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메론 일신서적 세계명작100선 35
보카치오 지음 / 일신서적 / 199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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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후기에 유럽을 엄습한 페스트. 그 죽음의 사신을 중세인들이 이겨낼 재간은 없었다. 이들이 페스트에 대항하는 길은 기도하거나, 교외로 도망가는 것 뿐이었다. 가난한자들은 기도를 택했고, 부자들은 교외로 도망갔다. 전염병이 아직 도달하지 않은 한적한 시골 별장에서 도시의 부르조아지들은 죽음의 공포를 달래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각자 자신이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10명의 인간들이 열흘간에 걸쳐 풀어놓는 이야기는 어쩌면 당시 태동하고 있던 부르조아지들의 한담일 수도 있다. 이들의 한담이 어찌보면 한가한 부자집 인간들의 유희로 비쳐질지 모르지만 이들이 느끼는 감정과 생각이 고스란히 근대로 이전되었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들이 풀어놓은 이야기는 근대를 형성한 부르조아지들의 속에 담겨있는 생각일수도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특히 종교에 대해서 신랄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는 종교적 사고가 근대적 사고와 상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데카메론의 역사적 의의는 근대소설의 효시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곳곳에는 중세의 흔적이 남아있다. 부르조아지들은 여전히 제일 하층민인 농민들의 무식함을 경멸하고 귀족과 성직자들의 위선과 방탕을 풍자하고 조소한다.  당시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는 복합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사실 당시 중세인들이 믿고있던 종교는 오직 하나였다. 그래서일까 중세인들은 종교와 성직자들을 비판하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교회가 이런 요구를 묵살하게되자 테두리안에서의 변화 대신 근본적인 변혁을 시도하려 하였다.  교회가 민중의 바램을 충족시켜주지 못하게되자 민중들은 본질적인 변화의 방향을 선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결과 종교는 분열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성직자들과 수도사들의 타락은 종교가 세속화됨으로서 나타난 당연한 귀결이었다. 교회의 세속화는 교권이 왕권보다 우위에 있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 교회는 세속권력과 결탁하여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하게 되고 여기서 얻게된 부로 인해 부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기서 아주 재미있는 현상은 이 책에서 이야기를 구성하는 집단의 사고방식이라 하겠다. 쟈크 르 고프가 <중세의 지식인>이란 책에서 언급했듯이 초기의 인문주의자들은 대중을 위한 개혁가들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들은 궁중에 속한 지식집단으로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개혁을 우선시했다는 점이다. 이런 초기 인문주의자적인 관점이 이 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대상들 가운데 성직자와 무지렁이 농민들은 언제나 신흥 부르조아지와 학생들의 먹이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부르조아지나 학생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성직자와 농민들을 속여 먹지만 그것은 이들의 이야기에서 하나의 웃음거리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 승리를 쟁취하게 되는 부르조아지와 학생계층은 근대로 들어오면서 새로운 지배계급으로 편입된다는 점이다. 상인들은 경제를 학생들은 귀족을 대신하는 새로운 관료집단으로 자리매김하면서 근대의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는 것이다. 

이제 새로운 신흥 부르조아지들은 페스트라는 거대한 부조리한 악에 대하여 교회의 도움을 필요로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 스스로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페스트를 이겨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교회의 신앙 대신 경제적 부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데카메론은 이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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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조국을 위하여 싸웠다
솔로호프 / 교문사(청문각)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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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장편소설은 러시아에서는 <大祖國戰爭>으로 불리우는 독.소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작품은 숄로호프 자신이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전선을 직접 시찰하고 그 생생한 인상을 우리에게 전달하는 기록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언뜻보면 소설이라기 보다는 신문의 기사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만큼 소설이면서도 현장감을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장편소설은 당시 소련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지에 실려 호평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기록문학에 속하는 소설이기 때문에 특별히 어떤 줄거리를 따라서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다. 다만 병사들과 같이 움직여가는 붓끝을 통해 현장을 우리에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작가가 묘사하는 장면은 소설적 허구가 아니라는 점이다. 당시 러시아군은 독일군의 기습적인 전격전에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아 저항다운 저항을 제대로 시도하지 못하고 퇴각에 퇴각을 거듭하고 있었다. 여기서 숄로호프는 승리의 군대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적에게 타격을 입은  赤軍의 패잔부대가 돈 강을 따라 초원지대로 퇴각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퇴각의 묘사는 어찌보면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아주 위험한 발상이지만 숄로호프는 퇴각을 무기력한 패배가 아니라 승리를 위한 하나의 시련으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 소설에 나타나는 퇴각의 과정은 비극적이고 비관주의적인 시각이 아니라 여유로운 낙관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퇴각의 과정에서 각각의 병사들이 보여주는 갖가지 이야기는 전투의 두려움이나 공포보다는 일신상의 걱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읽다보면 마치 우리 자신이 그 부대를 따라 가는 것과 같은 생생함으로 다가온다.

