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희의 문화 이데올로기 - 동아시아 사상 전통의 형성 나루를 묻다 1
이용주 지음 / 이학사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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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상 송시대는 가장 문치적인 성격이 강한 시기였다. 반면 군사적인 역량은 어느 왕조보다 떨어진 시기이기도 했다. 이 결과 송왕조는 건국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내내 이민족의 군사적 침입에 시달려야만 했다. 송왕조가 이들을 무마시킬 수 있는 방법은 다량의 물품을 하사하는 형식으로 이민족에게 갖다 바치는 것이었다. 이런 왕조의 군사적 무능력을 지식층은 대단히 수치스러워하였다. 즉 中華민족이 四夷에게 굴복하는 현실을 지식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혼란스러웠다. 문명국가로서 사이를 교화시켜야할 의무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던 제국이 오히려 오랑캐의 지배를 받아야하는 처지에 이른 것에 대한 비판이 싹트기 시작했던 것이다. 여기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한 사람이 바로 주희이다.


주희는 자신의 시대를 냉철하게 관찰한 결과 중화제국이 오랑캐들에게 수치를 당한 것은 禮로 표현되는 질서의 파괴라고 보았다. 이 질서를 회복시키기 위한 일련의 작업이 바로 주희의 목표였던 것이다. 주희는 예의 회복을 역사적인 차원에서 시작하고 있다. 요.순.우. 탕. 문왕의 시대를 거치면서 예의 질서는 전해지지 않고 단절되었지만 다시 공자에 의해 회복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공자 이후 그 예의 질서는 다시 단절되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시기에 그 단절된 예의 질서를 이어 회복시켜야만 한다고 보았다. 즉 주희는 역사의 흐름을 하나의 정통론적 입장에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요-순-우-탕-문왕-공자-맹자로 이어져온 유학의 도를 자신이 계승하여 회복시킨다는 입장을 취했던 것이다. 이런 주희의 역사관은 어찌보면 유대의 사제계급들이 본 역사관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유대의 사제들은 자신의 민족이 야훼를 알고 예배를 하였을 때는 축복이 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신의 징벌이 내린다고 보았다. 주희 역시 중화민족이 유가의 질서인 도를 체득하고 있다면 역사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예의 회복이 절실하다는 것이 주희의 입장이었다. 주희는 예를 알기 위해서는 사서와 오경을 철저히 아는 것으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주희는 독서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이런 원리를 알고 난 뒤에 다른 것을 배우고 익힐 수 있다는 순서의 방식을 주희는 권하고 있다. 즉 오경을 배우기 위해서 순서를 정해 차근차근 배워 익힌 다음 다른 것으로 영역을 넗혀나가야만 흔들림이 없다고 본것이다. 여기서 유학은 주희에게 있어서 어떤 흔들리지 않는 중심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주희에게 이런 사상적 근거는 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으로서의 소명-문제의식과 진지성-을 통해서 그 시대의 문제점을 정확히 인식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희는 이런 유교적 질서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왕조의 간섭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즉 왕조를 통해 하나의 강력한 지침이 만들어지고 그 지침에 따른 질서를 확립해 나가야 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왕조의 권력을 통한 질서의 드러나는 실제가 바로 제사의 문제였던 것이다. 주희는 천자의 제사와 제후의 제사와 士庶民의 제사가 다름을 강조하였다. 즉 이 다름이 바로 질서였던 것이다. 천자는 하늘에 제후는 땅에 사서민은 五祀에 제사를 지내야 했다. 서민이 하늘이나 땅에 제사를 지내고 제후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것은 질서의 어긋남이라고 보았다. 이런 질서를 통해 왕조의 통치기반을 확립하려 했던 것이 주희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주희는 왜 유교를 근간으로 하는 질서의 세계를 구상하였던 것일까. 漢이후 唐에 이르는 시기까지 중국은 자신들의 고유한 사상인 유교보다는 불교,도교와 같은 이단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즉 중국인의 정체성이 이들 외래사상과 이단에 의해 훼손됨으로서 중국의 문화는 정체성을 상실하였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희는 유교 사상을 제정립함으로서 중국의 정체성을 되살리고 총체적인 위기에 빠진 중국을 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북송의 왕안석과 같은 급진적이며 빠른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주희는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것은 정치력의 부재가 아니라 올바르지 못한 학문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주희가 학문을 통한 근원적인 개혁을 꿈꾸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국 주희는 자신의 당대에 치열하게 이단과 싸우고 후학을 양성하면서 학문을 배우고 익히며 중국을 변모시켜 나갔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지 70여년이 지나 중원을 장악한 몽골족의 원제국이 제국의 지도이념으로 주희의 유학을 선택함으로서 그의 점진적인 변화는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이 책을 통해서 새롭게 이해된 유학의 실체는 대단히 합리적이면서 진보적인 부분이 있다는 점이었다. 물론 주희의 사상은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이상주의적인면 역시 현실주의라는 면의 상대적인 경향성의 문제라는 점 또한 유념해야될 사항인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서구에서의 주희 연구가 굉장히 활발함을 알고 무척 놀라운 느낌이었다.  차제에 시간이 된다면 퇴계와 율곡의 書響을 들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게하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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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전의 남자
