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도란 무엇인가 동문선 현대신서 130
니토베 이나조 지음, 심우성 옮김 / 동문선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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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서구인들의 답변 가운데 제일 많이 언급된 것이 카미카제神風와 셋푸쿠切腹로 알려진 할복자살 이른바 히라키리割腹였다. 반면에 무사도와 워크맨, 벗꽃과 같은 문화적 이미지는 상대적으로 적었다고 한다. 이에 자극받은 일본정부는 장기적 계획을 세워 일본의 이미지를 군사적인 것에서 문화적인 것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미국의 시사 만화가 루리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여 일본을 대표하는 이미지를 만들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결과 타로상이라는 아주 이미지가 순화된 일본인상을 창출할 수 있었다. 이빨도 튀어나오지 않고 근시도 아닌 정상적이면서 부드러운 모습의 타로상은 루리의 시사만화를 통해 일본의 달라진 모습을 널리 선전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이 타로상은 일본이 세계인들에게 <경제적 동물economic animal>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게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에 자신을 얻은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 이미지와 함께 부시도武士道라는 무형의 자산 역시 서구인들에게 알리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70-80년대의 경제적 성공에 힘입어 헐리웃을 공략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일본의 <잔잔바라식>영화를 뿌려대고 미국 영화에 자본을 대면서 화면의 일정부분을 일본식 분위기로 장식하면서 헐리웃식 어설픈 일본 문화가 세계인들에게 보여지기 시작하였다.

일본이 세계인들에게 그토록 자신들의 진짜 모습으로 알아주기를 원하였던 부시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 책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제공하고 있다. 저자인 니토베 이나조는 일본인이었지만 서구의 물을 많이 먹은 지식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일본의 정신을 설명하면서 서구적 이해의 잣대를 대입함으로서 일본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과의 간극을 상당히 모호하게 만들어 놓았다는 점이다. 가령 <칼, 어째서 무사의 영혼인가>에서 <쇠를 달구는 것은 중요한 종교적 행위였다>라고 하는 곳에서는 초세기 기독교의 교부이던 아우구스티누스의 격언 <쇠는 달굴수록 강해진다>라는 것이 생각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렇게 니토베상은 서구적인 불의 강(Feuer-Bach)에 일본사상을 적신다음 그것을 다시 일본적인 것으로 환원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일본의 순수한 정신이 아니라 그랬었더라면이라는 환상이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가 부시도의 큰 기둥으로 삼고 있는 義.勇.仁.禮.誠은 유교적 덕목이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본의 유학은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잡혀간 조선인 선비 姜沆이  후지와라 세이카藤原醒窩·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 등에게 퇴계의 유학을 전수함으로서 개안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후지와라의 경우 강항에게서 퇴계 유학을 배워 일본 유학의 개조가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바가 크다. 이들에 의해 일본적 유학의 토대가 구축됨으로서 정치에 유학적 사상을 반영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퇴계학의 맥을 이은 강항의 조선주자학은 하야시 라잔林羅山, 키노시타 쥰앙木下順庵,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아메노모리 호오슈雨森芳洲로 이어져 일본적 풍토에 적응하는 유학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사상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 천황제를 옹호하는 사상적 근간을 이루게 된다는 점이다. 즉 니토죠상이 언급하고 있는 부시도의 기둥이랄 수 있는 유교적 소양은 이렇게 형성된 사상이었던 것이다. 여기에 막부 말기에 일어난 실제적인 사건을 극화한 추신쿠라忠臣藏와 할복의 이미지가 합성된다. 실제로 일본 역사에서 할복의 문제는 많은 논쟁을 내포하고 있다. 일본의 전국시대와 이후의 무가 시대의 흐름을 살펴볼 때 할복은 일반적인 것이 아닌 특수성을 가진 제도였음을 알 수 있다.  즉 할복을 통해 죽는다는 것은 자신이 혼자 죽음으로해서 다른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즉 할복은 가문의 우두머리가 행할 수 있는 죽음의 예식이었던 것이다. 니토베상은 이런 예를 이야기할 때마다 서구의 유명한 문학작품속의 구절을 의도적으로 삽입하므로서 일본적 이미지의 비극성과 낭만성을 동시에 충족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서구의 기사도에서 등장하고 있는 기사수업의 이미지인 칼과 명예 그리고 여성에 대한 관점이 추가되면서 일본적 부시도는 서구의 기사도에 필적하는 하나의 정신으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종합하여 니토죠상은 야마도 다마시大和魂라고 이름한 것이다.  

