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숭배
피터 브라운 지음, 정기문 옮김 / 새물결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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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에서 정의하는 성인이란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하느님을 아무 중간 매개물이 없이 직접 뵈옵고, 복락을 누리는 모든 천사와 사람들을 가리키며, 특별한 의미로는 교회의 가르침을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한 사람을 말한다. 좁은 의미로는 그의 생전에 덕행과 행적이 뛰어나서 교회가 모든 신자들의 귀감으로 선언하고 존경토록 선호한 자를 의미한다>라고되어 있다. 여기의 정의에 따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인 혹은 성녀는 좁은 의미의 성인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넓고 보편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던 성인의 의미가 축소되면서 한정적으로 변모했을까. 이에 대한 추적이 이 책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에서 거룩하다는 의미의 聖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 경부터였다. 그전까지는 "성"이란 단어 대신 "사도"라는 단어를 앞에 붙여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가령 중세인들이 여행을 떠날 때 "성 크리스토폴이여, 우리를 보호해 주소서>라고 기도했다면 초세기 신자들은 "사도...여, 우리를 위해 빌어주소서>라는 형식을 사용하였다. 이런 흔적은 초기 교회의 지하무덤에서 돌에 새겨진 형태로 많이 발견되고 있다. 가톨릭 교회가 말하고 있는 넓은 의미에서의 성인이란 초세기에는 순교자를 지칭하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영웅적인 덕행을 실천하고, 하늘에 올라가 하느님을 뵈게된 사람들이 성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순교자가 묻힌 땅은 신성한 장소가 되었다.  하지만 순교자가 많아지고 지역적으로도 광범위하게 되면서 성인이 양산되는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결국 교회가 성인 문제에 개입하게 되면서 성인으로 불릴 수 있는 조건의 정의가  점점 좁혀지게 된다. 이 결과 5세기 경에 성인이란 칭호를 사용할 때는 일반적으로 황제나 거룩한 직무를 띤 주교와 같은 사람에게 한정하여 이 칭호를 붙이기 시작하였다. 보편적이고 평등적인 가톨릭에서 신자들을 구분짓는 성인이란 제도를 도입함에 있어 무척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피조물로서 인간은 신 앞에서 평등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믿는자는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다만 누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을 힘껏 발휘하면서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게 노력하느냐에 따라 성인이 되느냐 안되느냐가 가름될 뿐인 것이다. 즉 교회는 성인이란 자신의 노력과 신의 은총이 결합된 것이라는 것을 확인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노력과 은총이란 사실을 어떻게 구분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게되고 이를 판별하는 것은 교회의 몫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는 왜 성인이 필요하게 되었을까. 그것은 역사적인 변화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였다. 초세기 교회가 박해을 받을 때는 누구나가 순교의 월계관을 받을 수 있었고 누구나가 영웅적으로 자신이 믿는 믿음을 죽음으로 증명할 수 있었다. 이 당시는 믿는다는 그 자체가 성스런 행위였다. 즉 초세기 교회와 신자는 거룩함 그 자체였던 것이다. 하지만 313년 이후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공인되면서 순교는 제국내에서 공식적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이제 교회는 새로운 형태의 모범이 필요하게 되었다. 피와 죽음으로 대표되던 교회를 증거하는 행위가 아니라  좀더 시대의 흐름에 맞는 성인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제 교회는 순교자가 아니라 성인이 필요하게된 것이다. 이 결과 성인의 기준 또한 순교에서 내적인 수양과 헌신, 고행, 덕행, 청빈등이 중요한 요소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성인들은 결코 고통을 극대화하기 위해 감각적인 유혹을 자제해야만 했다. 이렇게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교회와 신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하느님의 현존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즉 그리스도의 어디에나 내가 있기 때문에 네가 만나는 사람에게 친절하게 해주는 것은 나에게 해주는 것이라는 말처럼 성인의 삶 그 자체가 바로 신이 이 지상에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중세의 성인 공경은 아주 특별했다. 그래서 마을마다, 교회마다, 집단마다 또는 개인적으로 수호성인 혹은 수호천사가 지정되었다. 그리고 성인의 이적이 일어나는 장소나 성당은 당연히 신자들의 순례지가 되었고, 중세인들은 이런 순례여행을 통해 또 다른 영적 체험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중세가 깊어갈수록 성인은 중세의 한 요소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이제 중세 교회는 성인이라는 모델을 통해서 모든 믿는자들이 더 엄격하고 신심이 깃든 삶을 살도록 명령하였다. 교회의 이상과 중세인들의 삶 사이에 놓여진 그 간극이 중세의 진정한 삶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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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무덤의 사회사 한국의 생활과 풍속 5
장철수 / 웅진지식하우스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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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들은 삶의 거주지로서 陽宅陰宅의 개념을 사용하였다. 양택은 말 그대로 산 자들의 거주지를 말하는 것이고, 음택은 죽은 자들의 쉴 곳을 말한다. 그러면서 양택과 음택의 위치 또한 풍수에 의해 아주 세밀하게 위치시켰다. 양택이 배산 임수에 남향이라면, 음택 역시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에 남쪽을 바라보게 위치시킨다. 이를 보면 우리 조상들은 삶과 죽음을 인간, 시간, 공간이라는 삼요소가 동일하게 적용되는 동일한 것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사당에 신주를 모시고 기제와 시제를 지내며 망자에 대한 기억을 되새겼다. 즉 죽은 자의 집인 사당이 집 안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삶과 죽음의 공간이 동일선상에서 역사적 시간의 연장으로 이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마치 종묘의 건축이 수평선상에 일직선으로 위치시키므로해서 영원히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삶과 죽음의 형이상학적 모티브를 제공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하겠다. 삶과 죽음이 같은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은 우리만의 독특한 것은 아니다.