콘라드 슈핀들러 / 청림출판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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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천년전의 남자는 매우 흥미있는 책이다.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국경의 알프스 산맥에서 등산 중이던 부부가 한구의 사체를 발견하였다.  이들은 통상적으로 조난자의 사체일 것으로 추정하고 산장으로 내려와 주인에게 보고하였고, 주인은 통상적으로 이를 경찰서에 신고하였다. 하지만 발견 장소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접경의 경계 모호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산장주인은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경찰서 양쪽에 모두 연락하였다. 하지만 이탈리아가 관심을 보이지 않음으로해서 이 조난자의 사체는 오스트리아가 소유하게 되었다. 알프스 지역에서는 해빙이 되는 봄철이면 오래전에 조난되어 빙하속에 갇혀있던 사체들이 표면에 드러나는 일이 많아 이런 발견은 그리 큰 화제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체 역시 오스트리아로 넘겨지고 경찰은 통상적인 조사를 위해 이 사체를 법의학 연구소에 넘기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법의학 연구소에서 이 사체를 검사하는 과정에서 사체는 20-30년전이 아니라 5천년까지 시간대가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이 사체가 발견된 지점을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색작업을 벌인 결과 활, 화살, 도끼, 자작나무껍질로 만든 불씨그릇, 밧줄, 등짐용 바구니, 단검과 칼집과 같은 당시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유물이 수거되었다. 이들 유물에 대한 대대적인 검사가 실시되면서 우리가 생각하던 것보다 더 진보된 삶을 살고 있었던 당시의 상황이 드러났다는 점이다. 이는 문명과  문화라는 것이 현재의 잣대로 이해될 때 얼마나 곡해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헤밍웨이의 킬리만자로의 눈 서두에 나오는 표범의 이야기처럼 왜 그 남자가 산꼭대기로 올라갔느냐는 점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사냥꾼에서부터 부락에서 추방된 자까지 다양하게 추정하였다.  반면 법의학자들은 그가 왜 죽었는지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았다. 그것은 그가 어떤 방식으로 죽었느냐에 따라 그의 죽기 직전의 상황을 재현해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법의학자들은 사망당시 그의 자세를 분석한 결과 무엇인가의 충격에 의해 쓰러지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지 못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즉 그는 사고사 아니면 다른 무엇에 의해 살해된 것으로 추정하였다.(이 당시 불분명하던 사인은 2004년 그의 가슴부근에서 돌화살촉이 최종 확인됨으로서 밝혀졌다)  이 책은 고고학적인 책이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법의학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책이라 할 수 있다. 이런점이 이 책의 흥미를 더욱더 배가시킨다고도 할 수 있다. 과학자들이 하나의 증거를 가지고 그 증거의 증거를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는 장면은 마치 얽힌 실타래를 풀어가는 추리적인 면과 너무 흡사하였다. 그리고 드러난 사실에 대한  해석 역시 고도의 추리력과 역사적인 지식, 그리고 상상력이 가미되지 않으면 도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초반부의 혼란스런 수습작업이 고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노력으로 최소한으로 한정되는 장면을 읽으면서 조유전선생이 기록한  무령왕능 발굴의 혼잡함이 떠올랐다. 새삼 고고학이나 역사의 연구는 낭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오랜 기간 동안 치밀함과 끈기를 가지고 바닥까지 파고들어가 다시 그 바닥서부터 위로 올라오는 과정은 과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 고고학계의 현실은 어떠한지도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기회를 가져볼 수 있었다. 역사적 현장인 궁궐 안에 아파트 건축을 허가하는 행정당국이나 아파트 건축 현장에서 발견된 거대한 돌덩어리-형태상으로 볼 때는 고인돌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무자비하게 깨뜨려 도로의 기반석으로 사용하는 무자비함과 대비되면서 역사라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다. (이 사체는 일반인들은 아이스 맨이라고 불렀지만 고고학자들은 외짤 계곡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외찌라는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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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음식 문화사