니토베상의 <무사도란 무엇인가>는 모든 것이 역으로 진행되고 있는 역사인 것이다. 한 일본인이 서구인을 상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진 책이 다시 일본으로 들어와 천황제의 강화를 위한 하나의 고전적인 교과서로 바뀌는 과정은 마치 일본이 <脫亞入歐>를 강렬하게 원하였듯이 자신들이 이렇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일본은 이 책의 부시도를 실천하기 위해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에게 제네바 협정 이상의 대우를 해줌으로서 서구인들에게 부시도의 엄격함과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주었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뒤 일본의 이런 부시도의 정신은 멸시와 폭행이란 이름으로 훼손되었음을 볼 때 부시도는 일본의 본질적인 정신이 아니라 그렇게 되고자하였던 하나의 좌표였다는 생각이 든다.  좌표란 하시라도 바뀔 수 있으니까. 여기에서 하나 더 언급하고 지나가야 할 것은 이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전법인 <만세돌격>과 <玉碎>와 무사도의 관계이다. 이 두 공격방식은 집단자살과 같은 양상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 부시도의 정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명예와 고통, 인내가 무사의 정신이라면 끝까지 어려움을 이겨내며 살아남는 것 역시 명예로운 일인 것이다. 오히려 당시 일본군이 행한 행동은 부시도의 모욕에 가까운 행위였다. 결국 이런 일본의 행위는 무사도가 자신들의 고유한 정신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결국 만들어진 무사도는 일본의 젊은이들을 옥으로 보전하지 않고 기와로 부서지게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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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거짓말
Mark Monmonier 지음 / 푸른길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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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는 자신의 글에서 1:1 지도를 그리기 불가능한 이유를 아주 자세하게 설명한 적이 있다.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심각하고 냉소적이며 유머스러하게 이어나가는 에코의 글을 읽으면서 그 글의 뒤쪽에 숨어있는 진실을 언뜻 볼 수 있었다. 즉 실제 모습이 아닌 것은 어떻게보면 모두 거짓이란 의미를 에코는 반어적으로 지적한 것이리라. 실제로 우리는 지리시간에 수많은 지도의 이름을 배운다. 하지만 그 어느 지도도 실제와 같은 것은 없다. 지도에는 어쩔 수 없는 작은 거짓말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메르카토르 도법으로 그려진 지도를 보고 가장 가까운 항로를 찾으라고 한다면 대부분 그리는 항로는 가장 먼 길을 찾아 그리게 되어있다. 그리고 남극과 북극의 모습은 전혀 상상할 수 없게 되어있다.  정적원통도법은 면적관계에서는 정확성을 유지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불확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사정거방위도법 같은 경우에는 어느 한 지점을 중심으로 최단거리의 대권경로의 정확한 거리와 방위를 표시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지도로서는 부적합하다. 이렇듯 지도는 종합적이라기보다는 필요에 의한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바로 이런점이 지도를 통한 왜곡과 선동이 가능하게하는 것이라 하겠다. 지도의 이런 불합리성은 3차원의 공간을 2차원의 평면에 옮겨 그릴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이것은 지도가 작성자 혹은 작성국가의 세계관이라든가 정책으로부터 시작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지도가 정보 이외에도 다른 목적으로 사용될 수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지도에서 정보의 역할은 대단하다. 군 작전용으로 사용되는 1:5000의 지도는 군인들의 표현대로 물소리와 새소리가 들릴 정도로 정확하고 자세하다. 그러나 지하철에서 사용되는 노선도 역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지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지도는 이렇게 이용되는 목적 혹은 사용하는 집단에 따라 얼굴을 달리하는 다양성을 보여준다. 바로 이런 면 때문에 지도는 정보 이외의 다른 목적으로 사용되는 예가 많다. 한 예로 73년 중동전쟁 당시 캐나다의 유대인들이 유대기금을 거둘 목적으로 작성한 팜플렛에 그려진 이스라엘의 위치는 아랍세계에 포위되어 있는 것을 강조한 그림이었다. 