낙관적인 전투의 상황를 통해서 작가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조국과 전우애라는 날줄과 적을 향해 최후까지 싸워 조국을 지켜야한다는 씨줄이 직교하면서 하나의 무늬를 그려내고 있다. 이 무늬는 당시 러시아가 처한 위기와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하는지를 암시하고 있다. 게다가 숄로호프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십분 발휘하여 퇴각하는 러시아군을 묘사하면서 초원지대의 자연경관 또한 유려한 필체로 그려나가고 있다. 그 자연의 모습을 읽다보면 <해바라기>라는 영화의 인상적인 장면이 연상되기도 한다.  

독소전 개전 초기 독일군의 전격작전이 워낙 신속하게 이루어져 러시아군은 저항다운 저항을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퇴각을 거듭하였다. 이 당시 러시아를 구한 것은 전략도 전술도 아니었다. 그것은 상부로부터 내려온 <후퇴하는 자는 모조리 사살하라>는 전문이었다. 이 결과 러시아 병사들은 독일군에게 죽거나 아군에게 죽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러시아병사들은 자신의 편에게 죽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고 그 시간을 이용해 러시아는 병력을 재편성할 시간을 벌 수 있었던 것이다.

숄로호프는 이런 상황을 병사들의 입을 통해 여러 각도에서 조명하고 있다. 이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고향을 잊지 못하고 애인을 생각하고 부모들을 걱정한다. 고향에서 농사를 짓던 병사들은 전쟁의 와중에서도 농사걱정을 한다. 그렇면서도 전투가 벌어지면 이들 농촌출신의 병사들은 자신의 맡은 임무를 우직할 정도로 충실하게 이행하였다. 여기서는 퇴각의 이야기를 그리지만 전투와 평화로운 분위기를 교대로 묘하하면서 러시아 민중의 조국 사랑과 결코 쓰러지지 않는 강력한 정신을 묘사하고 있다. 이 소설을 읽다보면 왜 러시아인들이 <大地>를 <어머니 러시아>라고 부르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러시아 민중이 독일의 침략에 강력하게 저항한 것은 공산당이나 스탈린의 사상에 동조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신들이 뿌리를 박고 있는 어머니 러시아인 대지를 수호하기 위한 자발적인 투쟁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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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열림원 이삭줍기 12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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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남부의 끈적거리는 선율. 그리고 거기에 술집이 있다. 주인은 거구의 여자... 그리고 한 꼽추.

꼽추와 정상적일 수 없는 여인과의 관계... 한수산의 부초에서 난장이가 벌이는 성적 이미지가 교차된다.

왜 슬픈 카페의 노래일까...  재즈라는 음악 때문일까, 아니면 후덥지근한 날씨탓일까.

인간에게 외모와 결합은 사랑이라는 단어 앞에서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아름답다는 기준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고기집에서 고기가 맛있으면 "끝내준다"는 표현을 한다. 아름답다는 단어는 그것과 유사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책을 읽기보다는 고기집을 찾아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카슨 메컬러스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도 꼭 읽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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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지식, 그노시즘 - 신화상징총서 4
세르주 위탱 지음, 황준성 옮김 / 문학동네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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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노시즘gnosism은 보통 靈智主義로 알려져 있다. 영지주의는 초세기부터 교회의 견제를 받았다. 이는 교회가 로마제국의 통치체제를 위협하는 요소로 인식되어 박해를 받은 것과 유사한 과정을 보이고 있어서 무척 흥미롭다. 교회가 로마제국의 인정을 받아 국가종교로 변모하고 결국 자신이 또 하나의 제국이 되면서 영지주의는 엄청난 탄압을 받게된다. 영지주의의 주장이 교회를 위협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는 현대인들이 영지주의와 비슷한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는 신비주의와는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교회는 중세의 신비주의자들인 십자가의 성 요한, 빙겐의 힐데가르트, 아빌라의 데레사와 같은 수도자들의 사상은 교회의 영성적 측면에서 인정하고 있다.

