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다비도비치의 무덤 - 일곱 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잔혹극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12
다닐로 키슈 지음, 조준래 옮김 / 책세상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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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다닐로 키슈의 단편집을 읽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다. 이 작가의 경험 혹은 독서는 우리의 평범한 경험과는 거리가 있는 곳에 위치해 있다. 그의 기억을 지배하는 모티브는 수용소로 상징되는 이데올로기의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폭력은 길거리의 깡패처럼 정확한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폭력이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하면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이 실체가 없는 폭력은 정교한 조직에 의해 소리없이 움직이는 톱니바퀴와 같다. 그 기계는 너무나 커서 우리가 알 수 없는 것이다. 사회 전체가 악의 메카니즘에 의해 작동되는 세계, 그 세계는 바로 인간성이 말살되는 세계인 것이다. 

동구의 역사는 다양함의 역사이다. 옛날부터 거주하던 슬라브인과 무력을 통해 들어온 이슬람세력, 그리고 서구에서 쫓겨나 삶의 자리를 찾아 들어온 유대인의 다양한 역사는 동구의 모양이 어느 하나로 고정시킬 수 없음을 암시한다. 그러기에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은 어찌보면 세계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서의 고통은 바로 세상의 고통인 것이다. 또 이곳에서 자행되는 억압은 세상에서 자행되는 억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닐로 키슈의 작품은 지금 읽어 내려갈 때도 전혀 낡은 이야기가 아니다. 그가 경험한 세계는 인간의 경각심이 무디어지면 언제든지 고개를 들고 나타날 세계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쉬웠던 점은 다닐로 키슈가 89년에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그는 전체주의의 사회에서 태어나 이를 경험하고 그 속에서 함몰되었다. 그가 죽기전까지 바라보았던 세계는 암울한 색조였다. 그가 아직껏 살아있었다면 동구의 변화를 경험했다면 나는 <일곱장으로 구성된 한 편의 희망극>을 읽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다.

<문학은 과거를 되돌려 죽은 자들을 돌아오게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을 후대의 독자들 앞에 의미있게 부활시킴으로써 미래를 변화시킬 수는 있습니다>  -다닐로 키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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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의 미국사
제임스 M. 바더맨 지음, 이규성 옮김 / 심산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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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란 나라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그 광대한 땅을 이야기한다. 이것은 중국을 이야기할 때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땅이라는 것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어떤 덩어리를 의미하기에 미국이란 나라와 땅이 결합되었을 때는 아주 강력한 하나의 어떤 힘을 연상하게 한다. 즉 미국이란 나라와 거대한 땅이란 이미지를 바라보는 우리의 속 깊은 곳에는 불신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이란 나라는 정말로 하나의 땅과 같은 굳건한 결속력과 동질성을 가지고 있는가하는 질문에는 <인종의 용광로> 혹은 <성조기에 대한 맹세>와 같은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면서 그 거대한 흡인력에 찬사를 보낸다. 그렇다면 미국의 단점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하려면 많은 생각을 해야만 한다. 미국이란 나라가 세계 초강대국으로 존재하는한 그 구성원들은 성조기 밑에서 결코 이탈하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일본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미국을 지배했다고 생각했다. 그때 일본인들은 미국적인 가치와 일본적인 가치를 비교하면서 자신들의 가치가 우월함을 은근히 즐겼다. 하지만 이런 우월감도 90년대에 들어오면서 역전되기 시작했다. 오히려 일본이 자신들의 방식을 포기하고 미국적인 방식을 채택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적인 약점은 외부적인 것보다는 내부적인 것에서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내부적인 것을 알기 위해서는 미국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를 알는 것이 급선무이다.