시노다 오사무 지음, 윤서석 옮김 / 민음사 / 199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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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일요일 음식 가운데 꼬꼬뱅Coq an vin이란 음식이 있다. 닭Coq과 포도주Vin을 이용한 닭요리이다. 5백여년전 프랑스의 앙리 4세는 민정을 시찰하다 백성들의 궁핍함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재무장관에게 앞으로 백성들이 일요일만이라도 고기를 먹을 수 있게 하라고 강력하게 지시하였다. 이것은 말 그대로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라는 명령이었다. 그후의 과정은 어찌되었는지는 모르지만 프랑스 신민들은 이후 일요일에 닭을 요리해서 먹는 관습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의 닭에 대한 사랑은 프랑스의 상징 동물로 닭Coq gaulois을 선택한 것만을 봐도 알 수 있지 않은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음식을 통해 한 나라의 역사와 국민성과 그 나라의 미각을  알 수 있는 척도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각이란 감성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학으로 상징되는 그 나라의 이성적인 관점과는 아주 다른 것을 의미한다. 미국같은 경우에도 청교도와 퀘이커가 지배하는 북부지역의 음식은 조악하고 간소한 반면, 영국 왕당파들이 자리잡은 남부의 음식은 기름지며 풍성하고 화려하다. 이런 차이는 남부와 북부의 기질적 차이를 형성하게 되고 사고방식의 상이함으로도 표현된다. 이런 차이는 딕시랜드와 양키 공화국으로 분리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성까지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음식이란 이렇게 사람의 입맛 뿐이 아니라 생각도 변하게 하는 것이다.



젓가락을 사용하는 한.중.일 삼국의 음식 문화는 중국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은 지역의 특수성에 맞추어 변형되면서 각 국가의 고유한 음식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중국음식이 이 지역에서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던 것은 그 가짓수의 많음 이외에도 조리법의 다양함과 재료의 풍성함 때문이었다. 중국은 그 방대한 영토와 엄청난 인구로 인해 각 지역마다 드러나는 음식의 특성은 음식 문화의 천국이라는 유럽의 다양함을 능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중국음식의 대부분은 튀기거나 볶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이 많다. 이는 튀기거나 볶는 음식의 조리방식이 연료를 가장 적게 소비하는 조리법이기 때문이다. 즉 경제적인 이유에 의해 조리법이 선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중국 요리의 다양함은  역대 왕조의 수립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원래 중국인들의 문명의 발상지이자 정신적인 고향은  황하와 양자강의 사이에 있는 중원이란 곳이다. 이 지역에서 문명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중국의 음식문화에 있어서는 행운이었다.  즉 중원은 양자강 이남으로 도작문화와 황하 이북의 밀과 잡곡의 문화와 겹쳐지는 지역이다.  이 결과 음식에서 기본이 되는 밥의 문화는 밀, 쌀, 잡곡등과 같이 다양함이 형성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게 되엇다. 그리고 한에서 당에 이르는 시기에  서역과의 활달한 교류를 통해 서역의 작물들이 들어와 전국적으로 보급되었다. 그리고 남중국해와 황해의 다양한 해산물이 결합되면서 중국적 음식문화의 한 요소를 형성하게 되었다. 여기에 북쪽의 유목민족이 중국에 들어와 왕조를 건설하면서-오호십육국시대, 원, 청의 제국- 유목민족의 육식문화와 유제품 음식문화가 첨가되면서 중국 요리는 말 그대로 천하를 아우르는 음식이 되었다. 여기에 또 하나의 변수가 첨가되는데 그것은 종교였다. 불교에 의한 채식문화와 이슬람교에 의한 양고기를 중심으로하는 음식문화는 중국인들에게 새로운 맛의 감각을 제공하였다.  불교 문화와 함께 전래되어 중국인의 생활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차였다. 차문화는 남방에서 성행하였지만 선종의 영향으로 북방으로 이동하면서 차문화는 중국의 하나의 전통이 되었다. 이 책은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처럼 음식 문화의 금기를 말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음식의 다양함고 풍성함을 즐기는 문화를 알려주고 있다.  그러기에 이 책의 한 편에는 "맛있음"이란 감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맛있다는 것은 그만큼 흥미롭다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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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의 역사 - 지식의 재발견 4
