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살에의 초대 - 엘리스 피터스 추모소설
맥심 재커보우스키 엮음, 손성경 옮김 / 북하우스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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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트펠 수사 시리즈의 엘리스 피터즈의 추모소설집이란 제목을 보고 느낀점은 후배나 동료들의 존경심이었다. 약간의 틈만 있으면 부셔대는 우리의 사정과는 약간 다른 그들의 정신세계는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 조차 하였다. 얼마전에  관촌수필의 이문구선생이 돌아가셨을 때 많은 문인들은 그의 죽음이 우리 문단의 큰 손실이라고 했지만 그분을 위해 "관촌 기행"이라는 제목 정도의 추모작품집이 나왔어야하지 않았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설하고...


엘리스 피터즈 여사는 추리소설의 영역을 하드 보일드가 판치는 현대에 고정시키지 않고 중세로까지 연장한 작가이다. 중세의 탐정이란 우리의 현대적 감각에서 본다면 엉성할 것 같지만 피터즈 여사는  캐트펠이란 훌륭한 인물을 창조하여 가톨릭 신학과 철학에 입각한 관용적인 탐정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였다. 물론 여사 이전에도 체스터튼이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통해 토미즘에 입각한 신부탐정을 창조한 예가 있으니 그리 희귀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브라운 신부도 당시로서는 현재를 그린 소설이었다. 그러나 엘리스 피터즈 여사는 중세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바로 이것이 여사의  선구적인 시각이라 할 수 있다.  여사의 캐트펠 시리즈로 인해 다른 작가들은 시대에 구애받지 않고 그리스. 로마 시대로까지 탐정소설의 영역을 넓혔을 뿐 아니라 그 탐정소설을 빌려 하나의 사회사를 훌륭하게 완성시키는 작품들이 나올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추모집은 이런 여사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해 참여한 작가들이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대에 걸쳐 다양한 탐정들을 등장시켜 사건을 해결하고 있다. 각 시대의 탐정들은 그 시대의 일상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해결이 그 시대의 사고방식을 배경으로 추리를하여 해결한다는 점이다. 인간의 사고는 항상 그 시대의 사상이 큰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추모집은 탐정 소설의 형식을 빌린 추리의 변천사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 추모집은 아가사 크리스티나 페트리샤 콘월, 혹은 프레드릭 포사이스를 읽은 사람이라면 약간은 무미건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추모집은 흥미가 아니라 작가들이 자신들이 생각한 한 시대의 모습을 정확하게 그리면서 그 시대의 한 면을 추리를 통해 보여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의도를 파악하고 읽어간다면 엘리스 피터즈 여사의 영역확장이 추리소설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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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보는 유럽사 - 한눈에 알 수 있는 재미있는 유럽 문장의 비밀
하마모토 타카시 지음, 박재현 옮김 / 달과소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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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왕실의 문장이 보여주는 규칙성과 엄격성은 그 체제 자체를  상징하는 표식으로서  부족함이 없다.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하지만 유럽의 국기와 지방의 깃발 대부분은 그 지역을 다스렸던 왕가와 유럭한 지배자의 문장에서 유래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유럽의 문장은 그 지역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가볍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면 문장을 통해서도 충분히 유럽을 알 수 있다는 말 역시 빈 말은 아닐 것이다.