이런 사고방식은 세계의 모든 문명권에서 방법의 차이만 있을 뿐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뉴기니의 원시종족은 죽은 자를 자신의 집 안에 안장하기도 하고, 죽은 자의 두개골을 집안에 모시기도 한다.  이런 차이의 다름은 그 민족의 독특한 의식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죽음을 이해하는 세계관은 동일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나타남의 차이가 바로 그 민족의 풍습이 되는 것이다. 이 책에는 이런 문화사적인 시각에서부터 역사적인 시각에 이르기까지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1.민속학과 죽음의 의미, 2.죽음과 주검 그리고 세계관, 3.옛 글에서 본 주검의 처리방법, 4.옛 무덤을 통해본 저승세계, 5.우리 민족의 죽음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특히 사서의 기록과 무덤을 통해본 세계관 같은 것은 무덤을 통해서 한 시대를 조망할 수 있다는 점에서 놀라움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민속학적으로 본 죽음과 그 세계관을 조망한 장(1장.2장)은 그 자체로 훌륭한 죽음에 관한 민속학적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지배자의 무덤을 조망함으로서 어떻게 각 시대마다 갖고 있던 무덤의 특징들이 하나로 통합되어 나타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중국의 사서와 우리의 기록에 나타나는 우리 조상들의 葬法에 대한 기록은 그 자체만으로도 훌륭한 역사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무덤을 통해본 저승세계관은 우리 민족의 죽음관이 어떻게 무덤속에 투영되었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옛무덤의 사회사는 역사적 시간을 따라 변모해가는 죽음과 무덤의 양식을 통해서 어떻게 우리의 현재가 이루어졌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사회사를 접할 수 있게된다. 죽음을 통해서 삶을 바라봄으로서 오히려 삶의 모습이 더욱더 뚜렷하게 인식되는 것을 느낄 때 삶과 죽음은 똑같은 무게를 가지고 우리의 양쪽에 존재하는 것임을 새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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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고고학 산책
C. W. 세람 지음, 안경숙 옮김 / 대원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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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 책의 장점은 읽는 사람이 발굴된 유물과 유적에 역사적 사실을 대입하면서 그장소에서 일어났던 실제적인 사건을 그려볼 수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쉴리만이 트로이를 발굴하였을 때 가장 염두에 두었던 것이 그리스군이 트로이군과 싸우기 위해 하루동안에 해안과 성을 왔다갔다했다는 것과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싸우면서 트로이성을 세바퀴씩 돌았다는 것에 대해 숙고하였다. 즉 트로이는 해안에 아주 가까웠고, 생각보다 작은 성이었음을 염두에두었던 것이다. 쉴리만의 이런 접근방식은 이론 위주의 역사책 보다 훨씬 더 사실적인 역사를 체험하게 한다. 우리는 앗시리아의 군사적 잔인성에 대해 이야기는 들었지만 역사적 사실성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고고학에서는 앗시리아의 설형문자를 해독함으로서 직접적으로 알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는 앗시리아의 침입을 <돌풍과 같다>는 한마디로 압축해 놓았다. 하지만 승전을 기록한 비문에는 더 자세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사실이다. 앗시리아의 설형문자와 비문에는 사로잡은 귀족들의 껍질을 벗기고, 불태워죽이고 손과 발을 잘랐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즉 앗시리아는 2000년 후 몽골인들이 사용하는 방법을 사용한 선구적인 병사들이었던 셈이다. 쎄람의 이 책은 고고학이란 낭만적인 것이라는 우리의 선입견을 어느 정도 불식시켜 준다. 물론 세상을 돌아다닌다는 점에서는 낭만적일 수가 있고, 아가사 크리스티 처럼 메소포타미아지역의 고고학 발굴에 참여하였다가 재미있는 소설을 남기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고고학의 96%는 고통과 고독이 존재할 뿐이다. 옛사람과의 만남이 결코 화력한 분야는 아닌 것이다. 이 책에는 인류의 고고학사에 길이 남겨진 폼페이, 미케네, 트로이, 크레타, 로제타석, 투탄카멘왕의 무덤, 설형문자, 앗시리아, 수메르, 바빌로니아, 아즈텍, 마야, 톨테크의 발견과 발굴에 관한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물론 이 책은 49년도에 출판되어 69년도에 개정판이 나온 책으로서 현대의 고고학적 발굴의 성과를 토대로한 작업에는 미흡한 모습을 보여줄 수도 있다. 특히 쉴리만의 트로이 발굴과 같은 것을 읽어보면 우리의 무령왕릉 발굴기와 너무 흡사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에 아쉽기도 한 느낌이 든다. 만약 당시 전문 발굴단에 의해 트로이의 유적이 세심하게 조사되었다면 우리가 오늘날에도 고전이라며 읽고 있는 일리아드의 내용을 좀더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후 그리스 문명에 대한 이해도 한층 더 깊어졌을지도 모른다. 항상 역사에는 <만약에>라는 단어가 따라 다닌다. 