 넓혀준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한 것이라 하겠다.

골란 교수는 28장에 걸쳐 선사시대의 모든 문양의 형태를 조사하면서 구석기 시대의 상징 속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간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많은 융통성을 두고 있다. 그는 자신이 해석을 시도한 상징에 대하여 '충분히 신뢰할 수 있는 해독' '개연성이 있는 해독' '제안 수준의 해독'으로 구분하였고 몇몇 상징은 아직 해독하지 못했음을 후기에서 고백하고 있다. 이런 그의 학자적 개방성은 이 책을 하나의 주장이 아니라 여러가지 주장을 대비하며 사유하게끔하는 여유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오랫만에 정말로 대단한 책을 만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리고 이런 책을 출판한 출판사 역시 크나큰 격려를 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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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사 여행 1
현준만 엮음 / 실천문학사 / 199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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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서술할 때 기전체냐 편년체냐하는 고답적인 이야기를 떠나서 이 책은 사건을 직접 목격했거나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기록을 통해 재생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웠다. 물론 이런 방식은 사건의 기.승.전.결 가운데 어느 한 부분만을 보기 때문에 전체를 이해하는데는 무리가 있지만 그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느낄 수 있다는 점에서 나름대로의 장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투키디데스의 역사로 시작하여 제임스 팬튼의 필리핀의 독재자 마르코스의 몰락에서 끝이 나고 있다. 그 생생한 현장감은 역사책의 건조함과는 많은 비교가 된다. 그리고 역사의 기록자 또한 역사가에서부터 여행가 혹은 작가등 다양한 계층의 기록자들이 자신의 독특한 관점에서 역사를 보고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1922년 9월 패전 후의 독일을 여행하며 겪었던 초인플레이션에 대한 경험,1943년 3월 일본군 점령하의 뉴기니아에서 일본군이 연합군 정보장교를 참수하는 장면을 목격한 익명의 증인, 79년 8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는 현장에서 생생하게 묘사한 小 플리니우스의 기록, 1815년 11월 레바논을 여행하던 여행객이 그리스 정교회의 총대주교가 사망한 뒤 그 시신을 처리하는 광경을 목격하고 적은 기록문들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 사건을 보고 기록한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역사의 증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점은 역사 속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는 증인의 조건을 갖추고 있음을 알았다. 다만 그 조건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사건의 현장에 혹은 그 현장에 있지 않더라도 들은 사건에 대한 기록자로 남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역사의 현장에 있을 수는 있지만 증인이 되기는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역사의 현장에 있으면서 그 사건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정말로 역사 앞에 큰 죄인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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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토마스 이디노풀로스 지음, 이동진 옮김 / 그린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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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은 특이한 도시이다. 유대인들의 정신적인 고향이면서 가톨릭과 동방정교에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 부활한 종교의 잉태지이다. 그런가하면 이슬람교도들에게는 예언자 무함마드가 천사의 도움으로 알라의 계시를 받기 위해 천국으로 여행을 떠났던 성스러운 장소이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를 성서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한다. 다윗이 주춧돌을 놓고 성을 쌓은 이후 이 도시는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고향이 되어 버렸다. 이에 대하여 이슬람교도들은 자신들이 여기서 2천년 이상을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들은 다윗의 이야기를 침략자의 이야기로 비하한다. 기독교도들은 십자군 전쟁 당시 이슬람과 맺은 조약에 근거해서 이 도시를 양보할 수 없다고 버틴다. 이들의 근거가 제일 미약하지지만 예수의 흔적이 남아있는 도시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다.  마치 한 가문의 진정한 상속자는 하나인데 3명의 후계자가 나타난 자신이 적자라고 주장하는 것과 유사하다. 역사적 DNA를  검사하면 누가 진정한 후계자로 판명날까?


