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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클라스 후이징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월
평점 :
품절
우리의 풍습에 칠월 칠석에 옷과 책을 말리는 쇄서폭의(日+麗書曝衣)가 있었다. 지리한 장마가 끝나는 시기에 강렬한 햇빛에 그동안 눅눅해졌던 옷과 책을 널어 말리는 쇄서폭의는 책을 사랑하는 선비들의 호사스런 풍속이었다. 이 책은 우리 머리 속을 쇄서폭의하는 빛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의 마지막에 언급되어 있는 책벌레의 책들은 정말로 낯선 풍경을 제공한다.
클라스 후이징은 <여덟번째 양탄자> 에 공작새를 배치하였다.
<공작새는 하늘 아래 날개 달린 뭇동물 가운데 자태가 단연 빼어나게 아름다운 새입니다. 색채가 눈부실 뿐 아니라 날개가 어찌나 고운지 보는 이의 넋을 앗아갈 정도입니다... 그러나 공작새의 눈길이 제 발치에 닿은 순간 갑자기 큰 소리로 거칠게 울부짖습니다. 함부로 생겨먹은 발의 모양이 공작새의 아름다운 외모와는 딴판으로 썩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대, 이성으로 사유하는 인간이여. 하느님이 정해 주신 그대의 직분과 그대에게 베풀어 주신 호의를 찬찬히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가슴 깊숙한 곳에서 올라오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십시오. 이번에는 그대의 발을 내려다보십시오. 지금껏 저지른 죄악을 돌아보시십시오. 그리고 그대는 하느님께 소리치고 울부짖으십시오. 공작새가 제 발을 미워하듯이 그대는 자신의 지난 죄업을 미워하십시오. 그리하여 그대의 신랑 앞에 떳떳이 나서도록 하십시오. 자연학자 피지올로구스는 공작새에 대해서 잘 설명하였습니다.> - 피지올로구스 중 53.공작새 -
책은 어떻게 읽어야하는가? 침착하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글의 흔적을 뒤쫓는 현대의 독자들... 아무런 의미가 없더라도 자신의 의미를 대입시키는 독자들...
그래서 책은 말한다. Noli me tangere! 이 말은 부활한 그리스도가 아직 하늘로 올라가지 않았으니 나를 잡지 말고 형제들에게 찾아가 알리라는 의미였다. 잡지 말라... 의미의 끝자락을 붙들지 말라. 그 끝은 미혹의 사라짐일까, 아니면 더 큰 미혹에 휩싸여 다른 어떤 것을 볼 수 없음인가...
Ecce liber! (이 책을 보라!) 혹은 Ecce te!(네 꼴을 좀 봐라!)
손님으로 가서 창피스런 말을 듣는 것과 빚쟁이의 시달림을 받는 것은, 지혜있는 사람으로서는 못 견딜 일이다. - 집회서 29:28 -
인간의 존엄성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지식, 지혜 아니다. 그것은 의. 식. 주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것이 충족될 때 인간은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의 인식은 나에서 너로 그리고 우리로 변해간다. 이것은 <크루디스탄의 황야>에서 <로드리간다의 성>으로 그리고 다시 <베니토 후아레스>로 흘러가는 흐름이다.
여기에 언급된 책 가운데 몇 권을 읽었을까. 그 숫자를 헤아리는 것 조차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