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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자대비하신 하느님 ㅣ 아시아 신학 총서 2
송천성 지음, 이덕주 옮김 / 분도출판사 / 1985년 3월
평점 :
기독교는 아시아에서 발생하였음에도 아시아의 종교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서구의 제국주의 물결이 아시아로 아프리카로 아메리카로 퍼져나가면서 유럽의 하느님은 아시아의 하느님, 아프리카의 하느님, 아메리카의 하느님이 되어야만 했다. 아프리카에서는 검은 그리스도가 등장했고, 아시아에서는 납작한 코의 예수님이 등장하였다. 이렇게 하느님의 외양이 변한다고 해서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되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 대답은 아직 시기상조라고 할 수 있다. 지금도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는 진행중이고 앞으로도 진행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토착화란 무엇일까? 아시아에서 탄생한 그리스도교가 유럽화되는 과정은 서양미술사를 살펴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예수의 모습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셈족의 특징을 상실하면서 아리안족의 특성을 얻게된다. 검은 머리는 갈색으로, 눈동자는 푸른 색으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백인들이 다른 인종과 접촉하면서 더욱 강화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리스도교의 완벽한 서구화를 성공시킨 백인들은 성서 역시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제국주의의 확장에 한 축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토착화란 잃어버린 아시아의 특성을 다시 찾는 일이다. 그것은 외적인 형태의 복원만이 아니라 아시아인의 심성과 일치하는 그리스도교상을 찾는 일인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서구의 직선신학이 아니라 동양적인 여백의 채움을 실현하는 신학이 출현해야 할 것이다. 서구의 직선신학 처럼 하나의 뒤에 다른 하나가 오고 공간을 뚫고 나아가는 개종의 신학이 아니라 동양화와 같이 빈 공간을 채워 완전히 몸에 스며들도록하는 채움의 신학이 필요한 것이다.
서구 제국주의의 직선의 신학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명제가 전제가 된 것이었다. 이것은 서구 이외의 민족은 자신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간에 서구의 기준에 맞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개종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다는 것은 하느님과의 계약을 맺는 것이고 이것은 하느님의 정의와 사랑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라는 조형물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믿는 인간이 중심이 되어야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익명의 그리스도인들도 구원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의미심상한 종교적 발전이라 할 수있다. 이것은 개종-자발적이건 강제적이건-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빛인 하느님과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토착화되기 위해서는 프랑스 성서학자 삐에르 브노아가 예수가 운명했을 때 두 조각난 성전의 휘장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마칠까 한다.
"휘장은 유대 종교와 이방인들을 나누어 놓았던 장벽을 상징한 것이었다. 문제의 휘장은 지성소에 있는 휘장이라기보다는 성소에 있던 휘장이었을 것이다. 휘장 속에 감추어진 성전 내부는 외부, 특히 이방인들은 들여다 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처럼 외부와 차단시킴으로 성전 안에 있는 야훼의 은밀한 현존, 종교의 극비부분이 보존될 수 있었다. 따라서 휘장이 찢어졌다는 것은 이같은 비밀과 배타성이 무너졌다는 의미이며 야훼 예배는 더 이상 어느 한 민족의 독점물이 될 수 없고 모든 민족, 이방인들에게까지 공개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찢어진 휘장의 깊은 의미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