중동의 문제가 복잡하게 된 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늦게 이곳에 진출한 서구의 정략적인 태도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것은 이제는 문제도 될 수 없는 상식이다. 그 이전까지 유대인과 아랍인들은 서로 공존하는 자세로 땅을 공유해왔다. 하지만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유럽에서 포그롬-유대인 박해-이 강화되자 일단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 건설을 시도하면서 이런 공존의 관계가 서서히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서구세계는 이 지역의 석유를 확보하기 위해 자신들의 대리인이 되어주어야할 국가를 생각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로 유대국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서구제국은 예루살렘의 문제는 공동통치라는 발상으로 살짝 비껴나갔던 것이다. 즉 예루살렘은 어느 누구의 소유가 될 수없다는 원칙을 제확인한 것이다. 하지만 67년 6일전쟁 이후 예루살렘이 실질적으로 이스라엘의 통치영역에 편입되자 세계는 이중적인 태도를 견지하고 있다. 종교적으로는 이스라엘에 귀속되는 것을 반대하지만 정치적인 경우에는 어느 정도 묵인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이중적인 서구의 태도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영구적인 자국의 수도로 확정하였을때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때 서구제국이 한일은 자국의 대사관을 텔아비브에 그대로 존치시키는 것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석유문제나 테러 문제가 불거지면 아랍세계를 맹공하는 이중적인 잣대를 취하고 있을 뿐이다.


인간들이 시끄럽게 떠들어도 도시는 언제나 장중하게 자신의 모습을 모두에게 보여주고 있다. 도시는 결코 편협하지 않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자는 적이든 친구이든 모두 포용한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도시에게 왜 자신에게 더 많은 사랑을 주지 않느냐고 불평을 한다. 도시는 다윗이 시온성에 주춧돌을 놓았을 때 부터 지금까지 오고 갔던 인간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어떤 인간들은 살며시 들어왔다  요란하게 떠나기도 했고, 어떤 방문자는 무뢰하게 왔다가 건방지게 떠나기도 했다. 도시는 이들 인간들이 자신의 품안에서 평화롭게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도시에게 종교. 민족. 사상은 무의미한 관념일 뿐이다. 도시는 떠들석한 시장의 삶, 각 종파의 기도소리를 모두 사랑한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은 귀가 막히고 눈이 먼 광신자들 뿐이다. 그들에게는 도시도 분명한 소속이 있어야 된다고 느껴지는지...


예루살렘의 문제는 이미 1967년 6일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했을 때 유엔은 결의안242호를 통해 이스라엘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하도록 권고한 바가 있다. 이 결정으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자국의 수도로 삼은 것은 명백한 국제법 위반이란 사실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중동지역에 있어서 이스라엘의 군사력 우위에 따른 힘의 균형학상 이 권고안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반면 기독교도들은 자신들이 예루살렘에서 누리고 있는 지위가 훼손되지 않는 한 이스라엘의 행위에 대해 적당한 선에서 눈을 감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십자군 전쟁 이래 예루살렘이란 도시가 유대인과 이슬람교도의 손에 장악되지만 않는다면 지금의 상태로도 만족할 듯이 보인다. 예루살렘에 대해서 최대의 피해자는 일찍부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누리고 있던 이슬람교도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보금자리를 정치적인 이유에 의해 박탈당했다는 사실을 수용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체결된 모든 조약을 인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슬람교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유대인과 기독교도들이 누리는 지위에 대해서는 인정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자신들과 이미 예전에 맺은 계약을 통해 그 지위를 인정받았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48년 이후에 발생한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것이기에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성은 분명히 이슬람의 주장에 수긍하지만 국제 정치의 현실은 이스라엘의 강제합병에 무게를 더 실어주고 있는 현재, 예루살렘의 문제는 결코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해져버리고 말았다. 평화의 도시라는 뜻의 예루살렘이 진정으로 도시의 이름을 되찾으려면 협상 이전에 상대에 대한 믿음이 선결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지 않다면 예루살렘을 세계인들의 양해 아래  이차세계대전 당시 첵코의 리디체에서 독일군이 저질렀던 방식대로  완전히 파괴하고 지도에서 지명을 말살하면 해결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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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학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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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보면 그 압도적인 부피에 놀라고 만다. 그리고 읽다보면 그 질량감에 또 한번 놀란다.  예순 일곱의 나이에 이런 책을 쓸 수 있다는 그 학문에 대한 정열이 놀랍고 부러울 뿐이다.