저자는 이 지도를 보면서 영토적 크기만으로 이스라엘의 처지를 보여주는 이 지도에는 이스라엘의 최첨단기술과 군사장비, 미국과 기타 선진국과의 밀접한 동맹관계를 보여주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지도의 선동성은 일차적인 효과를 극대화함으로서 그 속에 감추어진 진실을 외면하도록 만드는 효과가 있음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잠무 카시미르의 분쟁을 보는 인도, 파키스탄, 중국의 시각 역시 지도를 통해 알 수 있다. 파키스탄은 이 지역을 자국의 지도 속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반하여 인도는 이 지역을 자국의 영역 속에 포함시키고 있다. 반면 영국과 미국은 이 지역을 인도와 파키스탄이 점유한 지역을 명확하게 표시하고 있다. 반면 중국의 경우는 이 지역의 경계를 불분명하게 표시해 놓음으로서 하시라도 영토적 분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이 책은 이렇듯 지도의 허와 실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도는 자국이 타국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일차적이며 기본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지도의 왜곡이 가져오는 사태는 아주 심각한 것이 될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도 동해의 명칭 문제와 중국의 동북공정에 의한 역사적 지도문제로 이웃국가와 마찰을 빗고 있다. 이런 문제가 의미하는 현실의 정치적인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낄 수 있다는 점이 이 책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장점이라 하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구 식민 제국주의자들이 왜 그토록 지리에 관심을 갖고 지도의 제작에 몰두하였는가를 이 책을 읽으면서 그 의문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왜 자국의 색과 식민지의 색을 일치시켰는지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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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 우리 시대의 고전 1
요한 호이징가 지음, 최홍숙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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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가을은 장엄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 장엄함은 낡은 것이 죽고 새로운 것이 잉태되는 순간이다. 여기서 가을이란 단어를 글자 그대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가을은 조락의 계절이면서 결실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호이징가는 가을이란 말 속에서 중세의 양면성을 보여주고 있다. 중세 말기는 시스템적으로 보자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시기였다. 종교와 정치의 관계는 명확해졌고, 신분제 역시 확고한 형식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기사도는 귀족들의 양식화된 사랑의 한 형태로 규범화되어 있었다. 외형적으로 중세 말기의 모습은 완벽 그 자체였다. 당시 중세인들은 한세대도 지나기 전에 엄청난 변화가 시작될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중세 말기의 삶은 그 어떤 형식에 의해 정형화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닭이 울면 일어나 일을하고 수도원의 종이 울리면 하던 일을 멈추고 삼종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해가 지면 집에 돌아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였다. 주일이 되면 주님을 찬미하기 위해 교회에 나가 미사를 드렸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결혼을 하고 죽으면 장례식을 치뤘다. 어떻게보면 중세 말기의 모습은 한가로운 빅토리아시대의 잉글랜드 농촌의 모습처럼 보였을 것이다. 기사들 역시 총포가 발명된 이후 달리 할일이 없었다. 이제 자신들은 전쟁터의 주역이 아니었다. 말도 탈줄 모르는 평민들이 군대의 중추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겁고 번잡한 장비대신 가벼운 전투복에 활과 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기사들은 더 이상 자신의 용맹을 과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상실감은 기사도의 사랑문학으로 어느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사들은 자신들의 의식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 이 정형화된 의식 자체는  앞으로도 계속 살아남을 것이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여전히 교회에 나오고 있었지만 믿음은 그리 깊지 않았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을 모두 이미지로 이해하고 있었다. 