문장은 순전히 중세시대의 산물이란 사실이 중요하다. 중세시대 기사들은 온 몸을 갑옷으로 둘러싸고 전쟁터로 나갔다. 이들 기사들이 뒤섞여 전투를 벌일 때 아무런 표식이 없다면 동료와 싸우는 상황도 발생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를 지휘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는 전투가 어느쪽에게 유리하게 전개되는지 알 수 없기에 작전을 세우기도 난감하였을 것이다. 그래서 귀족들은 각자의 표식으로 문장을 만들어 방패에 그려 넣고 전투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이 방패의 그림이 문장으로 전용된 것이다.  그리고 이 문장을 구분하는 사람은 우습게도 왕의 옆에서 시중을 들던 광대계급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문장의 체계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문장에 대한 자신들만의 구분법을 이용해 문장관이란 세습계급으로 진화해 나가는 사실 또한 흥미롭다. 이런 문장의 역사는 화포의 발달로 더 이상 기사의 대결과  대포에 의해  공성전이 무력화되는 중세의 끝 무렵부터는 전투원의 신분 표시에서 가문의 표시로 바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시기를 기점으로 유럽에서 현대적 기준으로 귀족이라 불리우는 집단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대신 기사들의 방패에 장식되었던 표시는 군대의 중대기, 대대기, 연대기, 사단기와 같은 상징물로 변모하게 된다. 이렇게 문장이 개인 가문의 표식으로 혹은 군대의 상징으로 변하면서 전쟁은 더 이상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싸우는 개인의 무용담이 불필요한 기계적인 참살로 진화하게 되었다.  참호와 참호를 사이에 두고 지리한 공격과 방어가 되풀이되고 하늘에서는 비행기가 날아다니면서 화련한 군복과 깃발은 오히려 방해물이 되었다. 이제 전쟁은  팀웍-전술-이 더 중요한 변수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제 개인은 문장 대신 계급장을 달고 단체는 군기 밑에 모여 거대한 집합체가 되어 하나처럼 행동하는 거대한 표식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 책은 문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는 세계사라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더 이상 깊은 내용은 없다.  다만 이런 문장이 있었다는 해설서 정도라고나 할까. 그리고 이 책에는 컬러로 된 문장에 대한 화보하나 없다는 사실이 약간 의아하게 느껴진다. 문장이란 화려한 색조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더 극명하게 드러내게 되는 것인데... 그렇지만 우리에게 생소한 문장이란 세계를 알려준 것만으로 이 책은 하나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하겠다. 혹시 이 책을 보고 문장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나올지도 모르는 것이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출판사의 배려는 좀더 세심했어야 하지 않았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과 함께 스다 부로의 "중세 기사 이야기"와 미셀 파스투로의 "스트라이프 : 악마의 무늬"를 함께 읽으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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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그 변혁을 꿈꾼 사람들
신정일 지음 / 이학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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萊庵 정인홍을 아십니까.

정인홍(鄭仁弘 1535∼1623

조선 중기 문신·학자·의병장.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庵). 본관은 서산(瑞山). 경상남도 합천(陝川) 출생. 조식(曺植)의 수제자이다.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6품직에 오르고 81년 사헌부장령에 승진하였다. 91년 정철(鄭澈)의 건저문제(建儲問題)를 계기로 동인이 남북으로 분열할 때 북인에 가담하여 영수가 되었다. 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합천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성주(星州)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하였으며, 이해 10월 영남의병장의 호를 받았다. 이듬해 의병 3000여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高靈)·함안(咸安) 등지를 방어했으며, 의병활동을 통하여 그 고장에서의 강력한 기반을 다져 나갔다. 1602년(선조 35) 대사헌에 승진하였고, 이어 왜란 당시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던 유성룡(柳成龍)·성혼(成渾)을 탄핵, 사직케 한 뒤 홍여순(洪汝諄) 등과 북인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후 북인이 대북·소북으로 분열되자 대북을 영도하였으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는 소북에 대항하여 광해군을 적극 지지하였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대사헌에 기용되고 대북정권을 수립하였으며, 스승 조식의 추존사업을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의 문묘종사를 극력 저지하려 하다가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유적(儒藉)에서 삭제되는 등 집권을 위한 싸움으로 정계에 큰 분란을 일으켰다. 12년(광해군 4) 우의정이 되고 이어 영창대군의 제거, 인목대비의 유폐사건에 가담, 영의정에 올랐다가 23년 인조반정으로 참형되고 가산을 적몰(藉沒)당했으며, 끝내 복권되지 못하였다. 일찍이 이이(李珥)는 그의 좌충우돌하고 강의(剛毅)한 성품을 돌격장(突擊將)에 비유하였다. 저서로 《내암집》이 있다. -인터넷 사전에서 참조 -