우리에게 씰크로드는 언제나 중국이란 오페라 글라스를 통해서 보던 몽환의 세계였다. 그 세계의 끝이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우리는 관심도 없었다. 다만 우리는 씰크로드의 주변부에서 우리의 역사를 꾸려왔다는 그 사실만이 강조되고 있었다.  세계사 속의 우리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놀드 토인비의 대저인 '역사의 연구'에 우리의 모습이 어떻게 투영되고 있는지 아는가?  서양인들의 눈에 아시아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과 인도밖에 없는 것처럼 인식될 때 어떤 느낌을 받는가? 

우리에게 실크로드와 관련이 있는 인물이 전혀 없는가, 그렇다면 고선지와 혜초는 누구인가?  일본인들은 엔닌이란 중이 쓴 신변잡기와 같은 일기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그 일기책을 현장의 대당서역기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과 같은 위치에 올려 놓았다. 반면 우리의 왕오천축국전은 어디에 숨어있는가.  파미르고원蔥嶺의 패자였던 고선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책에서 저자는 씰크로드학의 연성접근에 대한 편향성을 시정하기 위해 이 책을 기술했다고 말하고 있다. 연성접근이란 씰크로드의 교통사나 씰크로드 연변지역의 지역학.민족학, 대중매체를 통한 미지의 탐험과 같은 식의 접근이란 의미이다. 이런 방법으로는 씰크로드학을 체계적으로 접근할 수 없다고 저자는 보고 있는 것이다. 즉 저자는 감성적인 접근을 배제하고 이성적인 접근을 위한 학문의 입문서로서 이 책을 기술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씰크로드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이 있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이정표로서 제 몫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노 교수의 개인적 사정에도 불구하고 이런 책이 우리 앞에 놓여졌다는 그 자체가 경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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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대비하신 하느님 아시아 신학 총서 2
송천성 지음, 이덕주 옮김 / 분도출판사 / 198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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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아시아에서 발생하였음에도 아시아의 종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의 제국주의 물결이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퍼져나가면서 유럽의 하느님은 아시아의 하느님, 아프리카의 하느님, 아메리카의 하느님이 되어야만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검은 그리스도가 등장했고, 아시아에서는 납작한 코의 예수님이 등장하였다. 이렇게 하느님의 외양이 변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는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진행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토착화란 무엇일까? 아시아에서 탄생한 그리스도교가 유럽화되는 과정은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예수의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셈족의 특징을 상실하면서 아리안족의 특성을 얻게된다. 검은 머리는 갈색으로, 눈동자는 푸른 색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백인들이 다른 인종과 접촉하면서 더욱 강화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교의 완벽한 서구화를 성공시킨 백인들은 성서 역시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제국주의의 확장에 한 축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토착화란 잃어버린 아시아의 특성을 다시 찾는 일이다. 그것은 외적인 형태의 복원만이 아니라 아시아인의 심성과 일치하는 그리스도교상을 찾는 일인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서구의 직선신학이 아니라 동양적인 여백의 채움을 실현하는 신학이 출현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직선신학 처럼 하나의 뒤에 다른 하나가 오고 공간을 뚫고 나아가는 개종의 신학이 아니라 동양화와 같이 빈 공간을 채워 완전히 몸에 스며들도록하는 채움의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직선의 신학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가 전제가 된 것이었다. 이것은 서구 이외의 민족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서구의 기준에 맞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개종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는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라는 조형물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익명의 그리스도인들도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상한 종교적 발전이라 할 수있다. 이것은 개종-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빛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되기 위해서는 프랑스 성서학자  삐에르 브노아가 예수가 운명했을 때 두 조각난 성전의 휘장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휘장은 유대 종교와 이방인들을 나누어 놓았던 장벽을 상징한 것이었다. 문제의 휘장은 지성소에 있는 휘장이라기보다는 성소에 있던 휘장이었을 것이다. 휘장 속에 감추어진 성전 내부는 외부, 특히 이방인들은 들여다 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처럼 외부와 차단시킴으로 성전 안에 있는 야훼의 은밀한 현존, 종교의 극비부분이 보존될 수 있었다. 따라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같은 비밀과 배타성이 무너졌다는 의미이며 야훼 예배는 더 이상 어느 한 민족의 독점물이 될 수 없고 모든 민족, 이방인들에게까지 공개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찢어진 휘장의 깊은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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