앨버틴 가우어 지음, 강동일 옮김 / 새날 / 199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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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세종께서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을까.  그 자체를 가지고 상상의 세계를 펼치며 가상소설을 쓰기도 한다.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민족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까. 중국에는 공식적으로 55개의 소수민족이 한족과 동거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소수민족은 말 그대로 94:6의 절대 열세인 소수민족이다. 그런데 중국은 공식 언어로 북경어와 한자-간자-를 국가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즉 중국에서 제대로 삶을 살아가려면 중국어와 간자를 필수적으로 알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에서 소수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중국이란 거대한 인종의 편견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문자-너무나 과학적이라서 한번 배우면 잊을 염려도 없는 문자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창조적 역량 때문에 중국이란 무자비한 국가의 옆에서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 감탄하곤 한다. 그 끊어지지 않는 민족의 생명력 뒤에는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문자는 성경을 기록한 문자였기에 종교와 함께 글자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청을 건국한 여진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왕조를 창건한 다음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어 한족의 언어인 한자와 병기해서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언어도 글자도 민족도 사라지고 없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논리로 만들어진 문자의 운명인 것이다.  마야와 잉카 문명의 후예들인 남미의 원주민들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고 정복자의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말은 사고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그 언어의 단어들이 생각의 느낌과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언어가 없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정신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자는 정보저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언어가 한시적인 소통수단이라면 언어는 지속적인 것이다. 우리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의 구전문화가 어떻게 소멸되어 갔는지를 잘 알고 있다. 구전은 인간의 삶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 영화 <화씨 451도>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죽어 가는 한 노인이 눈 내리는 벌판에 누워 자신의 아들인듯한 젊은이에게 생 시몽의 저서를  구두로 전수하는 장면... 소설보다도 더 설득력있게 묘사된 그 장면에서 문자가 사라진 한 종족의 운명은 미래가 유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자의 역사는 이런 점은 행간의 뒤편으로 숨어있다. 오직 문자의 역사만을 다룰 뿐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문자의 목록은 바로 지금 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들의 문자라는 사실이다. 이 살아남은 문자의 대열에 우리의 한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문자의 미래에서 우리의 한글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미래에 대한 대답은 지금 초등학생들의 언어와 문자의 활용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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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세계사 1
클라이브 폰팅 지음 / 심지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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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학적으로 본 세계사의 모습은 시작부터 으스스하다. 저자는 남태평양 한 가운데 외롭게 떠 있는 면적 120제곱킬로미터의 이스터 섬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인간이 이 섬에 이주하여 일으킨 巨石문명이 어떻게 섬을 황폐화시켰는지를 차분하게 보여 준다. 주민들의 석상을 만들기 위한 대대적인 벌목과 이에 따른 섬의 황폐화, 그리고 회복할 수조차 없이 파괴된 환경에 의해 발생된 생활환경의 변화로 이어지는 환경파괴공식에 의해 이스터 섬은 몰락해 간다. 이 이야기는 인간이 자연이라는 환경의 그믈망 속에서 외따로 독립된 위치에 따로 존재하는 종이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고 있다. 인류 역사의 99%가 수렵.채취 경제였다. 200만년간 인류는 동일한 방식으로 지구상에서 자신들이 삶을 이뤄 나갔다. 당시의 인류는 수렵이나 무분별한 채취를 통해 먹이사슬의 한 부분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환경의 변화에 큰 영향을 제공하였다. 이에 따른 인간 삶의 방식이 변화하고 이 변화는 또 다른 종의 멸종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인류역사의 99%를 차지하는 수렵. 채취 경제하에서 자연의 파괴는 미미하였다. 그것은 소수의 인류가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독립적인 단위로 생활하면서 이동하였기 때문이었다.  인류가 본격적으로 환경의 파괴를 시작한 것은 인류가 식량을 수렵.채취에서 얻는 방식을 포기하고 다른 방법을 택하게 된 1만년전 이후부터라고 보고있다. 그 치명적이며 혁신적인 방식이란 다름아닌 <농업>이었다.