위의 약력은 88세의 나이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사람의 간단한 일생의 기록이다.  읽어보면 내암의 삶은 실천적 유학자로서의 치열한 모습이 보인다. 하기사 조식 선생의 제자이니 오죽하였을까만은...하지만 이분의 이런 이력조차도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에게는 용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내암을  제일 먼저 처형하면서 광해주의 모든 허물까지도 덮어 씌웠습니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 이 분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게 폄훼를 당할 인물이 아님니다. 이분의 정치적 행보를 제외한 실천적 삶의 모범은 어찌보면 한말의 위정척사운동의 유학자로까지 이어지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분은 단 하나 전통적 유학의 따름을 거슬렀습니다. 바로 이 점이 조선 유학의 역사에서 용납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그래서인지 이분은 조선초 역신으로 매도된 정도전마저도 조선 후기에 복원이 되었지만 끝끝내 역신으로 남은 분입니다. 역사는 언제나 승리자의 편에서 曲筆되는 것이 대세입니다. 프랑스인들은 영국인들이 트라팔가 광장에 넬슨의 동상을 높이 높이 세워놓은 것을 가지고 자존심이 상해서 뭐라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은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제국의 연합군을 무찌른 전투의 지명인 오스터리츠를 역의 이름으로 붙여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인들은 이것에 대해서는 모두들 한결같이 침묵을 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소유하지 못한자에게는 불공평하다고 합니다. 역사를 소유한다는 것은 아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 역사에서 그동안 알지 못했던 곳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역사책에서 거의 대부분 한줄 혹은 이름만이 간단하게 언급되는 분들입니다. 이들을 아는 것은 우리가 갖고는 있었지만 진정으로 소유하지 못했던 역사의 한 부분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꿈 꿔던 세상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유토피아도 아니고, 구름위에 세우고자 한 노동자의 천국도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백성들이 주인인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분들입니다. 우리가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물론 알고 있어야 하겠지요. 왜 죽는지 아는것, 왜 싸우는지 아는것.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역사의 한 부분이 되고 역사를 소유한 진정한 주인이 되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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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 한길 히스토리아 14
필립 지글러 지음, 한은경 옮김 / 한길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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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347년 10월 초순경, 페스트가 시칠리아에 상륙했고, 석달 후 이탈리아 본토가 이 질병의 공습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1348년 1월말 이 검은 죽음은 배를 타고 마르세이유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11월 경에는 독일의 슈타이어마르크에 도달했다. 그리고 한달 후에 잉글랜드에 상륙했고, 1349년 6월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국경에서 독일의 쾰른까지 전진했다. 이 죽음의 병은 멈추지 않고 동년 12월에는 스코틀랜드와 덴마크를 지나서 1350년 6월 스웨덴을 가로질러 12월 러시아를 지나 사라졌다. 약 3년에 걸친 페스트의 습격으로 유럽 전체는 엄청난 타격을 받았고, 당시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람들은 이 질병이 시칠리아에 상륙한 때부터 서서히 그러나 아주 확실하게 자신들을 향해 서서히 북상하는 것을 보며 공포에 질리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교회에서는 이 질병이 인간의 죄에 대한 하늘의 응징임을 설교하였다. 이에 겁을 먹은 수많은 무리들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회개를 외쳐댔다. 하지만 이 행위 자체가 페스트를 유럽 곳곳으로 퍼뜨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페스트가 지나간 자리에는 페허와 정적만이 남아있었다고 당시의 기록자들은 과장된 어조로 전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피해는 엄청났다는 점은 분명하다. 하지만 페스트가 당시 유럽인들에게 남긴 가장 큰 상처는 경제적인 손실보다는 마음속 깊은 곳에 남겨놓은 좌절감있었다. 저자는 이 마음의 공황상태를 일차대전 이후의 유럽인들의 상실감과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페스트에 대한 독특한 재해석으로 신선함감을 준다.