어떤 점에서 신비주의와 영지주의는 차이가 있는 것일까. 신비주의는 이성과 신앙의 문제를 상호보완적으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즉 "믿기 위해서 이해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말처럼 신앙과 이성은 독립적이기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인식은 이성과 신앙을 초월한 무한히 우월한 완전한 인식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수많은 개별종교들의 근원이되는 최초의 본원적 지혜와 연결이 되는데 이는 종교에서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즉 영지주의자들은 신의 영역 대신 인식을 그 자리에 대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종교의 입장으로 볼 때 종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영지주의와 영지주의자들은 교회의 박해를 받아야만 했다.

영지주의자들이 견지하는 태도는 언뜻보면 기독교와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이 있다. 아니 서로 겹쳐지는 부분이 상당하다. 특히 육체와 영혼의 관계는 육체는 감옥이고 영혼은 그 감옥에 갇힌 것이란 주장은 중세적 기독교 신앙관과 아주 흡사한 모양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기독교가 지상의 세계에 구원의 시간표가 존재하는데 반해 영지주의자들은 지상에 이런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완전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영지주의에서는 순환을 주장한다. 이 순환은 불교의 윤회와 비슷한 것으로 다른 점은 불교가 윤회를 통해 해탈의 과정으로 간다면 영지주의는 단순한 순환의 반복만을 거듭할 뿐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 입문한 사람들은 그로부터 이 세계에 존재하지만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 존재하는 자신들의 위치는 어떻게 규정해야하는가. 여기서 영지주의자들은 철저한 이분법으로 세계를 구분한다.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를 구분하여 자신들은 빛의 세계에 다른 사람들은 어둠의 세계에 있다고 강조한다. 이 빛과 어둠의 세계는 인간 세상의 낮과 어둠 처럼 연속되는 것이 아니라 단절되어 있는 세계이다. 이 세계에 입문하는 순간 그의 구원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에서는 기독교에서와 같은 구원자가 필요치 않은 것이다. 자신들이 속한 그 단체가 구원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의식을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참여하는 특수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는 모임을 아가페라고 주장하고 아가페에 참여하는 사랍들 모두에게 구원의 문이 열려있다는 기독교적 사고방식과는 아주 상이한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자들은 은밀한 자신들만의 비밀집회를 가져야만 하였다. 그리고 이 비밀의 전례를 전수받기 위해서는 집단의 소수에 들어가야만 한다. 이들 소수는 집단을 이끌어가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세속의 사람들과 구분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특별한 윤리에 집착한다. 이들은 성에 대하여 철저하게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데 이는 영지주의의 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초세기 기독교는 이 위험한 유혹으로부터 아주 극적으로 벗어남으로서 영지주의로 빠져들어가는 것을 막아낼 수 있었다. 기독교도들은 독신을 자신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으로 보고 있지만 영지주의자들은 육체적인 결합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거부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의 신화에 자주 등장하는 자웅동체의 이야기는 이들이 육체적 결합에 대한 해결책으로 신화의 세계로 회귀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영지주의자들은 종말이 오면 구원받는 사람들을 자신들의 집단에 속한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나누어 구분한다. 이는 기독교가 회개에 기반을 둔 구원과는 아주 차별되는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영지주의의 이런 요소들은 당연히 기독교와의 충돌을 야기할 수 밖에 없었다. 사실 이런 정밀한 이론의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일정한 신학적. 철학적 교육을 받은 학자들 뿐이었다. 대다수의 일반 사람들에게는 영지주의나 기독교나 같은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영지주의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영지주의와의 차이점을 교회가 언급하면 할수록 일반인들은 혼동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그만큼 이 둘 사이의 접점이 모호하였다는 의미이기도 하였다. 결국 교회는 이런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교리의 확립과 신앙의 근간을 정리하기 위해 공의회를 소집해야만 했고, 여기서 그동안 비교적 자유로웠던 신앙의 전제들을 문자로 고정시키게 되었다. 이 결과 문자로 고정된 신앙의 신조와 조금이라도 차이가 있는 사상은 이단으로 몰아 철저하게 박멸하였다. 그리하여 영지주의는 공개적인 장소에서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교회가 영지주의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뒤에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체에 대한 통일성이었다. 이 통일성은 그때까지 그 어떤 종교도 실현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였다. 하지만 교회는 그 댓가로 인간의 이성 속에 자리잡고 있던 무한한 상상력을 상실하였는지도 모른다. 도그마에 갇힌 종교는 어찌보면 새로운 영지주의일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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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비드 신화집 - 변신이야기
오비디우스 / 솔출판사 / 199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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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신이나 인간이 동물이나 식물로 변하는 1백10가지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실 인간들에게 있어서 변화의 세계는 생소한 것은 아니었다. 태고의 인간들은 자연현상 특히 달의 차고 기울어짐에서 한 사물이 어떻게 변화하며 그 변화의 과정에서 보여주는 신비한 경험을 체험하였던 것이다. 그믐의 두려움과 초승달로 상징되는 희망의 싹, 보름달의 환희와 그 뒤에 오는 기울어짐의 미학은 고대인들이 변화를 하나의 사물속에서 다양하게 체험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자연현상의 변화가 종교적 상징의 변화로 이전되면서 인간들은 변화의 자연에서 느꼈던 경이로움보다는 두려움을 느껴야만 했다. 오비디우스가 기술한 변신의 이야기는 경이로움의 세계를 기록한 것이 아니라 신의 능력에 대한 인간의 두려움을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몇 몇 이야기는 신의 자애로운 자비심을 보여주지만 대부분의 다른 이야기들은 신의 가차없는 보복에 따른 변신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그리스신화를 사마천의 사기에 견주어 본다면 올림푸스산에 거주하는 12신의 이야기는 本紀이고,  기타 하천이나 산 그리고 지역의  신들은 世家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변신의 주인공들은 신화속의 列傳인 셈이다.

