힌두교의 그림언어
안넬리제 외 / 동문선 / 1994년 1월
평점 :
절판


오래 전에 어디선가 인도와 동남아시아 무용에 대해서 들었던 적이 있다. 이들의 무용 방식은 우리의 춤사위와 사뭇 다른 점이 많았다. 우리의 무용이 절제와 폭발이라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이들의 춤은 외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큰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이런 특징의 하나가 무용의 동작 하나 하나를 손짓으로 설명해 주는 것이었다. 힌두권과 동남아시아의 무용은 손짓에 따라 어떤 상황인지를 설명해주고 그 인물은 어떤 성격-악인과 선인-인지를 보는 사람들이 알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우리의 무용이 마음에 호소하는 것과 가장 큰 차이를 드러내는 것으로 느껴졌다. 이런 힌두교와 동남아시아의 무용은  중국의 경극처럼 옷차림과 얼굴 분장을 통해 그 인물의 성격을 뚜렷하게 제시해주는 것과 유사함을 느꼈다.

사실 동남아시아는 우리에게는 조금은 낮선 힌두문화권이란 사실이다. 앙코르와트나 보로부두르사원같은 문화유적은 힌두교의 색채가 아주 농후하다. 그리고 이들 건축물에 장식되어 있는 신상이나 동물의 조각은 동북아시아의 형태가 아니라 인도의 형태를 띠고있다. 그리고 이런 건축에 조각으로 표현된 이야기 역시 힌두적 사유에서 발생한 신화의 이야기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신화나 전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힌두교의 신들을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라 할 수 있다.  그래야만 인도인들과 주변 문화의 사고체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리스 신화를 통해서 그리스와 주변 유럽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 할 수 있다. 그리스의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의 원주민과 이주민 사이의 갈등과 통합관계를 신들의 성격을 분석하면서 자연스럽게 추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들 신들이 주변국가로 퍼져나가면서 정복자의 신 혹은 더욱 위력이 강한 신이 정복지의 기존의 신을 대체하거나 그 성격을 흡수하면서 가장 강력한 신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은 인류의 역사적 측면에서도  흥미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론은 인도의 힌두교 신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힌두교에서는 그리스도교나 이슬람교에서와 같은 절대 유일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힌두교에서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신들이 모두 지상 존재의 다양한 나타남이라고 보고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들 그 각각은 자체로서 진리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우주의 창조, 유지, 파괴의 분신으로서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의 3신이 가장 상위에 위치하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와 포세이돈, 그리고 하데스가 하늘과 바다 그리고 지하의 세계를 관장하고 있지만 신들과의 위치에서는 절대적인 것이 아닌것과 유사하다. 이런 인도의 힌두적 관용성과 다양성은 이론적으로는 유일신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보여지는 상황은 다신교적 측면이 강하다.  그리고 힌두교 역시 여타 민족의 신화에서처럼 우주와 세계의 창조에 관한 신비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힌두교에는 민속신앙의 흔적이 아주 강하게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다양한 힌두교의 신에 대한 이해는 그들의 건축물에 다양한 신의 모습을 조각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 건축의 문양 역시 우리의 눈에는 혼란스런 혼돈 혹은 무질서로 보이지만 인도인들의 눈에는 지극히 자연스런 통합의 측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요즘 우리들은 부쩍 인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다. 19단 곱셈법에서부터 브릭스BRICs라는 단어에 이르기까지 인도는 과거의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미래와 현재의 나라로 다가오고 있다. 그 나라를 이해하는 가장 손 쉬운 방법은 역사와 신화를 이해하는 길이라 할 수 있다. 인도 결코 신비한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신들의 모든 것을 알때 인도인들의 행위 그 자체가 신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활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힌두의 조각이나 그림에 표현되는 물고기는 영혼의 자유를 의미한다. 코끼리는 우주의 운반자이며, 다산성을 상징하고, 말은 역동적인 힘으로 왕국의 팽창을, 사자는 왕의 권위를, 백조는 영혼의 재생을 의미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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