"엄밀히 경제적인 의미에서 흑사병은 농민폭동을 일으키거나 농노의 붕괴를 야기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흑사병은 여러 사례에서 마음에 쌓인 불만감과 변화를 바라는 형용할 수 없는 욕구를 야기했다."라는 표현에서 알수 있듯이 '경제'와 '농민폭동'대신 어떤 단어를 집어 넣어도 이 말은 당시 상황을 아주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페스트는 당시 인간들에게 망치로 얻어맞는 충격이나 마찬가지였다. 이 충격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모든 부문에서 가해진 전체적인 타격이었다. 이 결과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를 못했다는 기존의 학설은 과장된 점이 많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그 과장이 유럽 사회 전반을 규정짓는 성급한 판단으로 이해될 때 페스트가 가져온 유럽 사회의 변화를 곡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페스트로 인해 인간의 정신세계가 변모함으로서 유럽은 새로운 단계로 나아갈 수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유럽은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철저한 재해석을 함으로서 걷잡을 수 없는 혼란으로 빠져들어가지만 낡은 시대를 해체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페스트는 일차대전 이후 유럽인들이 연속적인 역사관을 부정하고 비연속적인 역사에 의한 단층적 역사관을 발전시키며 기존의 철학체계를 송두리째 뒤엎는 사상의 혁명을 일으켰듯이 기존의 종교에 일대 혁신을 꾀함으로서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인본주의의 근대를 열었던 것이다.

즉 페스트는 중세의 몰락과 근대의 탄생을 알리는 하나의 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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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인문학자의 문화로 읽는 중국
박영환 지음 / 동아시아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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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잠자는 사자'로 불렀던 중국이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의 패배로 순식간에 종이 호랑이로 전락하면서 5천년을 이어오던 중화주의에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그러나 중국인들은 이 시련을 적극적인 자세로 이겨나가려 하였다. 즉 자신들이 왜 서구와 아시아의 섬민족에게 연거푸 패배하였는가를 반성하였던 것이다. 그들의 결론은 중국이 발전하는 세계의 중심에 서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세계의 중심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그 중심의 학문을 배우고 익혀야한다는 점을 뼈저리게 깨달았던 것이다. 이를 위해 중국은 과감히 中體西用의 길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그리나 또 한편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중화사상이란 대국주의적 관념을 여전히 보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두 가지 상반된 사고가 중국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것이다. 중화주의에 물든 자만심이 가득찬 중국과 서구의 물결에 자신의 부족함을 절감하며 배우려는 중국. 우리는 이 두가지 중국을 모두 경험하였다. 대국의 거만함으로 다가오던 봉건적인 중국과 우리의 모든 것을 배우려고 달려들던 현대의 중국을 통해 중국의 실용성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중국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배우려하는 자세를 견지하면서 그 이면에는 모든 것은 중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대국주의적 교만함이 여전히 존재한다. 중국의 이 교만함의 종착점은 아마도 패권주의일 것이다. 이것은 중국이나 주변국 모두에게 불행한 재앙이 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배우는 자세를 견지하는한은  주변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최근 중국이 동북공정을 시작으로 해서 서서히 배우는 자세에서 옛날 중국의 자세로 돌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분명 중국에게도 이익이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실용적인 점을 중시하는 중국인들도 바라는 바는 아닐 것이다.


중국의 외교는 실익의 추구와 함께 체면의 외교라 할 수 있다. 대만과 우리가 외교를 단절하였을 때 대만사람들이 우리를 경멸한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우리가 당당하지 못하게 대만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대만사람들도 중국과 우리의 관계가 가까워질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우방인 한국이 밤의 도둑처럼 그렇게 몰래 도망가듯 자신들을 떠날줄은 몰랐던 것이다. 세익스피어의 리차드 3세에  '흉포한 야수에게도 연민이 있는데 그것도 없는 나는 짐승도 아니다' 라는 대사가 나온다. 약자에게 당당함과 자비를 보여주지 못한 우리의 자세는 중국에게도 그리 좋게 보였을리 없을 것이다.


중국은 역사.문화.정치.경제적으로 상당한 유산이 축적된 나라이다. 다만 중국이 이런 유산을 가지고도 발전할 수 없었던 것은 체제의 장벽 때문이었다. 이런 체제의 장벽을 허물어 버림으로서 중국은 자신이 가진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이런 중국의 모습을 바라보며 좀더 당당한 자세로 임해야 될 것이다. 우리가 항상 중국을 대하면서 잊고 있는 사실이 있다. 중국은 5천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란 사실이다. 중국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지만 경멸하는 자세 또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중국에 대한 균형의 추를 제공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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