미국은 크게 남부와 북부로 나눈다.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으로 볼 때 남부는 노예제와 흑인차별, 북부는 그 반대의 가치를 지향하는 곳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남북전쟁을 보는 시각도 북부연합은 선, 남부연맹은 악으로 본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런 단순한 구분은 미국의 정확한 실체를 아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책의 저자 바더맨은 미국은 서로 상이한 집단-뉴잉글랜드지역의 청교도, 퀘이커 교도가 이주한 델라웨어 계곡, 영국의 귀족계급들이 이주한 버지니아, 잉글랜드북부와 스코틀랜드.아일랜드에서 온 그룹-들이 모여 이룩한 국가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들은 아메리카란 신천지에 도착하며 자신들이 생각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런 이상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주 단위의 개별적인 정치체제를 고수해 나간 것이다. 즉 아메리카 합중국은 하나의 이름에 다양한 국가의 연합체였던 것이다. 이런 시각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하나의 국가라는 미국의 이미지와는 아주 다른 모습인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개별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남부와 북부의 문제가 터지게 된 것은 노예제도 때문이었다. 산업사회였던 북부와 농업사회였던 남부는 그 각자의 특성으로 인해 노예에 대한 생각도 달랐다. 북부는 일방적으로 노예제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각 집단의 이해에 따라 노예제에 대한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특히 하층 노동계급은 흑인들이 자신들의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을 특히 경계하였다. 이런 사정은 남부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집도 절도 없는 남부의 하층 백인들은 노예제를 가장 열렬하게 옹호한 집단이었다. 이들에게 노예제는 자신들 밑에 다른 계급이 존재하는 것을 나타내는 외형적인 표시였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남부에서 발생한 노예에 대한 가혹행위의 대부분은 이 계급에 의해 저질러졌던 것이다. 

이 책은 남부를 직접적으로 옹호하지는 않는다. 다만 남부가 형성되어 변모해가는 모습을 정체성. 일상의 삶의 모습. 경제적인 면을 따라 서술해가고 있다. 그러면서 남부가 북부에 의해 전쟁이란 수단을 통해 아메리카란 국가에 포함되었지만 남부를 결코 변화시키지는 못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즉 자신이 스스로 변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이는 하나도 변하지 않음을 남부의 역사는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미국사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우리에게 제공하면서 미국이란 나라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해준다는 점에서 미국사에 대한 아주 훌륭한 개괄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후기에서 일본에서 자신에게 양키라고 부른 사람들의 일화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저자는 자신이 양키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말이 무척 생소하게 들렸다고 말한다. 저자는 양키와 미국이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는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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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적이며 절대적인 마법의 백과사전
까트린 끄노 지음,이재형 옮김 / 열린책들 / 199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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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인 의미에서 惡이란 <善의 결핍>일 뿐이다.  우리는 악마의 대명사인 루시퍼가 천사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즉 악과 선은 극점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야누스처럼 등을 맞대고 있는 반대의 속성일 뿐이다. 여기에 나와있는 내용의 많은 부분은 중세시대 마녀재판의 지침서로 사용되었던 <마녀철추魔女鐵鎚> 뿐만 아니라 마녀재판의 기록도 많은 부분 참조되어 있다. 여기에는 의외로 교회의 기록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중세 마녀재판의 당사자가 교회였기 때문이리라.

마녀 혹은 마귀는 중세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체제를 위협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이해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마녀에 대한 혹은 이단에 대한 과정에 세속의 권력과 교회의 권력이 연관되어 엄청난 비극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악이라는 문제는 우리의 가까이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의 장점은 유럽의 마녀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환상이나 허구가 아닌 실재로 일어난 일의 기록이며 편집이라고 할 수 있다.