역사에서 신석기 혁명으로 알려진 농업의 확산은 인류에게 불안한 미래보다는 안정적인 현재의 삶을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이제 인류는 먹이를 쫓아서 이동하는 고단한 삶을 마감하고 대신 집단적으로 한 지역엣 정주의 삶을 선택하게 됨으로서 환경파괴는 가속화되게 되었다. 농업의 발전은 인구의 증가를 불러 일으켰고, 이 결과 농업은 더 많은 땅을 필요로 하게 되면서 무자비한 자연의 개척-혹은 파괴-이 가속화 되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인구의 증가...이런 반복은 인류에게 식량외의 또 다른 대안 야생동물의 가축화를 병행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농업의 발전은 좀더 많은 수확량을 목표로 모든 것이 이뤄졌다. 이 결과 농작물의 발육에 해가되는 모든 해충은 인간의 손으로 박멸하였다. 이는 이들을 먹이로 삼고 있는 또 다른 동물의 멸종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독교적 세계관-너희는 낳고 번성하여 이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려라-에 의한 자연 파괴는 점점 가속화 되었다. 그리고 인간은 자연에게 마지막 타격을 가하게 된다. 200년전에 시작된 산업혁명은 지구를 완전히 빈사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농업혁명이 지구의 껍질을 강탈하는 것이었다면 산업혁명은 지구의 속을 강간하는 무자비한 것이었다. 이 결과 지구는 안과 속으로 회복불가능한 상처를 입게 되었다. 산업혁명의 결과 농업사회는 산업사회로 바뀌게 되고 도시의 팽창과 인구의 집중은 지구를 벗어난 공간의 오염으로까지 확산되게 되었다. 이제 오염과 파괴는 이차원적 세계를 벗어나 삼차원적 세계로까지 확장되었다.


클라이브 폰팅의 세계는 장미빛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제목으로 설정했던 녹색과 비슷하다. 녹색에는 자연.생명.건강.봄.희망이 속해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공포와 독毒의 색깔이기도 하다.  자연은 있는 그 상태에서 우리에게 긍정적인 요소로 작용하지만 변화되는 순간 부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 녹색의 세계사는 그동안 인류가 외치면 달려왔던 <진보.번영>이란 구호가 우리의 배후를 찌르는 등 뒤의 칼로 돌변할 수도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東江의 역설>을 잊지 말아야한다. 보호되어야만 하는 가치가 있는 동강이 메스컴을 통해 알려진 순간 그 동강은 순식간에 인간들의 손길을 거치면서 피폐한 환경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은 환경문제가 그리 단순하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얼마전에 텔레비전에서 쿠바의 친환경농법에 대한 것을 보았다. 그들은 미국의 경제적 봉쇄를 극복할 방법으로 자신들이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전통적인 농업방식을 다시 역사의 전면으로 부상시킨 것이다. 물론 이런 방식이 인류의 식량난을 해결할 수있는 최선의 길은 아니지만 지역적인 방식으로 채택될 때 의외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잠재성을 인정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녹색의 세계사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자본주의에 의해 황폐화되었던 쿠바에서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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