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의 역사 - 지식의 재발견 4
앨버틴 가우어 지음, 강동일 옮김 / 새날 / 1995년 2월
평점 :
절판


가끔 이런 생각을 해본다. 세종께서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우리나라에서 벌어졌을까.  그 자체를 가지고 상상의 세계를 펼치며 가상소설을 쓰기도 한다. 말은 있지만 문자가 없는 민족은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까. 중국에는 공식적으로 55개의 소수민족이 한족과 동거하고 있다. 하지만 중국에서의 소수민족은 말 그대로 94:6의 절대 열세인 소수민족이다. 그런데 중국은 공식 언어로 북경어와 한자-간자-를 국가의 표준으로 삼고 있다. 즉 중국에서 제대로 삶을 살아가려면 중국어와 간자를 필수적으로 알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사회에서 소수민족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나간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렇기에 소수민족의 언어와 문자는 중국이란 거대한 인종의 편견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런 일은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었다. 다행히 우리는 우리의 문자-너무나 과학적이라서 한번 배우면 잊을 염려도 없는 문자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런 창조적 역량 때문에 중국이란 무자비한 국가의 옆에서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을 건국한 유대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해 감탄하곤 한다. 그 끊어지지 않는 민족의 생명력 뒤에는 문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 문자는 성경을 기록한 문자였기에 종교와 함께 글자와 민족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청을 건국한 여진족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왕조를 창건한 다음 자신들의 문자를 만들어 한족의 언어인 한자와 병기해서 사용하였지만 지금은 언어도 글자도 민족도 사라지고 없다.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정치적 논리로 만들어진 문자의 운명인 것이다.  마야와 잉카 문명의 후예들인 남미의 원주민들은 지금 어떤 처지에 있는가. 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문자를 잃어버리고 정복자의 문자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말은 사고를 결정짓는 요소이다. 그 언어의 단어들이 생각의 느낌과 분위기를 결정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언어가 없이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표현한다는 것은 정신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자는 정보저장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언어가 한시적인 소통수단이라면 언어는 지속적인 것이다. 우리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원주민의 구전문화가 어떻게 소멸되어 갔는지를 잘 알고 있다. 구전은 인간의 삶과 같은 운명을 가지고 있다. 영화 <화씨 451도>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죽어 가는 한 노인이 눈 내리는 벌판에 누워 자신의 아들인듯한 젊은이에게 생 시몽의 저서를  구두로 전수하는 장면... 소설보다도 더 설득력있게 묘사된 그 장면에서 문자가 사라진 한 종족의 운명은 미래가 유예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문자의 역사는 이런 점은 행간의 뒤편으로 숨어있다. 오직 문자의 역사만을 다룰 뿐이다. 하지만 살아남은 문자의 목록은 바로 지금 이 지구를 지배하고 있는 세력들의 문자라는 사실이다. 이 살아남은 문자의 대열에 우리의 한글도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이해해야할까.  문자의 미래에서 우리의 한글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미래에 대한 대답은 지금 초등학생들의 언어와 문자의 활용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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