왜 종교는 사랑을 설파하면서도 악과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그토록 잔인하였을까. 그것은 악이 너무도 자신들 곁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두려웠던 것이다. 이들과 타협하는 순간 자신들도 악의 세력에 물이 드는 것이 두려워 그토록 잔인하게 처벌하였던 것이다. 그 시대의 사람들은 현대의 우리보다도 어쩌면 자신의 내면에 더 충실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더 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타협의 불씨를 남겨놓기보다는 완전히 제거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여기에 나오는 마법의 주문과 비약을 만드는 재료는 정말로 희귀한 것들이 많다. 그것은 그만큼 그곳에 입문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그러면서도 착한 마녀들이 이용하는 재료들은 우리의 주위에 널려있는 것들이란 사실은 선을 행하는 것보다 악을 행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이 책은 백과사전이란 제목이 붙어있기에 어떤 연결성보다는 하나의 거대한 산을 다각적으로 조명하기 위해 그 산에 자생하는 수많은 식물을 표본해놓은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다양한 소주제들만으로도 이 책은 마법 혹은 마녀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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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역사 - 문명화과정
노버트 엘리아스 지음, 유희수 옮김 / 신서원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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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화 과정이란 부제가 붙은 <매너의 역사>는 1939년에 출판되었지만 학계의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70년대 프랑스 아날학파에 의해 이 책이 재조명되면서 빛을 보게된 책이다. 당시 아날학파에서 추구하던 역사에 대한 접근방식을 이 책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크게 어필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동양하면 젓가락을 서양하면 포크를 떠올릴만큼 젓가락과 포크는 동서양의 차이를 확연하게 보여주는 상징물이라 하겠다. 집는 문화와 찍는 문화의 두 세계는 외형적인 모양대로 보는 관점과 사유하는 세계의 경험이 완전히 다른 것이다. 그런데 동서양의 매너를 보면 그 차이는 젓가락과 포크처럼 크지 않다는데 놀랄 것이다. 두 사회 모두 매너나 예절에 큰 가치를 두며 그 가치는 사회적인 질서의 근간이 된다. 우리는 혁명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한 사회가 변화하는데는 장기적인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책을 읽을 때 유의해야할 점은 <매너>라는 단어이다. 우리는 매너라고 할 때는 좁은 의미의 식탁예절로 한정시키지만 이 책에서의 매너는 넓은 의미의 매너, 즉 식탁예절뿐만 아니라 생리적인 것과 성적인 것 모두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의미의 예절을 말하고있다. 즉 매너의 역사인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인간과 동물의 구별점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질문받은 孔子께서 禮, 다시말해 克己復禮라고 대답한 것과 같은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책을 차근 차근 읽어나가다 보면 우리는 예와 매너의 기저 깊숙이에 인간성의 훈련 혹은 통제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는 역사의 문명화과정이 진행되면서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매너는 자유로운 여성의 몸을 옭죄는 <패티코트>와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일까? 그렇다면 진정한 매너는 무엇일까? 어떻게 보면 엘리아스는 참다운 문명이란 동양의 老莊사상가들이 외친 자연친화적인 것을 말하고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을 국가의 통제과정과도 연관지어 생각하게끔 우리에게 폭넓은 사고의 틀을 제공하였다. 실제로 선진국사회의 경범죄 처벌조항은 거의다 이 책에서 취급하고 있는 행위의 위반에 관한 것이다. 국가의 간섭, 이것은 어찌 보면 푸코의 주제와도 일맥상통하는 것은 아닌지.