십자가, 성체, 성혈, 성인과 같은 이미지로 이해되는 종교는 당연히 형식적인 것으로 변모할 수 밖에 없었다. 이 형식성은 앞으로 일군의 개혁적인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을 터였다. 중세의 예술 역시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종교가 형식화되면서 예술 역시 매너리즘에 빠질 위험성이 다분히 있었다. 중세 말기의 상황은 완벽한 가운데 모든 것이 형식화되어 버리는 시기였다. 즉 화석화되면서 어떤 새로운 틀이 나타나지 않는한 쓰러진 거대한  공룡처럼 스스로의 무게에 질식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세는 질식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호이징가가 책의 첫머리에 기록한 것처럼 중세는 지금보다 무려 5세기나 젊었기 때문이었다. 이 젊은 자신의 모순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중세는 모순의 해결책으로 고전을 선택하였다. 15세기의 중세인들은 자신들의 삶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새로운것에 대한 도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지켜온 것이 영속되리라는 확신에서 오는 자신감이었다. 중세는 아직 살아있고 그 사상은 비관적이고 운명적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의 마음과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바로 코 앞에 새로운 산들바람이 불고 있었지만 중세인들에게는 아직 겨울이 남아있었다. 그 겨울을 지낸 다음에 봄을 맞이해아 하는 것이 순리였다. 그래서 중세의 가을은 장엄과 비극성을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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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 빛깔있는책들 - 불교문화 59
김삼룡 지음, 송봉화 사진 / 대원사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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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은 현재불이 아니라 當來佛, 즉 앞으로 올 부처를 가리키는 말이다. 미륵불은 기다림의 응축물인 것이다. 그러기에 미륵은 현세의 세도가들이 기원하는 부처가 아니다. 고통받고 억압받는 자들의 부처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미륵의 모습은 한결같이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 볼이 도톰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 올 세계는 고통도 없고 굶주림도 없다는 민중들의 바램이었을까. 미륵사상은 어찌보면 그 태생부터가 의미심상하다. 불가의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석가가 보살이었을때 미륵보살과 함께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늘의 뜻은 미륵이 현재불로 석가가 당래불로 결정되어있었지만 석가께서 수행을 맹렬하게 하여 100겁의 수행을 91겁의 수행으로 단축하여 미륵보다 먼저 성불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륵은 앞으로 민중을 제도하러 오기 위해 오늘도 성불을 위해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미륵신앙은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기층 민중들의 의식 속에서 면면히 전해내려온 신앙이다. 그래서 미륵신앙은 소박한 면을 보여주고 있다. 석존이 웅장한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면 미륵은 민중들의 곁에 존재하고 있었다. 소박하면서도 고졸한 모양으로 동네 어귀나 산중턱의 바위벽에 미륵은 언제나 존재하고 있었다. 미륵의 역사는 기층민중들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한말 새로 창시된 동학, 증산교, 원불교 등이 모두 미륵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미륵 사상은 민중들의 삶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륵신앙은 농민들이 집중되어 있는 삼남지방-충청.호남.영남-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이 가운데 특히 충청. 호남의 옛 백제권에 집중해 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바가 크다할 것이다.