그때...만약에... 이런 말은 어쩌면 역사의 한쪽면에 대한 아쉬움인지도 모른다. 쎄람의 이 책은 우리에게 낮선 중동 지역의 역사와 중남미 지역의 역사를 고고학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중남미의 역사는 근대 이후에 유럽인들에게 알려짐으로서 철저하게 파괴된 역사이다. 이 파괴된 역사를 복원하는 것은 고고학 만큼 적합한 것은 없다. 깨진 토기를 한조각 한조각 맞춰 붙이듯 중남미의 파괴된 역사를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하나씩 복원해 나가는 과정은 고고학이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아주 어린 시절, 초등학생 때였던가... 야외로 소풍겸 사생대회를 간 적이 있었다.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할 일이 없어 비석 비슷한 곳에 남은 스케치북을 대고 크레용으로 막 칠해서 모양을 본 뜬 적이 있었다. 동전을 종이위에 놓고 하던 것과 비슷한 장난이었다. 잘 되지도 않았지만 그때 나타났던 희미한 글자의 모습은 무료한 시간을 죽이기에는 안성맞춤인 놀이였다. 가끔... 그것이 취미가 되고 직업이 되었더라면 좋았을것을...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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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기 (양장)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지음, 박광순 옮김 / 종합출판범우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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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기는 유럽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라틴어를 배우는 사람들의 교재로 사용될 정도로평이하면서도 뛰어난 문체와 우아하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책이었다. 그만큼 이 책은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유럽인들에게 친근한 책이었다.  이 책은 제목이 말해주든 전장터에서 간략하게 쓴 감상기이다. 하지만 내용을 보면 감상기 이전에 지역과 민족에 대한 한 인간의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이고 있다. 저자인 율리우스 캐사르는 알프스 이북에 산재해 있는 골족과 게르만족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기술하고 있다. 캐사르가 이 지역에 관심을 갖게된 것은 자신의 경력에 미흡한 부분으로 남아있던 군사적 경험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자신의 야심을 실현시키기 위한 경력쌓기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그가 갈리아에 머물었던 기간은 대략 기원전 58년부터 원로원이 해임한 기원전 49년 1월까지로 보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는 이 기간동안 말 그대로 로마식 초토화작전을 갈리아지역에서 행함으로써 원주민들의 저항을 무력화시켰다. 사실 로마에게 있어서 이 지역의 안정화는 아주 긴요한 것이었다. 로마는 기원전 222년까지 켈트족과의 치열한 전쟁을 통해 이들을 겨우 굴복시켰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에게 수도 로마까지 함락당한 경험이 있는 로마로서는 이들을 자신들의 세력권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단속하는 것이 절대 필요했다. 이 결과 로마는 갈리아의 골족과 게르만족에게 카르타고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을 적용하였다. 즉 <친구가 아니면 적>이란 로마식 원칙을 이 지역의 부족들에게 강요하였다. 로마의 친구가 된다면 로마의 지도권을 받아들여야만 하고-쉽게 말하면 식민지가 되는것-그렇지 않다면 죽음이었다. 로마의 이런 강압적인 태도에 갈리아의 부족들은 위대한 전사이며 지도자인 베르킹게토릭스Vercingetorix-이 지도자의 이름에 붙은 접미사 rix는 rex(왕)와 같은 뜻-의 지도하에 치열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결국 이들은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고 로마에 항복하고 만다.  이런 전투의 성과 이외에도 캐사르는 이 책에 갈리아에 살고 있던 제부족들의 풍습과 관습, 그리고 주거와 사회적 분화와 같은 당대의 역사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풍부한 사회상을 알 수 있는 자료들은 이 책이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와 함께 이 지역의 원주민을 연구하는데 아주 긴요한 일차적 사료로 사용될 수 있는 지위를 얻게 하였다. 캐사르에 의해 갈리아지역이 정복되면서 이 지역은 로마화가 지속적으로 시행된다. 이 결과 이 지역의 제부족들은 인종상으로는 게르만족의 지파이면서 문화적으로는 라틴화하는 과정을 걷게된다. 이 혼합적인 사회구성은 이후 유럽 사회를 변화시키는 아주 중요한 요소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이 지역의 게르만 지파들은 로마화한 덕분에 일찍 안정적인 사회를 구성할 수 있게 됨으로서 게르만족의 대이동 당시 거의 변화를 받지 않음으로서 새로운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캐사르의 <갈리아 전기>는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의 시작이 된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갖고 있으며 이후 유럽 사회와 민족의 분포도를 이해할 수 있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할 수 있다. 