우리 사회에서도 매너는 상류층으로 도약하기 위한 하나의 기본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것은 매너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지향하는 자유스러움과 자연스러움에 반하는 인위적이고 형식적인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즉 매너는 계층의 구별을 확연하게 드러내주는 하나의 외적 표양인 것이다. 그러므로 매너의 본질은 <출입금지>라는 표찰과 비슷한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는 매너가 중세 왕족과 귀족을 중심으로 발전해 오면서 근대에 들어와서는 신흥 부르조아지 계급에 의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현대사회는 중세나 근대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원화된 사회이다. 그리고 현대는 계급이 사라진 평등한 사회라고 정의되고 있다. 하지만 다원화되었다는 사실 그 자체는 바로 현대가 다양한 계급의 사회로 진화(?)될수도 있다는 강력한 조짐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현대에서 매너는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강조될 수도 있다는 점은 또 하나의 역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매너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스럽게 살고싶다. 하지만 식당에서 음식을 먹을 때 아이들이 뛰어 다니지 않았으면 좋겠고, 개를 끌고 산책나온 사람들이 내 집앞에다 슬쩍 실례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결국은 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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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께끼의 기사 가일스 밀턴 시리즈 4
가일스 밀턴 지음, 이영찬 옮김 / 생각의나무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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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들을 사로잡은 이야기 하나. 사라센 제국의 저편에 사제 요한이 다스리는 기독교 왕국이 있다고 믿었다. 유럽인들은 자신들과 요한의 왕국이 연합한다면 사라센 이교도를 일거에 쓸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고무되어 마르코 폴로의 대장정이 시작되었고, 동방의 모습-여전히 과장된-이 유럽에 소개될 수 있었다.

중세 유럽인들을 사로잡은 이야기 둘.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 있은지 반세기가 흐른 1320년 성 미카엘의 날에  맨드빌이란 사나이가 영국의 세인트올번스를 떠나 성지 순례에 나선다. 그리고 34년간의 순례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여행기>를 저술하였다. 그 이야기는 맨드빌이 죽은 1360년까지 전 유럽의 언어로 번역되었다.이런 인기를 반영하듯 현재 유럽의 모든 대형 박물관에는 맨드빌의 여행기 사본이 대략 300권정도가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1096년 십자군 전쟁이 발발하면서 동방의 문턱에 겨우 진입한 유럽은 1270년 십자군 전쟁의 패배로 다시 동방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유럽은 대략 170여년간 동방의 한귀퉁이를 차지하면서 소위 문명이 무엇인지를 맛볼 수 있었다. 이런 동방에 대한 기억은 많은 과장적인 이야기가 탄생하게하는 배경이 되었다. 그렇다면 유럽인들은 동방에서 무엇을 바란 것일까. 그들은 황금과 보석을 원했을 뿐이다. 맨드빌의 이야기는 이 황금과 보석을 찾아가는 유럽인들을 위한 안내서였던 셈이다.

사람들은 맨드빌의 <여행기>가 실제의 일을 기록한 것이냐 아니냐로 많은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중세로의 초대>라는 책을 쓴 호르스트 퓨어만은 중세의 위조에 대하여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면서 그 위조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는 성 보나벤투라의 말을 빌어 위조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것이 거짓이라 해도 최고의 진실을 많이 포함하고 있다> 이 말은 맨드빌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설사 그것이 거짓이라 하더라도 그 당시 유럽인들이 느꼈던 동방에 대한 갈망을 거짓이라고까지 단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맨드빌은 바로 이 유럽인의 갈망에 대한 해답을 자신의 여행기 속에서 제시해주고 있으며, 대리만족까지도 덤으로 주고 있다. 맨드빌의 이야기를 사실로 믿고 무조건 서쪽으로 향했던 콜롬버스의 행위는 거짓에 의거한 것이기에 폄하되어야 하는가? 아닐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 있어서 맨드빌의 여행기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맨드빌의 여행기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없이 이 책의 여행을 따라가는 것은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게 한다. 다만 이 맨드빌의 여행기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움베르토 에코의 <바우돌리노>이다. 바우돌리노의 이야기는 맨드빌의 이야기기 현대의 이야기꾼에 의해 어떻게 변형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수수께끼의 기사>를 읽고, 바우돌리노를 다시 한번 훑어 보았다. 그리고 약간의 대리만족을 얻었지만 <여행기>의 원문 혹은 번역문을 읽기 까지는 더 이상의 추측은...그럼, 여기까지...

*조속한 시일 내에 맨드빌의 여행기가 번역되어 나와야만이 정상이 아닐까. <생각의 나무>에서 마무리를 지어주는 것도 좋을듯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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