이 책은 미륵의 역사를 기록한 책이 아니다. 미륵의 모습을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부피는 작지만 아주 두꺼운 역사를 읽는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미륵의 모습을 보면 그 온화한 미소와 후덕한 모습은 유홍준 선생의 답사기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누군가 <기다림은 곧 희망>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어쩌면 미륵의 세계와 딱 들어맞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 희망의 조각들이 우리의 땅을 뒤덥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현재가 희망적이지 못하다는 것일까. 하기사 장길산의 시작이 장산곳 매에서 시작하여 운주사 천불로 막을 내리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 현실의 좌절은 미륵의 기다림으로 나타나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미당은 선운사 입구에서 동백꽃을 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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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사회 - 개정판 눈빛시각예술선서 10
지젤 프로인트 지음, 성완경 옮김 / 눈빛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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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역시 미래를 잘못 예측한 문명의 利器였다. 사람들은 사진이 처음 나왔을 때 누가 그림 대신 사진을 선택하겠는가하고 의아해 하였다. 사진을 옹호한 사람들 역시 <그림은 끝났다>라는 극언을 서슴치않았다. 하지만 한편의 사람들은 그림의 예술성만 인식했지 사진의 기록성이란 점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런 반증은 처음 사진이 나왔을 때 미술가들은 모델 대신으로 사용할 수 있는 대체물로 생각하였다는 점이다. 하지만 사진의 기록성과 복제성의 뛰어난 효과를 알게된 이후 사진은 그림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게 된다. 반대로 사진의 유효성을 주장한 사람들은 그림의 고유성을 알지 못하였던 것이다. 드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란 그림과 로버트 파카의 <스페인 내란>이란 사진을 비교해보면 사진과 그림의 차이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드라크루아의 작품에서는 느끼지 못하는 전율이 파카의 작품에서는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면 파카의 사진에서 볼 수 없는 숭고한 이념이 드라크루아의 그림에서는 드러나는 것이다.  


사진이 처음 등장한 시기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로 인하여 유럽의 하층 근로자들이 새로운 중산계급으로 대두하던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이전의 부르조아지들과는 다른 감각을 가지고 제도권에 편입된 계층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은 기존의 예술관과는 다른 관점을 갖고 있었고 취미도 달랐다. 사진은 이런 이들의 감각과 아주 잘 들어맞는 도구였다. 대량으로 복사할 수 있으며 그림이 갖지 못한 사실성과 신속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모습을 남기기 위해 여러날 동안 아틀리에에서 불편한 자세로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되었다. 불과 몇 십분의 시간만 투자하면 자신이 원하던 모습을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원한다면 백장 천장이라도 복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의 이런 특성 때문에 예술가들은 한동안 사진을 경원시하였다. 예술가들이 사진을 경원시하는 동안 다른 편에서는 사진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하였다. 사진의 특성상 이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아주 용이하였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진이 <性산업>에 처음 이용되었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사진이 섹스산업에 이용되는 것을 계기로 사진의 기록성이란 측면이 부각되었다는 점은 주목할만하다. 사진은 이제 단순한 복제에서 한 시대의 단면을 기록하는 도구로도 이용되었는데 이는 사진의 기록성과 예술성 그리고 역사적 인식이 결합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사진은 여기에 멈추지 않고 자신의 영역을 계속 확대해 나가고 있다. 기술적 측면에서도 불편한 건판식 사진에서 일반적인 음화식 사진으로 그리고 즉석 사진인 폴라로이드로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 자신을 계속 변신해나가고 있다. 그러나 사진의 사회적 측면은 프로인트 여사가 이 책을 쓴 시점에서 예측한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간듯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진의 무차별 폭로성이 더욱 강화되어 가고 있는듯한 느낌이다. 빠빠라찌라든가 저속한 부아리즘voyeurism의 등장은 인터넷 시대와 맞물려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럼에도 사진은 1822년 니세포르 니엡스가 사진술을 처음 발명한 이래 우리 사회의 발전과 함께 나아가는 우리 문명의 가장 보편적인 요소가 되었다는 프로인트 여사의 마지막 결론이 타당하게 느껴진다. 이는 그만큼 사진이 우리와 아주 가까운 곳에 하나의 요소로 자리를 잡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오늘도 자신의 주위에서 열심히 디카를 눌러대는 것이 그 증거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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