우리는 사기에서 열전을 재미있게 읽는 이유는 그 안에 인간사의 모든 요소가 스며들어있기 때문이다. 성공과 실패, 우정과 배신, 인내와 환희 등등 모든 요소가 열전이라는 장르 속에 들어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 신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인 신과 인간의 대립과 조화의 이야기는 바로 이 변신의 이야기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 속에 나타나는 변신의 요소는 신과 인간의 경우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신들의 경우에는 이기심의 충족이나 도움의 요소로 변신이 행해진다. 제우스의 바람기는 그의 탁월한 변신에 의해서 가능할 정도였다. 즉 신의 변신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가능한 요소라는 점이다. 신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경우 아무때라도 변신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그렇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인간들은 인간 능력의 한계로 인해 변신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때문에 이들의 변신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것이었다. 이런 불평등은  당시 로마인들이 인간의 존재와 근원이 신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굳게 확신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신들은 변신을 통해서도 자신의 능력에는 변함이 없다는 사실이다. 이런 신과 인간간이 불평등한 관계는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에서는 일상적인 것이기에 당대의 사람들도 어떤 모순을 느끼지 못하였다.  인간의 경우 변신을 하게 된다면 그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새로운 변신의 모습이 자신의 미래가 되는 것이다. 신의 능욕을 피하기 위해 월계수로 변한 다프네, 제피로스의 심술로 죽은 히아신스, 신의 저주로 수선화가 된 나르시소스는 인간의 한계성을 증명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스 신화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한 변신은 가톨릭의 聖變化Incarnatio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인간의 구원을 위해 빵과 포도주가 육체와 피로 변한다는 가톨릭의 변화는 신화와 종교의 본질적인 문제를 말하고 있는듯 하다.

오비디우스는 로마 제정 초기의 어용문필가였다. 그는 황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말년에는 필화로 인해 일리리쿰지역으로 유배를 당하였고 돌아오지 못한채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볼 때 그의 작품은 항상 일정한 선을 유지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가 이런 변신을 기술하였다는 것은 어쩌면 황제에 대한 찬가를 기술한 것인지도 모른다. 황제와 그의 신민들의 관계가 이 변신 속에 드러나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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