또한 군사적 사료로서도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당시 로마와 갈리아 제부족이 사용한 무기라든가, 축성의 방식, 전술, 복장 등을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서 이 책은 사회적인 것 뿐만 아니라 군사적인 측면도 함께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책의 특성이 지명과 인명과 부족명이 무수히 등장하는 가운데서도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읽어나가게 하는 요인이다. 이 책은 서양사 시간에 교과서에 항시 등장하는 책이지만 쉽게 읽혀지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한번 읽어본다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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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이야기
박현숙 / 미래엔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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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국사를 배울 때 수 많은 탑 가운데 백제의 탑은 우리 나라에 딱 두개-정림사지 오층석탑과 익산 미륵사지 석탑-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힘들게 안외어도 되니까- 놀란 적이 있다. 그만큼 백제의 역사는 기록의 역사이지 우리 삶의 가까이에 존재하는 역사는 아니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갔을 때 도시 전체가 유적과 함께 어울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서 신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여의 수도였던 공주나 백제는 한 왕국의 도읍지였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남아있는 유적이 적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기록 속의 백제는 일본에 천자문과 기술을 전해준 국가이고, 신라에는 아비지라는 기술자를 보내 기술을 전수해준 국가였다. 또한 중국의 요서와 요동지역에 강력한 해상 세력을 건설한 국가이기도 하였다. 이런 왕성한 활동을 한 국가의 실체가 잊혀진 것이 되었다면 무엇인가 크게 잘못 된 것이라 하겠다. 이 책은 삼백쪽이 채 안되는 얇은 책이지만 백제를 아는데 아주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다. 특히 마지막 7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백제사의 연구 동향과 같은 자료는 일반 역사서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이 연구동향을 통해보면 백제사의 범위가 한반도의 고구려.신라와의 관계속에 고정되있는 것이 아니라 동양사의 일본과 중국의 역사와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백제사의 지방통치제도인 部-일본의 베部-의 문제와 담로제는 일본사와도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예로 <日本書紀 神代紀 四段 一書>에 보면 <陰神과 陽神이 성교하여 부부가 된 후에, 산달産月에 이르러 이들은 談路洲를 母胎로 大日本을 낳았다>라는 기록이 의미하는 것은 백제와 일본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만큼 고대 백제는 일본.중국과 활발한 교류관계를 지속하고 있었으며 이들 국가들과의 관계를 정립하는 가운데 백제의 국가 성격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백제는 우리의 고대 국가 가운데 유일하게 건국신화를 가지고 있지 않은 국가이다. 이것은 백제의 성격이 토착민들에 의해 건설된 국가가 아니라 왕성한 확장력을 가진 이주민집단에 의해 건설된 국가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마한의 강역에 국가를 건국한 백제는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제는 고대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백제는 역사적으로 보면 패배한 왕국일 뿐이다. 즉 패배자의 역사는 승자가 만든 역사의 정당한 자리에 끼어들 수 있는 여지가 희박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백제는 신라에 의한 삼국 통일과정에서 가장 치열하게 저항한 지역이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로 백제는 승리자들에 의해 의식적으로 폄하된 역사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는 이런 백제의 모습을 그동안 이룩한 고고학적 발굴과 연구실적을 가지고 차분하게 우리들에게 밝혀주고 있다. 이런 차분함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면서 백제를 감성이 아니라 이성으로 바라보게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리고 책 말미에 백제와 관한 논문과 연구서의 목록을 담아 놓은 것은 이 책이 단순히 읽을 거리로 남지 方?백제를 연구하는 사람들의 길잡이가 되게하려는 저자의 보너스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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